도시유랑

너를 의심하는 겨울 1부

by 윤담

겨울은 늘 늦게 오는 척했다. 바깥 공기가 먼저 차가워진 뒤에야 겨울이 왔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실은 그보다 한참 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사람의 말끝이 먼저 얇아지고, 손등 위의 핏기가 먼저 물러나고, 웃음이 문장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마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계절은 늘 그런 식으로 몸 안쪽부터 자리를 잡았다. 바깥보다 먼저, 생각보다 깊게.
현우는 그 겨울을 오래 전부터 통과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무실 창가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은 이상하게도 정지된 것 같았다. 유리 너머로 퇴근길 차량들이 엉킨 채 붉은 등을 밀어내고 있었고, 건너편 빌딩 창문들에는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는데도, 그는 그 모든 움직임과 관계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고, 엄지손가락만 아주 느리게 화면을 위아래로 밀었다. 다시 같은 대화창. 다시 같은 문장. 다시 같은 공백.
“오늘 늦어. 먼저 자.”
짧은 문장이었다. 너무 짧아서, 말보다 잘린 자리들이 더 많이 보였다.
현우는 그 문장을 세 번째 읽고, 네 번째 읽고, 다섯 번째 읽었다. 눈으로는 이미 외울 만큼 읽었는데도 계속 읽었다. 화면이 조금 어두워지면 다시 켰고, 메시지창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무언가 달라져 있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늦어. 먼저 자. 두 문장 사이의 건조한 틈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손을 떼지 못한 채로.
잠시 후 다시 들었다.
사무실 안은 이미 절반쯤 비어 있었다.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도 멎었고, 회의실 쪽에서 새어 나오던 낮은 말소리도 끊겼다. 누군가 외투를 챙기며 의자를 밀어 넣는 소리가 났고, 코트를 입은 직원 둘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멀어질수록, 현우가 있는 자리만 더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메시지창 아래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렸다. 답장을 쓸까. 왜 늦는지 물을까. 누구랑 있는지 묻는 것은 너무 직접적이고, 늦는 이유를 물으면 덜 초라해 보일까. 그는 자기 질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해도 안쪽에는 이미 점액 같은 의심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그래도 결국 입력창에 짧게 문장을 적었다.
“일 아직 안 끝났어?”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는 동안에도 그는 자기 문장이 비굴해 보인다고 느꼈다. 보내고 나자마자 더 그랬다. 늦는다고 했으면 끝난 것인데, 다시 묻는 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말투는 언제나 어설펐다. 그는 화면을 가만히 보았다. 1분, 3분, 7분. 답은 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상상은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정말로 일이 남았을 수도 있었다. 지윤은 요즘 바빴고, 프로젝트 마감이 겹쳤다고 했다. 야근도 잦았다. 팀장이 꼼꼼해서 퇴근 직전에도 수정사항을 던진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현실적이었다. 현실적인 설명은 늘 손쉽다. 다만 오래 버티지 못할 뿐이었다.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지윤의 대화창 위 이름을 오래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사진 속 지윤은 늦가을 어느 산책로에서 웃고 있었다. 니트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내린 채 컵을 들고 있었고, 바람에 앞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 웃음은 카메라를 찍는 사람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 사람이 자기였다는 사실이 문득 희미하게 느껴졌다. 사진은 과거를 남기는 대신, 가끔 과거가 얼마나 먼지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민석.
지윤의 회사 동료.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니, 한 번보다 조금 더. 회식 자리에 잠깐 들렀던 적도 있었고, 퇴근 후 카페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 남자는 웃을 때 눈을 오래 맞추는 습관이 있었다. 말을 할 때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고, 상대가 말하는 동안 쉽게 끼어들지 않았다. 사소한 습관인데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늘 있었다. 특별히 잘생긴 것도 아니고, 대단히 눈에 띄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공간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들. 현우는 그런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경계했다. 그 부드러움이 얼마나 쉽게 타인의 호감을 빌려 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메시지를 또 한 번 읽었다.
오늘 늦어. 먼저 자.
그 문장은 아주 천천히 다른 얼굴을 갖기 시작했다.
