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의심하는 겨울 3부
겨울의 끝은 언제나 모호했다.
눈이 다 그친 뒤에도 공기는 오래 차가웠고, 사람들은 한동안 목도리를 놓지 못했다. 계절은 달력보다 느렸고, 감정은 계절보다 더 느렸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들이 며칠 뒤 다시 몸 안쪽에서 시리게 살아나는 일은 흔했다. 사랑도 그랬고, 질투도 그랬다. 한번 지나간 줄 알았던 장면이 어느 저녁 문득 다시 떠올라 사람의 손끝을 차갑게 만드는 일. 그런 일들은 겨울을 닮아 있었다. 물러나는 척하면서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윤은 창문을 열어 둔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바깥에서는 저녁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고, 맞은편 건물의 창문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밥을 짓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귀가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직 퇴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저녁의 기척들이 유리창 너머로 얇게 번졌다. 그녀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한참 식어 가는 차를 마셨다. 겨울의 기운이 아직 조금 남아 있는 삼월 초였다. 바람은 예전보다 덜 날카로웠지만, 완전히 부드러워지지는 못했다.
헤어진 뒤 한 달이 지났다.
한 달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사람을 완전히 잊기에는 짧았고, 계속 같은 상처 위에 머물기에는 묘하게 긴 시간. 지윤은 그 한 달 동안 아주 성실하게 혼자 있으려 했다. 회사에 가고,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고, 주말에는 일부러 서점이나 전시를 찾아다녔다. 친구들과 약속도 몇 번 잡았다. 웃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웃다가도 어느 순간 무언가가 조금 비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다 정리한 서랍 맨 뒤에서, 끝내 버리지 못한 편지 한 장이 손끝에 닿는 식으로.
현우는 더 이상 무리하게 연락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그날 이후, 아주 드물게 짧은 메시지만 왔다.
오늘 미세먼지 심하대. 목 아프지 않게 조심해
전에 말한 책,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봤는데 생각났어
답장 안 해도 돼. 그냥 잘 지내길 바라
그 문장들은 이전과 달랐다.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고,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자기 죄책감을 덜기 위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
지윤은 답장하지 않았다.
답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지우지도 않았다.
질투가 남긴 것은 의심만이 아니었다.
경계도 남겼다.
좋아했던 사람에게 다시 마음을 열기 전에, 사람은 먼저 자기 안의 문손잡이를 여러 번 만져 보게 된다. 정말 열어도 되는지, 열면 다시 같은 바람이 들이치지 않을지, 오래 망설이게 된다. 지윤은 아직 그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중이었다.
현우 역시 비슷한 시간 속에 있었다.
그는 헤어진 뒤 처음 며칠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다음 며칠은 오히려 지나치게 잤다.
몸이 먼저 지쳐 버린 사람처럼.
회사에 나가면 표정은 멀쩡했지만 집중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장을 읽다가도 같은 줄을 다시 읽었고, 회의 시간에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놓치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자기가 미안하다는 말로 다시 관계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너무 늦었고, 너무 가벼웠다.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끝까지 보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상담을 받았다.
회사 근처 정신건강센터를 검색해 두고 일주일을 망설이다가, 어느 화요일 퇴근 후 예약을 잡았다. 그곳은 생각보다 밝고 조용했다. 대기실 벽은 연한 베이지색이었고, 창가에는 물을 막 준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현우는 이름을 적고 앉아 있다가 자기 손등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떨림이 창피했다. 그런데 정작 상담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자, 더는 감출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편안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처음 몇 번은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냥 싸웠고, 헤어졌고, 자기가 잘못했다는 정도만 말했다.
그러다 어느 날, 상담사가 조용히 물었다.
“그때 당신은 뭘 잃을까 봐 그렇게 무서웠나요.”
현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잃는다는 말보다, 무서웠냐는 말이 먼저 들어왔다.
그는 생각했다.
정말로 지윤을 잃는 것이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지윤이 자기 없이도 괜찮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던 걸까.
자신이 사랑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무서웠던 걸까.
사랑받고 있다는 확인이 끊기는 순간, 자기 안이 너무 비어 있다는 걸 들킬까 봐 무서웠던 걸까.
그는 그날 집에 돌아와 한참을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전보다 조금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다는 것이 꼭 나아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보다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질투는 지윤이 잘못해서 생긴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웃거나, 늦거나, 피곤해하거나, 설명을 덜 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있던 균열이 그녀를 핑계 삼아 드러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지윤도 자기 쪽의 어두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밤 오랜 친구 선아를 만나 술을 마셨다.
