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너를 의심하는 겨울 2부

by 윤담

겨울은 늘 안쪽부터 도착했다.
창문을 닫아도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바람은 막을 수 있어도, 말끝이 식는 속도는 막을 수 없었다. 사람의 표정이 먼저 마르고, 웃음이 입술 가장자리에서 얇게 갈라지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이 점점 더 자주 필요해지는 계절. 겨울은 그런 식으로 몸 안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지윤은 그런 겨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표정을 크게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쁠 때도 조금 웃었고, 화가 날 때도 바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손이 먼저 움직였다. 머그컵 가장자리를 문지르거나, 가방끈을 괜히 짧게 쥐거나, 소매 끝을 손등 아래까지 끌어내리는 식으로. 감정이 올라올수록 입은 더 조용해졌고, 손끝은 더 바빠졌다. 현우는 그 버릇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일들이었다.
현우의 휴대폰에 이름 하나가 자주 뜨기 시작한 것은 가을쯤이었다.
수빈.
직장 동료라고 했다. 예전 팀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고, 이직한 뒤에도 가끔 연락한다고. 업무 얘기가 많고, 성격이 털털해서 편하다고. 그런 설명은 하나같이 매끈했다. 설명이 매끈할수록 그 안쪽이 더 잘 미끄러졌다. 사람은 설명으로 안심하기보다, 설명의 모양을 기억할 때가 많았다.
수빈이라는 이름은 이상하게 현우의 목소리를 바꾸었다.
그 이름이 나올 때 현우는 대개 무심한 척했다. 일부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었다. 그런데 지윤은 알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할 때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의 얼굴 근육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현우는 그 이름을 말할 때 입꼬리가 아주 조금 늦게 움직였다. 웃고 싶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얼굴을 덧씌우려는 사람처럼. 가끔은 설명이 너무 많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 여자가 왜 연락했는지, 무슨 부탁이 있었는지, 얼마나 사소한 일인지 먼저 덧붙였다. 그 미리 붙이는 군더더기가 오히려 이상했다.
지윤은 그럴 때마다 물컵을 들었다.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동안 표정을 정리했다.
“그래?”
대개 그렇게만 말했다.
현우는 그 대답을 무심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관심 없는 사람의 짧은 반응으로.
하지만 무심함과 참는 일은 겉에서 보면 비슷했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문장이 접혀 들어가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늦은 여름 저녁이었다.
둘은 현우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아직 다 비우지 못한 국그릇과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현우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지윤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지만, 화면이 너무 환하게 켜졌다. 위로 짧은 알림창이 떴다.
현우님 셔츠 잘 어울리네요 ㅋㅋ 오늘 회의 때 다들 놀랐어요
수빈
메시지는 몇 초 뒤 사라졌지만, 지윤의 눈 안에는 오래 남았다.
그 문장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ㅋㅋ’가 붙어 있었고, 옷차림을 말하고 있었고, 이미 둘만 아는 공기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직장 동료가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고,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경계가 언제나 말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흔드는 건 대개 확실한 장면이 아니라, 애매한 온도였다.
현우가 돌아왔을 때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숟가락으로 국을 한 번 저었다. 이미 식어 있는 국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왜, 식었어?”
현우가 물었다.
“응, 좀.”
그녀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현우는 수빈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회사에서 옷차림 얘기가 나왔고, 회의가 길었고, 별 얘기 아니라고. 지윤은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짧아질수록 현우는 설명을 조금 더 붙였다. 그 설명을 들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면, 이렇게까지 먼저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이미 자신이 그 이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했고, 그 사실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질투는 늘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묻지 못하는 자리에서.
묻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바닥 쪽으로 가라앉았다.
컵 바닥에 가라앉은 찻잎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물 전체의 맛을 바꾸는 방식으로.
가을이 더 깊어질수록 현우의 휴대폰은 점점 더 자주 뒤집혀 놓였다.
식탁 위에서, 소파 위에서, 침대 옆 탁자 위에서.