늦어.
왜 늦는지 말하지 않았다.
먼저 자.
자신은 그 시간의 바깥에 있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현우는 재킷을 챙겨 입고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생각보다 피곤해 보였다. 눈 밑이 어둡고,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는 입술을 한 번 혀로 훑었다. 습관처럼. 초조할 때마다 그러는 버릇이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휴대폰을 세 번 확인했다. 답은 없었다.
차에 올라탄 뒤에도 바로 시동을 걸지 못했다. 운전석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하주차장의 형광등 불빛이 전면 유리에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집에 가면 된다. 씻고, 대충 밥을 먹고, 먼저 자면 된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연애를 하다 보면 늦을 수도 있고, 답이 없을 수도 있고, 피곤해서 무심한 문장이 나올 수도 있다. 그걸 견디지 못하는 것이 더 우스운 일이라고,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차는 지윤의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핸들을 쥔 손은 차분했지만, 숨은 자꾸 짧아졌다. 신호대기에 걸릴 때마다 그는 핸들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일정한 박자였다가, 이내 불규칙해졌다. 앞차 브레이크등이 켜지면 괜히 짜증이 났고, 옆 차선에서 끼어드는 차량이 있으면 이를 악물었다. 운전은 사람의 내면을 생각보다 정확하게 드러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견디지 못하는지, 다급함이 어느 순간 공격으로 바뀌는지.
지윤의 오피스텔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가 축축하게 얼어 있었다. 보도블록 사이사이에 낮에 녹던 눈이 다시 얼어 얇은 얼음막을 만들고 있었고, 가로등 아래에 선 나무들은 가지 끝마다 마른 빛을 걸치고 있었다. 현우는 건너편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출입구가 보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단지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편의점 커피라도 하나 사서 돌아가면 된다고. 그런데도 시동을 끄고 난 뒤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히터를 약하게 틀어 놓았는데도 손끝이 차가웠다. 그는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몇 번 문질렀다. 눈은 건물 입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다림은 시간을 이상하게 만든다. 몇 분이 몇십 분처럼 늘어나고, 몇십 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 버린다. 현우는 입구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숨을 죽였다. 검은 롱패딩을 입은 남자가 나오고, 택배를 든 여자가 들어가고, 술 취한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지나갔다. 그때마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괜한 짓이라는 생각과, 와 버린 이상 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갈아 들었다. 이쯤 되면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상에 증거를 붙이려는 것이라는 걸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몸은 계속 거기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지윤이었다.
그는 일부러 한 박자 늦게 받았다.
“응.”
지윤의 목소리는 조금 낮고 피곤해 보였다. 뒤쪽으로 바람 소리인지, 문이 닫히는 소리인지 모를 짧은 소음이 섞여 있었다.
“집에 가는 중이야.”
현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말이 오히려 의심을 키웠다. 왜 굳이 지금 전화를 하지. 메시지에 답하면 될 것을. 그는 유리문 쪽을 바라봤다. 마침 그 순간 입구가 열리고, 지윤이 밖으로 나왔다. 회색 코트에 목도리를 둘렀고, 손에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민석이 나왔다.
현우의 목 안쪽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탁해진 것 같았다.
지윤은 아직 통화 중이었다. 현우는 차창 너머로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어? 현우야, 나 지금—”
민석이 그녀 옆에 멈춰 섰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지윤의 목도리 끝이 코트 밖으로 비뚤게 나와 있었고, 민석이 그것을 가볍게 집어 정리해 주었다. 아주 잠깐. 정말로 잠깐이었는데, 그 짧은 동작이 현우의 안에서 이상할 만큼 길게 늘어졌다. 지윤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고개를 조금 숙였고, 정리된 목도리를 손끝으로 한 번 만졌다.
현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의 손이 핸들을 너무 세게 쥐고 있어서, 손등 위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턱도 같이 굳어 있었다. 그는 자기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꼬리가 좁아지고, 입술이 한쪽으로 미세하게 당겨지는 표정. 참으려다 결국 못 참는 사람의 표정. 멈추기 직전이 아니라 이미 선을 밟아버린 사람의 표정.