물론 그 전에도 그랬을 수 있다. 다만 지윤이 이제야 보기 시작했을 뿐일 수도 있다. 한 번 의식한 뒤로는 작은 습관들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진동이 울릴 때 현우가 아주 잠깐 화면을 보고 나서야 뒤집는 손길, 메시지를 읽고 나면 곧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말투, “회사야”라고 말할 때의 지나치게 가벼운 어조.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질투는 증거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오래 자란다.
없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지윤은 자주 상상했다.
현우와 수빈이 회사 복도에서 마주치는 장면.
누구도 주의 깊게 보지 않는 시간, 복사기 앞이나 탕비실 같은 데서.
수빈이 웃으며 “어제 자료 봤어요?” 하고 묻고, 현우가 컵을 들고 고개를 숙여 웃는 장면.
그 웃음이 자기를 향할 때보다 조금 더 가볍고, 조금 더 일상적이라서 오히려 오래가는 장면.
회식 자리도 상상했다.
시끄러운 테이블 끝, 술잔이 몇 번 오가고, 다들 웃느라 시선이 흩어진 사이.
수빈이 현우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여 무언가를 말한다.
현우가 가까이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둘 사이의 거리가 잠깐 좁아진다.
그 거리 안에 특별한 것은 없어도, 특별해지기 쉬운 공기가 있다.
한 번은 더 선명한 기억도 있었다.
초겨울로 접어들던 날, 현우 회사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쳐 같이 맥주를 한 잔 하게 된 적이 있었다. 지윤은 그 자리를 썩 편하게 느끼지 못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히 웃었고, 누군가 건네는 질문에 예의 있게 답했다. 그 자리에는 수빈도 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환한 사람이었다. 말끝마다 웃음이 있었고, 눈을 마주볼 때 조금 오래 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원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더 싫어하기 어려운 사람들.
자리 끝무렵, 현우의 셔츠 소매에 맥주 거품인지 안주 양념인지 작은 얼룩이 묻었다. 현우는 모르고 있었고, 수빈이 먼저 봤다.
“어, 잠깐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현우 소매를 털었다.
손끝이 천을 가볍게 쓸었다.
아주 짧은 접촉이었다.
현우는 웃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지윤은 그 장면을 오래 기억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씻고 누운 뒤에도, 불을 끄고 나서도, 눈을 감으면 그 짧은 손짓이 계속 떠올랐다. 소매를 만지던 손가락.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손. 피하지 않던 현우의 얼굴. 별것 아닌 장면일수록 더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사람은 노골적인 배신보다, 설명할 수 없는 친밀함의 기미를 더 오래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그날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상처받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질투하는 여자는 종종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상대를 의심하면서, 자기 자신도 의심한다.
내가 과민한가.
내가 초라한가.
내가 괜한 데 의미를 붙이는 건가.
그 두 의심 사이에 오래 서 있으면 사람은 쉽게 말하지 못한다.
말하기 전에 이미 자기 감정을 부끄러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윤은 참았다.
참는 일은 표정에 바로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말이 조금 줄었다. 메시지 답장이 짧아졌다. 피곤하다는 말이 늘었다. 현우는 아마 그 변화를 자신의 불안 쪽으로만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변화의 안쪽에는 다른 이름 하나가 이미 자라고 있었다.
수빈.
그 이름은 어느새 하나의 장면이 되어 있었다.
현우가 늦게 퇴근하는 날마다,
휴대폰을 뒤집는 순간마다,
무심한 얼굴로 “회사 사람들이랑 있었어”라고 말할 때마다.
지윤은 상상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둘만 남은 적도 있었겠지.
길게 이어지는 복도 끝, 아무도 없는 회의실, 늦은 저녁의 사무실 불빛.
수빈은 현우에게 무슨 표정으로 말할까.
현우는 그 앞에서 어떤 목소리를 쓸까.
집에 와서 자신에게 쓰는 목소리와 조금은 다른 결일까.
그 상상은 현우처럼 노골적으로 더럽지는 않았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랬다.
그녀는 손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보다,
눈길이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둘 사이에만 통하는 농담이 있는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다가 둘만 남으면 말투가 달라지는지,
누군가를 떠올릴 때 얼굴이 조금 풀리는 그런 순간이 있는지.
그런데 질투가 오래 가라앉아 있으면,
결국 여자의 상상도 점점 더 구체적인 데까지 닿았다.
수빈이 회의 끝나고 현우 옆에 앉아 자료를 같이 보는 장면.
모니터 빛이 얼굴에 닿고, 늦은 시간의 피로 때문에 서로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장면.
현우가 “그건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마우스를 잡으려 손을 뻗다가, 수빈의 손등과 잠깐 겹치는 장면.
둘 다 별일 아니라는 듯 웃는 장면.
그 웃음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을, 지윤은 자기 마음속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끝내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대신, 하나씩 접어 넣었다.
좋아하던 말을 줄이고,
먼저 보내던 사진을 덜 보내고,
늦게 들어와도 굳이 더 묻지 않고,
현우의 얼굴을 오래 보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사랑이 식는 일과 참는 일은 아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질 무렵, 그녀는 스스로도 지쳐 있었다.
회사 일은 바빴고, 프로젝트는 끝날 기미가 없었고, 팀 안에서는 이런저런 잡음이 계속 생겼다. 그 와중에 민석은 단지 일을 같이 하는 동료였다. 말이 지나치게 많지 않았고, 필요한 것만 묻고, 필요한 만큼 도와주는 사람. 현우가 상상하던 것처럼 특별한 표정을 가진 남자가 아니라, 그저 밤늦게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오히려 안심되는 면도 있었다. 불필요하게 친절하지 않고,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풀리지 않는 사람. 그런 종류의 거리감은 피곤한 사람에게 안전했다.
그날도 회의가 길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사무실 창문에 실내 형광등 빛이 겹쳐 비쳤다.
회의실 안에는 서류와 노트북과 식어 버린 커피 냄새가 엉켜 있었다.
지윤은 몇 시간째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문장을 고치고, 수치를 맞추고, 다시 설명을 붙이는 동안 어깨가 굳어 갔다. 현우에게는 중간에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늦어. 먼저 자.”
그 문장은 정말로 피곤해서 나온 문장이었다.
더 길게 쓸 기운이 없었다.
무슨 회의인지, 언제 끝날지, 누가 남아 있는지까지 덧붙일 힘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조금 지쳐 있었다.
자기 속에서 오래 자란 어떤 이름 때문에.
현우가 요즘 자기 표정의 변화를 모르는 척하는 것 때문에.
둘 중 누가 먼저 물어야 할지 모르는 침묵 때문에.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에게서 답이 왔다.
“일 아직 안 끝났어?”
짧은 문장.
겉으로는 걱정처럼 보였다.
지윤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오래 답하지 못했다.
피곤해서이기도 했고, 그 문장이 이상하게 얄미워서이기도 했다.
현우는 언제나 직접적인 질문 대신 둥근 표정을 한 문장을 먼저 던졌다. 정말 궁금한 것은 다른 데 있으면서.
왜 늦는지 묻는 대신, 일이 안 끝났냐고 묻는 식으로.
그 둥근 질문 안에 숨어 있는 모서리를, 지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끝내 답하지 못한 채 회의실로 다시 불려 들어갔다.
밤 아홉 시가 넘어 회의가 끝났을 때, 사무실 층은 거의 비어 있었다.
형광등 아래 먼지가 보일 만큼 고요했고,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지윤은 노트북 가방을 챙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조차 나지 않는 실내였는데도 숨이 차갑게 느껴졌다. 민석도 같이 남아 있었다. 회의자료 일부를 대신 정리해 준 덕에 그녀는 조금 빨리 끝낼 수 있었다.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늦은 시간의 엘리베이터는 조용했다.
문이 닫히고,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고, 금속 벽면에 둘의 모습이 흐리게 겹쳐졌다.
민석이 먼저 말했다.
“괜찮아요? 얼굴 안 좋아 보여요.”
지윤은 피곤한 사람 특유의 웃음을 잠깐 지었다.
입꼬리만 조금 움직이고, 눈은 따라오지 않는 웃음.
“요즘 좀.”
그것뿐이었다.
민석은 더 묻지 않았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편했다.
사람이 너무 지쳐 있을 때는, 상대가 나를 구하려 들지 않는 것이 더 다정할 때가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목도리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지윤은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현우였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응.”