그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찬 공기가 한꺼번에 목 안으로 들어왔다. 걸음이 빨랐다. 얼어붙은 보도블록 위에서 구두 밑창이 얇게 미끄러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윤이 먼저 그를 봤다. 그녀의 눈이 잠깐 커졌다. 놀라는 표정은 아주 짧았다. 곧바로 굳었다.
“현우야?”
민석도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상황을 이해하려는 얼굴이었다. 눈썹이 약간 올라가고, 입이 아주 조금 벌어지는, 아직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한 사람의 표정.
현우는 둘 앞에 멈춰 섰다. 숨이 정리되지 않았는데도 최대한 평평한 척 말했다.
“집에 가는 중이라며.”
말투는 조용했지만 표정이 조용하지 않았다. 지윤은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뭔가를 설명하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설명해야 할 일 자체를 불쾌해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회의 끝나고 내려오는 길이었어.”
“둘이?”
민석이 입을 열었다. “아, 제가—”
현우는 그쪽을 보지도 않고 말을 잘랐다.
“목도리는 왜 만져.”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든 것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민석의 표정이 굳었다. 당황보다는 불쾌에 가까운 표정. 지윤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녀의 볼이 추위 때문만은 아닌 열로 붉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가 묻는 목소리는 낮았고, 단단했다.
현우는 그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어 있고 마른 소리였다.
“내가 뭘.”
“왜 여기 있어.”
“왜 있으면 안 되는데.”
“그게 아니라.”
지윤은 말을 멈췄다. 그녀가 목도리 끝을 손으로 눌러 만졌다. 화가 나면 손이 먼저 움직이는 습관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천 끝을 비틀거나, 소매를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손바닥을 살짝 누르는 식으로. 현우는 그 버릇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
민석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그 말투는 최대한 물러나려는 사람의 것이었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친절이 더러운 의미로 해석된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 지윤이 “미안해요” 하고 낮게 말했으나, 현우의 귀에는 그 말조차 거슬렸다. 왜 사과를 저 남자에게 하지. 왜 그쪽 표정을 먼저 살피지. 그런 생각이 찰흙처럼 끈적하게 머릿속을 밀고 들어왔다.
민석이 돌아서 몇 걸음 멀어지자 현우는 그 뒷모습까지 따라 보았다. 어깨가 넓고, 걸음이 성급하지 않았다. 그 몇 걸음 속에도 그는 자기보다 나은 무엇을 읽으려고 했다. 몸을 돌려 지윤을 봤을 때, 그녀는 이미 완전히 표정을 지운 뒤였다.
“너 차 타고 와서 기다렸어?”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사실상 긍정이었다.
지윤의 눈 아래가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화 때문인지, 지쳐서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미세한 떨림이었다. 그녀는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그를 봤다.
“무서워.”
그 말은 작았지만, 현우를 한순간 정지시켰다.
그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무섭다고?”
“응.”
지윤은 목도리를 더 목 가까이 끌어올렸다. 그 동작이 본능적인 방어처럼 보여서, 현우는 왼쪽 가슴이 비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화도 끊고, 여기 와서 서 있고, 내가 누구랑 나오는지 보고 있고. 그게 정상 같아?”
“정상 아닌 짓 하게 만든 게 누군데.”
말이 나간 뒤, 현우 자신도 그 문장이 얼마나 비열한지 알았다.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돌아가지 않았다. 지윤의 표정이 아주 천천히 변했다. 놀람이 먼저 스치고, 그다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허탈함, 그리고 끝내 피로가 내려앉았다. 그 피로는 현우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상대가 화를 내면 맞서면 되는데, 지치면 손쓸 수 없었다. 지친 사람은 대개 마음을 정리하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집에 가.”
지윤이 말했다.
“얘기 안 해?”
“지금은 못 하겠어.”
“왜, 찔려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차갑게 서 있었다. 막 끓던 것이 아니라 한 번 식어버린 금속 같은 눈이었다.
“그 말 취소해.”
“아니면?”
“취소하라고.”
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양보가 아니었다. 안에서 더 나쁜 상상이 자라고 있는 시간에 가까웠다. 민석의 손. 목도리를 만지던 손가락. 지윤이 피하지 않던 얼굴. 그 짧은 장면은 계속 반복되며 뒤쪽으로 더 길어졌다. 목도리만 정리했을까. 회의실에서도 가까웠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같이 내려오며 무슨 말을 했을까. 어깨는 몇 번이나 스쳤을까. 오늘만 그랬을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질투는 사실보다 속도가 빠르다. 눈앞에서 본 한 동작만으로도 그 이전과 이후를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윤은 더 말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이 닫히며 그녀의 얼굴이 한 번 반사된 뒤 사라졌다. 현우는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따라 들어갈 수도 있었다. 호출 버튼을 눌러 올라갈 수도 있고, 계속 전화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렇게 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술은 굳고, 콧방울이 좁게 벌어져 있었고, 눈은 건물 안쪽을 향해 한 점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섰다.
아니, 돌아선 것처럼 보였다. 차까지 가는 동안에도 두 번 뒤를 돌아봤다. 차 문을 닫고 시동을 걸지 못한 채 한참 앉아 있었다. 결국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또 받지 않았다. 다섯 번째 전화가 넘어갈 때쯤에는 이미 손이 떨렸다. 여섯 번째 전화에서는 연결음이 길게 갔고, 일곱 번째부터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침묵은 사람의 숨소리를 과장했다. 그는 자기 호흡이 얼마나 거칠어진 상태인지 그제야 알았다. 손바닥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핸들에 땀이 묻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역겨움을 느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역겨움. 지윤을 향한 것도, 민석을 향한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것도 같은 종류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현관 불을 켜자 텅 빈 공기가 먼저 맞았다. 방은 따뜻했는데 이상하게 서늘했다. 식탁 위에는 지난 주말 지윤이 사다 둔 귤이 두 개 남아 있었고, 싱크대 옆에는 그녀가 두고 간 머그컵이 그대로 있었다. 흰 컵 손잡이 한쪽에 립밤 자국이 묻어 있었다. 지윤은 물을 마시다가 컵 가장자리를 닦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현우는 그 자국을 한참 보다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닦였다. 너무 쉽게 지워져서, 오히려 마음이 더 더러워졌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고, 화장실로 갔다가 다시 나왔다. 할 일이 없는데도 계속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움직여도 다르지 않았다. 생각은 계속 따라왔다. 오히려 더 구체적이 되었다.
회의실 안의 지윤과 민석.
사람들이 다 나가고, 마지막 자료를 정리하는 시간. 민석이 노트북 화면을 같이 보자고 가까이 앉는 장면. 의자 팔걸이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지윤의 머리카락이 어깨 앞으로 내려오고, 민석이 “잠깐” 하며 넘겨주는 손. 그녀가 웃는 얼굴. 감사하다는 듯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
엘리베이터 안.
둘만 남았을 수도 있다. 늦은 시간의 건물은 비어 있으니까. 닫히는 문, 좁은 거울, 늦은 저녁의 피로. 피곤한 사람들은 경계가 느슨해진다. 낮에는 괜찮던 친절도 밤에는 조금 다른 결을 갖는다. 그는 그 장면 안에서 두 사람을 더 가까이 세웠다. 팔이 스치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멈추는 사이 아주 잠깐의 침묵, 눈을 마주 보는 시간, 묘하게 설명되지 않는 공기. 설명되지 않는 공기를 사람은 얼마나 쉽게 욕망으로 오해할 수 있는지, 현우는 자기 안에서 보고 있었다.
지윤의 집 앞.
“오늘도 수고했어요.”
“민석 씨도요.”
그다음.