“집에 가는 중이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막 건물을 나왔고, 집 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만 말했다. 더 길게 설명할 힘이 없었다.
그 순간, 민석이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목도리.”
아주 짧게.
그는 헝클어진 끝을 가볍게 정리해 주고는 곧 손을 거두었다.
지윤은 피하지 않았다. 피할 만큼의 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피하면 더 어색해질 거리였다.
그 짧은 동작 뒤에 현우가 전화를 끊었을 때, 그녀는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현우가 나타났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얼굴.
입술이 굳어 있고, 눈이 지나치게 깨어 있는 사람의 얼굴.
지윤은 그를 보자마자 알았다.
그가 이미 어떤 장면을 다 보고 왔다는 걸.
실제로 본 것보다 더 많은 장면을, 자기 머릿속에서 다 만들고 왔다는 걸.
“집에 가는 중이라며.”
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확신이 붙어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
지윤은 그 순간 피곤보다 먼저 모욕을 느꼈다.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세워졌다는 모욕.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누구와 어디서 나왔는지 네가 재단할 수 있다는 듯한 그 시선.
민석이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사적인 감정의 가장 추한 면이, 회사 사람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회의 끝나고 내려오는 길이었어.”
그녀는 최대한 단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현우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말을 듣는 얼굴이 아니었다.
자기가 보고 싶은 장면을 현실 위에 덮어씌우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목도리는 왜 만져.”
그 말이 나왔을 때, 지윤은 정말로 숨이 턱 막혔다.
분노보다 먼저 수치심이 왔다.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볼 수 있구나.
이 사람이 내 앞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도 나를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구나.
그리고 그 바로 다음 순간, 놀랍게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민석이 아니라 수빈이 떠올랐다.
몇 달 전 그 회식 자리.
현우 소매를 털어 주던 수빈의 손.
웃으며 “아, 고마워”라고 하던 현우의 얼굴.
그 장면을 보고도 참았던 자기 자신.
묻지 못하고, 웃는 척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삼켰던 밤.
그때의 자기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되살아난 것 같았다.
민석의 손이 목도리에 닿은 순간,
현우는 폭발했고,
자신은 오래전부터 훨씬 비슷한 장면들을 견디고 있었다.
그 비교가 그녀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억울하다는 감정은 분노보다 늦게 오지만, 더 깊게 남았다.
“무서워.”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말은 하나만 뜻하지 않았다.
하나는 실제로 그가 따라와 서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차를 세우고,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누가 나오는지 보고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정말로 무서웠다.
하지만 다른 하나도 있었다.
자기도 오래 질투해 왔는데, 그 질투를 끝내 저런 모양으로 내보내지는 않으려고 참아 왔다는 것.
그런데 현우는 너무 쉽게, 너무 노골적으로, 너무 더럽게 자기 상상을 입 밖으로 내버렸다는 것.
그 차이가 그녀를 식게 만들었다.
그날 밤 집에 들어온 뒤에도 손이 떨렸다.
가방을 내려놓다가 실수로 립밤을 떨어뜨렸고, 휴대폰을 켰다 껐다 하며 한참 서 있었다. 현우에게서 전화가 여러 번 왔다. 받지 않았다. 전원이 꺼질 때까지 진동이 울렸고, 침대 머리맡 나무판이 아주 약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멈춘 뒤에도 귀 안쪽에서는 계속 진동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지윤은 욕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찬물이 뺨을 타고 내려갔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굳어 있었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고, 눈동자 가장자리가 붉었다. 그녀는 수건으로 얼굴을 눌러 닦다가, 문득 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눈물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나면 울기보다 먼저 굳는 쪽이었다. 감정이 너무 많을수록 오히려 물기가 생기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불을 끄고 천장을 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켰다.
현우와의 대화창을 열었다가 닫았다.
프로필 사진 속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리고 또 수빈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우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절반밖에 모를 것이다.
민석 때문에 화가 난 줄만 알겠지.
자기 안의 불안이 폭발한 것뿐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지윤은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오늘 밤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쌓여 온 어떤 비대칭의 문제였다. 현우는 자기가 질투하는 방식만 질투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참고 가라앉힌 감정들은 보지 못했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그녀는 회사를 갔다.