그다음부터는 상상이 너무 더러워서 오히려 멈춰야 했다. 그런데 멈추지 못했다. 목도리를 정리해 주는 손이 목 근처에 오래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손이 코트 깃을 스치고, 목 아래로 내려오고, 지윤이 그것을 막지 않는 장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현우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그렸다. 머릿속의 방은 점점 좁아지고, 그 좁은 방 안에 자기가 만든 장면만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는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찬물을 너무 세게 틀어 세면대에 물이 튀었다. 비누 거품을 손등과 손가락 사이사이에 오래 문질렀다. 손톱 밑까지 닦았다. 그러나 씻기고 있는 것이 손인지 머릿속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어둡고 낯설었다. 볼은 야위어 보였고, 눈은 충혈돼 있었다. 그는 한참 자기 얼굴을 보다가 거울에 손을 짚었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정신을 붙들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지윤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현우도 먼저 하지 않았다. 연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먼저 건네는 문장이 무엇이든 자기 쪽이 더 초라해질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손이 자꾸 휴대폰 쪽으로 갔다. 메일을 열다가도, 보고서를 보다가도, 머릿속의 일부는 계속 어젯밤 유리문 앞에 남아 있었다. 민석의 손가락, 지윤의 굳은 표정, “무서워”라고 말하던 입술.
점심시간 무렵이 되자 그는 참지 못하고 지윤 회사 근처를 검색했다. 부서 배치표를 예전에 지윤이 장난처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 얼핏 본 층수와 팀 이름이 기억났다. 검색창에 회사 이름을 치고, 지도 앱을 열고, 구내 카페 위치까지 확인했다. 자기 행동이 얼마나 추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종류의 집요함이 있었다. 남자의 질투는 가끔 사랑보다 자존심에 더 가까웠고, 자존심이 상하면 사람은 생각보다 작은 정보까지 긁어모았다. 연락을 안 하는 대신 정보를 모으고, 묻지 못하는 대신 지켜보고, 확신이 없는 대신 상상을 증거처럼 세우는 식으로.
오후 네 시쯤, 현우는 결국 회사 밖으로 나갔다. 회의가 있다고 둘러댔다. 차는 무의식처럼 지윤 회사가 있는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근처에 도착해서는 길 건너편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 자리를 골랐다. 사무실 출입구가 비스듬히 보이는 자리였다. 커피를 주문하고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컵에서는 김이 올라왔지만 곧 식어 갔다. 그는 유리창 너머를 뚫어지게 보았다.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어떤 선을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몸은 이미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무리 지어 웃는 사람들, 전화를 받으며 걷는 사람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걷는 사람들. 현우는 그들 사이에서 지윤을 찾았다. 마침내 그녀가 보였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숙였다.
지윤은 혼자였다.
그 사실만으로 안도해야 하는데, 희한하게 안도는 잠깐뿐이었다. 그녀가 혼자 걸어 나오자 오히려 또 다른 상상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는 같이 있었으니까 오늘은 따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상상. 이미 걸러져 나온 뒤 따로 만날 수도 있다는 상상. 질투는 증거가 없을 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증거가 없기 때문에 더 넓게 퍼졌다.
지윤이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달려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민석이었다.
현우의 눈빛이 즉시 굳었다.
민석은 숨을 조금 고르며 무언가를 건넸다. 작은 종이봉투 같았다. 지윤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저으며 사양하는 듯했으나 민석이 몇 마디 더 말했고, 그녀는 결국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웃었다. 예의상 웃는 얼굴인지, 정말로 고마운 얼굴인지 멀리서는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질투는 언제나 자기가 보고 싶은 쪽으로만 해석했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었다. 카페 직원이 흘끗 쳐다봤다. 그는 계산도 하지 않은 커피를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갔다.
횡단보도 신호는 아직 빨간불이었다. 지윤과 민석은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 현우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몇십 초를 참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서, 당장이라도 차 사이를 뚫고 건너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이를 꽉 물었다. 눈을 떼지 않은 채.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움직였다. 현우도 빠르게 건넜다. 지윤이 먼저 그를 봤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속도는 어제보다 빨랐다. 놀람, 경계, 그리고 거의 즉시 올라오는 피로. 민석도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당황보다 짜증이 먼저 읽혔다.
“또?”
지윤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현우는 봉투를 가리켰다.

“뭔데 그건.”
민석이 입꼬리를 굳혔다.

“제가 어제 일 때문에 죄송해서—”
“당신한테 묻는 거 아닌데.”
지윤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만해.”