눈 밑이 조금 어두웠고, 얼굴은 쉽게 웃지 않았다.
민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업무 이야기만 했다.
그 거리감이 고마웠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어젯밤의 추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꾸 재생됐다. “목도리는 왜 만져.” 그 말의 노골함,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 회사 사람 앞에서 연인에게 의심받는 기분. 질투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 말이 얼마나 상대를 작게 만드는지 잘 모른다.
며칠 동안 현우에게서는 메시지가 계속 왔다.
처음에는 짧았다.
얘기 좀 하자
전화 한 번만 받아
미안해
지윤은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동안에도 마음이 완전히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보내는 문장을 무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알림이 뜰 때마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고, 그다음에야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한동안 휴대폰을 뒤집어 두었다.
그 뒤집힌 검은 화면 위로 겨울 햇빛이 얇게 비쳤다.
문득, 현우도 이런 식으로 휴대폰을 뒤집어 놓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질투하는 사람은 사소한 반복에 민감하다.
내가 당했던 장면과 닮은 모양이 보이면, 감정은 쉽게 되살아난다.
며칠 뒤, 퇴근길에 민석이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전날 지윤이 자료를 집에 가져가 밤새 수정해 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팀 사람들끼리 나눠 먹으라고 산 간식이라고 했다. 지윤은 사양하려 했지만 끝내 받았다. 그 순간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현우였다.
지윤은 그 얼굴을 보고 아주 짧은 절망을 느꼈다.
또 왔구나.
이번에도 자기 상상을 다 믿고 왔구나.
“또?”
그녀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그것이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놀람보다 피로가 먼저였기 때문이다.
현우는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그 표정은 이미 질문을 넘어 있었다.
지윤은 설명했지만, 그는 설명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민석이 한 마디 보태는 순간,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끝내, 그 말을 했다.
“둘이 무슨 사이인데 자꾸 끼어드는데.”
지윤은 그 순간 손이 먼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때리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멈추게 하고 싶었다.
입을 막고 싶었다.
자기 앞에서, 다른 사람 앞에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자기를 봤다.
손을 든 여자.
뺨을 때리기 직전의 여자.
그렇게까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말했다.
“헤어져.”
그 말은 충동처럼 나왔지만, 사실은 오래전에 안쪽에서 준비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참는 일은 늘 끝이 있다.
그 끝은 대개 큰 사건보다, 반복된 작은 사건들이 더 먼저 만든다.
현우의 얼굴이 잠깐 비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
하지만 지윤은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이 사람을 아직 좋아한다는 사실과, 이 사람과 계속 있으면 내가 더 작아질 것 같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끼는 일은 끔찍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수록 더 빨리 끊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질투는 때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태를 증명했다.
그 뒤로도 며칠 동안 마음은 계속 흔들렸다.
밤에 혼자 집에 있으면 좋은 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
현우가 자기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던 버릇,
길을 걷다 어깨가 닿으면 아주 잠깐 웃던 얼굴,
자기 머그컵 손잡이를 늘 오른쪽으로 돌려 두던 사소한 배려,
비 오는 날 말없이 우산을 더 기울여 주던 자세.
좋은 기억은 헤어짐 이후에 더 선명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좋은 기억들 사이사이로 늘 수빈이 끼어들었다.
회식 자리의 손,
뒤집힌 휴대폰,
지나치게 매끈한 설명들.
그러니까 지윤의 결심은 단지 그날 민석 앞에서 모욕을 당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날은 마지막 장면이었을 뿐이다.
사실은 그 이전부터 둘 다 서로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한 사람은 바깥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한 사람은 안으로 감춰 굳히는 방식으로.
토요일 오후, 집 근처 서점 앞에서 현우를 다시 봤을 때, 지윤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했다. 오래 다친 자리를 다시 보여줘야 하는 사람의 피로. 그가 “잠깐만”이라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돌아서면 결국 또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멈췄다.
현우는 미안하다고 했다.
무서웠다고 했다.
자기가 장면을 다 만들었다고 했다.
손이 어디 닿았는지까지 상상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윤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역겨움과 연민이 동시에 왔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기 안에 갇혀 있었구나 하는 연민,
그 갇힘이 결국 자기 몸 위에 더러운 상상으로 덮여 왔다는 역겨움.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수빈 이야기를 꺼낼까 잠깐 생각했다.
너도 그랬잖아.
너도 내 앞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을 그렇게 말했잖아.
나는 네 소매를 만지는 손도 봤고, 네가 휴대폰을 뒤집는 것도 봤어.
나는 한 번도 너를 따라가진 않았지만, 대신 집에 돌아와 수십 개의 장면을 만들었어.
나도 질투했어.
나도 너처럼 더럽게 상상했어.
다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이야.
그 모든 문장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것을 말하면,
이 대화가 서로의 잘못을 맞교환하는 자리로 변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더 질투했는지, 누가 먼저 의심했는지, 누가 더 비겁했는지를 가리는 일로 바뀌는 순간, 본질은 흐려진다.
지윤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네가 만든 걸 나한테 덮어씌운 거야.”
그녀는 그 말만 했다.
그 말 안에는 수빈도, 오래 참았던 자기 밤들도, 묻지 못했던 장면들도 다 들어 있었다.
현우는 아마 그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모든 걸 이해받아야만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적어도 지금의 너랑은”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완전히 미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그와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로도 안 된다고.
오래 참다가 차갑게 굳어 버리는 나, 묻지 못한 질투를 침묵으로 바꾸는 나, 불안을 표정 뒤로 밀어 넣고 결국 관계 전체를 식게 만드는 나로도 안 된다고.
지윤은 돌아서 걸었다.
겨울 오후의 빛이 건물 유리에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손에 들린 책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그 작은 통증이 이상하게 정신을 또렷하게 했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바람이 더 차가웠다.
목도리를 끌어올리며 그녀는 생각했다.
현우는 아마 집에 돌아가 또 자기 안을 들여다보겠지.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질투가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자기 공백의 모양일 수도 있다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 역시 자기 안을 들여다봐야 했다.
오래 참았다는 이유로 자기 질투가 덜 더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깨끗한 것도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 뿐, 그녀 역시 수많은 장면을 만들고, 한 사람의 미묘한 표정과 습관에 끝없이 의미를 붙였다.
그 상상은 침묵 속에서 자랐고, 침묵 속에서 관계를 식게 만들었다.
질투는 남자와 여자에게 다른 얼굴로 온다.
하나는 바깥으로 튀고,
하나는 안으로 굳는다.
그러나 끝에 남는 것은 비슷했다.
실제 사람보다 자기 상상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것.
상대가 한 말보다, 하지 않은 말을 더 크게 믿게 되는 것.
그리고 결국, 사랑하던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해석하게 되는 것.
집에 돌아와 코트를 벗을 때, 지윤은 거울 앞에 잠깐 섰다.
얼굴은 피곤했고, 눈빛은 맑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얼굴을 오래 보았다.
현우가 따라왔던 밤보다, 헤어지자고 말하던 순간보다, 지금이 이상하게 더 쓸쓸했다.
상대방과 끝난 것보다, 자기 안의 어떤 계절과도 끝나야 할 것 같아서.
책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문 닫는 소리, 늦게 귀가하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
휴대폰은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처음에는 허전했고, 조금 지나자 오히려 견딜 만했다.
지윤은 손바닥으로 식탁 위를 천천히 쓸었다.
보이지 않는 먼지가 아주 얇게 밀려났다.
사람의 마음도 저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쓸어내면 금방 깨끗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는 것은 남고, 본 것은 남고, 상상한 것도 오래 남는다.
다만 그 남은 것들을 더는 타인의 잘못 위에만 얹어 두지 않는 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닫았다.
유리 너머의 겨울은 여전히 차갑고,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 예전처럼 바로 불안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슬픔은 남아 있었고, 좋아했던 마음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며 자기를 갉아먹는 대신, 자기 안의 침묵이 얼마나 길었는지 먼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겨울은, 늘 그런 뒤늦은 깨달음의 얼굴로 사람 앞에 서 있었다.
이미 한참 차가워진 뒤에야, 아 이게 겨울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처럼.
사랑도, 질투도, 끝내는 일도 아마 비슷했다.
늦게야 자기 이름을 알려 주는 것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