“뭘 그만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가 뭘 보고 있어야 되는데.”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나는 사람 몇이 돌아봤다. 지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 때 사람의 귀 끝이 먼저 빨개진다. 그녀는 봉투를 손에 쥔 채 현우를 노려보았다.
“이건 팀 사람들 다 같이 나눠 먹으라고 산 거야. 어제 내가 회의자료 집에 들고 가서 수정했거든. 민석 씨가 고맙다고 준 거고.”
“그걸 왜 당신이 직접 줘.”
민석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 넘지 마세요.”
짧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현우는 그를 보았다. 남자의 눈빛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당연했다. 누군가가 자기 호의를 반복해서 더러운 뜻으로 뒤집고 있으니. 그러나 현우는 그 시선마저 도발로 읽었다. 분명한 적의가 생긴 순간, 오히려 그동안의 부드러움이 가면처럼 느껴졌다. 다 계산된 친절 아니었나. 처음부터 이런 얼굴을 숨기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질투에 한 번 점화된 머리는 모든 것을 자기 쪽 논리로 편집했다.
“둘이 무슨 사이인데 자꾸 끼어드는데.”
그 말이 나가자, 지윤의 손이 올라왔다.
찰나였다. 정말로 잠깐. 그녀는 뺨을 때릴 생각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올라온 손이 그대로 허공에서 멈췄다. 손바닥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현우는 그 손을 보았다. 맞을 뻔했다는 사실보다, 그 손이 자기에게 향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들어왔다. 지윤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손을 내렸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무서웠다. 우는 얼굴보다 울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이 더 단단할 때가 있었다.
“헤어져.”
그녀가 말했다.
현우는 즉시 대꾸하지 못했다. 그 말이 너무 빨리 나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번은 더 다투고, 설명하고, 변명하고, 울고, 그다음에야 나올 줄 알았던 말이 바로 나왔다. 그는 지윤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손에 쥔 봉투만 구겨지고 있었다.
“지금, 장난해?”
목소리가 조금 쉬었다. 처음으로.
“장난 아니야.”
“이런 걸로?”
“이런 걸로가 아니라.”
지윤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런 사람이라서.”
그 문장은 칼날 같기보다, 오히려 정확한 계측처럼 들렸다. 네가 지금 보여 준 모든 것의 이름이 이것이라는 듯. 현우는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어느 것도 입에 맞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 더러운 행동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었다.
지윤은 등을 돌렸다. 민석이 따라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오히려 그 점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화가 날 텐데, 멀면 멀수록 자기만 더 우스워지는 것 같았다. 현우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쫓아갈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군중이 그들 사이로 흘렀고, 신호등이 바뀌고, 사람들이 건너갔다.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지윤은 정말로 연락하지 않았다.
현우는 이틀을 버텼다. 셋째 날부터는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짧게. “얘기 좀 하자.” 답이 없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더 길게. “그날은 내가 예민했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사흘째 밤에는 전화를 열세 번 했다. 받지 않았다. 그는 술도 잘 못하면서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 와 식탁에 올려두고 하나만 반쯤 마셨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자 속이 쓰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지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훑고, 대화방을 처음까지 올려 보고,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자존심이 무너지면 사람은 아주 사소한 변화에도 매달린다. 오늘 배경이 바뀌었는지, 상태메시지가 비어 있는지, 읽음 표시가 뜨는지 같은 것들.
그러는 동안 그의 상상도 멈추지 않았다.
지윤은 정말 끝내려는 걸까. 아니면 지금 화가 나서 그러는 걸까. 혹시 이미 민석에게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과 싸운 이야기를 그 남자에게 하고, 위로를 받고, “원래 그런 사람 같지 않았는데 무섭더라” 같은 말을 했을까. 그 말에 민석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까. “힘드셨겠네요” 하고 낮게 말했을까. 그리고 그 공감의 얼굴이 얼마나 쉽게 여자의 피로를 녹이는지. 현우는 그런 장면들을 지워내지 못했다. 오히려 세부를 채웠다.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커피. 회사 근처 작은 공원 벤치. 장갑 낀 손. 자신의 욕설과 다툼 끝에 생긴 균열 사이로, 다른 남자의 침착함이 얼마나 쉽게 스며드는지 그는 악의적으로 상상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회사 동료가 “괜찮냐”고 물었으나 대충 웃어넘겼다. 거울을 보면 자기 얼굴이 점점 깎여 나가는 것 같았다. 턱선이 도드라지고, 눈빛은 예민하게 빛났다. 잠을 자도 깊이 자지 못했다. 새벽에 몇 번씩 깨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을 때마다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왔다. 연락이 없다는 건 아직 정리 중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이미 완전히 끝났다는 뜻인지, 그는 어느 쪽도 견딜 수 없었다.
전환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토요일 오후, 현우는 집 근처 약국에 들렀다가 맞은편 작은 서점 앞에서 지윤을 봤다. 너무 갑작스럽게 마주쳐서 서로 몇 걸음이나 멈췄다. 지윤은 혼자였다. 캐멀색 코트에 머리를 묶고 있었고, 손에는 책 두 권이 들려 있었다. 예전 같으면 현우가 먼저 “또 책 샀어?” 하고 웃었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얼굴은 닫혀 있었다. 놀람보다는 지침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 지침이 현우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급하게 다가가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멈춘 채 말했다.
“잠깐만.”
지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바로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녀가 책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쥐는 것이 보였다. 경계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한 번만 말할게.”
현우의 목소리는 그동안 보냈던 수십 개의 메시지보다 훨씬 조용했다. 조용하다고 해서 덜 절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눌려 있었고, 그래서 더 피곤하게 들렸다.
“미안해.”
지윤의 표정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가 아주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는 그 작은 움직임을 보았다. 아직 완전히 아무 감정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듯한,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갈 뜻도 없다는 듯한 미세한 흔들림.
“너한테 화난 게 아니었어.”
그 말은 틀린 말이었다. 그는 바로 고쳐 말했다.
“아니, 화가 났지. 근데 사실은 무서웠어.”
지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람을 따라다녀?”
“아니.”
현우는 자기 대답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면서도 말했다. “아니어야 했는데 그랬어.”
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서점 앞에 매달린 작은 종이 흔들리며 마찰음을 냈다. 멀리서 아이 우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사라졌다. 아주 평범한 겨울 오후였고, 그래서 이 대화가 더 선명했다.
“나도 내가 그럴 줄 몰랐어.”
그는 웃지 않았다. 변명처럼 보일까 봐.
“근데 한 번 의심하니까 계속 의심하게 되더라. 네가 뭘 안 해도, 내가 다 만들었어. 장면을. 표정을. 손이 어디 닿았는지까지.”
그 고백은 스스로에게도 모욕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추지 않고 말했다. 감춘다고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걸 나한테 왜 말해.”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아니.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알아야 하는 거야.”
그녀의 말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차갑게 느껴졌다.
“네가 만든 걸 나한테 덮어씌운 거야.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그림자가 보도 위로 길게 지나갔다. 그는 자기 구두 끝을 보며 말했다.
“알아.”
“아는 사람이 그랬어?”
그 질문에 그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은 다르다. 지윤은 그 침묵을 기다리지 않았다.
“현우야, 질투할 수 있어. 누구나 해. 근데 그걸 핑계로 상대를 감시하고, 추궁하고, 네 상상을 사실처럼 말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녀가 말을 마친 뒤에도 현우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감정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이 얼마나 비겁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 아니면 버림받을까 두려운 자기 연민, 혹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걸 견디지 못해 상대까지 끌어내리려는 폭력. 이름은 여러 개일 수 있었다. 그중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았다.
지윤이 책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듯 안았다. 그 자세에는 피로가 있었다.
“나는 네가 무서웠어.”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날 밤에. 그 다음 날에도. 네가 어디서 보고 있을지 몰라서.”
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윤의 표정은 단호했지만, 눈 아래에는 며칠 못 잔 사람 같은 옅은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제처럼 다가왔다. 질투는 상상 속에서 상대를 더럽히지만, 현실에서는 실제로 상대를 지치게 만든다. 그는 이제야 그 결과를 보고 있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
말하자마자 그는 그 문장이 얼마나 값싼지 알았다. 지윤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말 믿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바람이 더 차가워졌다. 서점 유리문에 걸린 안내문이 펄럭였다. 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아주 희미하게 났다.
“그럼 정말 끝이야?”
지윤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기억과 정이 아주 없지는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 그 미세한 흔들림이 오히려 더 아팠다. 완전히 미워해서 끝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응.”
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
“적어도 지금의 너랑은.”
그 말은 이상하게도 판결문보다 치료서처럼 들렸다. 끝이라는 말보다, 지금의 너라는 말이 더 오래 남았다. 현우는 그제야 이 관계가 단지 지윤을 붙잡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가 미안해한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변명 몇 줄로 되돌릴 수 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자란 더러운 상상과 집요함을 그냥 감정이라고 불러 왔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 다시 누군가를 만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아니, 더 교묘해질 수도 있다.
지윤이 돌아섰다.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몇 걸음 멀어지는 동안, 현우는 그 뒷모습을 보았다. 어깨가 조금 웅크러져 있었고,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겨울의 여자들은 늘 어딘가를 지키듯 걷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도리를 여미고, 가방을 안쪽으로 붙이고, 몸의 바깥쪽 면적을 줄인 채. 그는 자신이 그녀를 그런 식으로 걷게 만든 밤들을 떠올렸다.
지윤이 골목 끝으로 사라진 뒤에도 현우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주머니 안에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입김이 느리게 새어 나왔다. 겨울 공기는 뺨을 때리듯 차지 않았고, 오히려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래서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그는 처음으로 지윤과의 대화방을 열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식탁 위 귤, 싱크대 옆 머그컵, 소파 모서리에 걸쳐 둔 담요. 남아 있는 것은 많았고,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많은 흔적들 사이에서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지윤이 남기고 간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방이었다. 의심과 상상과 자존심과 집요함이 눅눅하게 들러붙은 방. 타인을 들여놓으면 결국 그 사람까지 숨 막히게 만드는 방.
현우는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방 안의 따뜻한 냄새가 금방 옅어졌다. 그는 한참 그렇게 서 있었다. 손등 위로 공기가 닿고, 커튼이 조금 흔들리고, 멀리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는데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기 상상이 아니라 실제 공기가 몸에 닿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중요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은 식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뒤집어 놓은 검은 화면 위로 천장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는 그것을 바로 보지 않았다. 대신 싱크대로 가서 지윤의 머그컵을 씻었다. 립밤 자국은 이미 없었고, 컵 안쪽에는 옅은 물때만 남아 있었다. 그는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천천히 컵을 닦았다. 손잡이 안쪽까지. 바닥의 둥근 면까지. 아주 사소한 일이었고,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래도 컵은 깨끗해졌다. 깨끗해진 컵을 건조대에 올려두고 한참 바라보다가, 그는 알았다.
사람은 남을 의심하기 전에 자기 안의 방부터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을.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목도리를, 누군가의 웃음을, 누군가의 침묵을 더러운 뜻으로 번역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없는 장면을 만들어 놓고, 그 장면 때문에 실제 사람을 다치게 할 것이다. 질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루지 않으면 자란다. 그리고 자란 질투는 사랑의 얼굴을 하고 들어와 결국 사랑이 살 수 없는 곳을 만든다.
창밖에는 늦은 밤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오기 직전의 공기가 있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차문 닫히는 소리,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아주 늦게 돌아온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가 멀어졌다. 현우는 창문을 닫고 등을 기대 섰다. 방 안은 여전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 혼자 있음이 더는 곧바로 누군가를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지 않기를, 적어도 지금부터는 그렇게 버텨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희미하게 생겼다.
그 희미함은 아직 다짐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다만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타인의 죄로 돌리지 않는 순간에 가까웠다.

겨울은, 늘 그런 식이었다. 사람이 알아차릴 때쯤이면 이미 한참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남자편과 여자편 그리고 결말 순으로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년전에 쓴 글인데 지금 봐도 밀도가 있어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2026년 3월 22일 윤담 배상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