선아는 대학 때부터 친구였고, 지윤이 말하지 않는 것도 오래 봐 온 사람이었다. 작은 선술집의 노란 불빛 아래서 두 사람은 천천히 술을 마셨다. 안주는 거의 손대지 않았고, 소주잔만 조금씩 비워 갔다. 선아는 한참 듣기만 했다. 민석 이야기, 현우 이야기, 수빈 이야기, 묻지 못했던 밤들까지. 지윤은 처음으로 자기 질투를 입 밖으로 꺼냈다.
“나도 질투했어.”
그 말을 한 순간,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자기가 피해자인 줄만 알고 있던 서사에서, 자기도 어두운 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알아.”
선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 원래 참는 쪽이지. 그래서 더 오래 곪아.”
지윤은 웃지 못했다.
그 말이 정확해서.
“근데 참는다고 괜찮은 건 아니더라. 나는 그냥 내가 성숙한 줄 알았어. 괜한 데 의미 안 붙이려고 하는 줄 알았고. 근데 아니었던 것 같아. 나도 계속 상상했어. 입 밖으로만 안 낸 거지.”
선아는 잔을 내려놓고 지윤을 봤다.
“그건 성숙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였을 수도 있지.”
지윤은 잔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유리 표면에 손끝이 닿았다.
“맞아. 무서웠어. 내가 묻는 순간 진짜가 될까 봐. 내가 초라해질까 봐. 괜히 나만 예민한 사람 될까 봐.”
그 고백 뒤로 한동안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선술집 안쪽에서는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와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평범한 밤의 소음이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너무 큰 감정은 때로 사소한 소리들 속에서만 잠깐 자리를 찾았다.
“그럼 아직 좋아해?”
선아가 물었다.
지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대신 물을 마셨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선아도 알았다.
“좋아하는 거랑 다시 만나는 건 다른 거야.”
선아가 덧붙였다.
지윤은 그 말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차이를 알았다.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마음만으로 돌아가면 또 같은 방식으로 다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누군가를 다시 받아들이는 일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도 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무엇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지, 그걸 보지 못하면 다시 시작은 다시 끝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 후로도 몇 주가 흘렀다.
현우는 더 이상 지윤을 우연처럼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일상을 다시 세우는 데 애썼다.
상담을 다니고, 운동을 시작했고,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챙겨 먹었다. 자기 손으로 밥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사람을 현실에 붙들어 두었다. 칼로 대파를 썰고, 팬에 기름을 두르고, 밥이 끓는 냄비를 지켜보는 동안에는 상상이 끼어들 틈이 적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손은 타인을 해석하는 데서 조금 멀어질 수 있었다.
지윤도 비슷했다.
퇴근 후 요가를 등록했고, 주말마다 일부러 햇빛 있는 시간에 나갔다. 집 안에 오래 있으면 생각이 길어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점 자기 마음이 어디서부터 어두워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의 애매한 태도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되는 감정의 결. 불안이 올라오는 순간 몸이 먼저 굳는 방식. 묻지 못하고 참고, 참는 대신 상대를 조용히 식게 만드는 버릇.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감정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하는 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둘이 다시 마주친 것은 사월 초, 아주 뜻밖의 날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봄비라고 부르기에는 공기가 아직 차가웠고,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겨울의 끝자락처럼 묵직했다. 지윤은 회의가 일찍 끝나 회사 앞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회색 하늘 아래 사람들은 다들 우산을 낮게 숙이고 걸었다. 버스정류장 유리벽에는 빗물이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도로 위에는 차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검은 물이 얇게 튀었다.
그녀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바람이 조금 불어 우산 끝이 흔들렸다.
그때 맞은편 인도에서 누군가를 봤다.
현우였다.
그도 우산을 들고 있었다.
검은 코트 어깨가 비에 조금 젖어 있었고, 머리는 이전보다 짧아져 있었다. 그는 처음에 지윤을 보지 못한 듯했다가, 신호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둘은 비 사이를 두고 잠시 멈췄다. 도망치거나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분명한 거리였다.
신호가 바뀌고, 현우가 천천히 길을 건넜다.
그 걸음에는 예전 같은 다급함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지윤은 조금 놀랐다.
“안녕.”
그가 먼저 말했다.
“안녕.”
지윤도 짧게 대답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빗소리는 유리벽과 우산 위를 일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괜찮아 보이네.”
현우가 말했다.
그 문장은 예전 같으면 기분 나빴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묘하게 담담했다. 검사하듯 보는 말투가 아니라, 정말로 조심스럽게 던지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냥 지내.”
“응.”
그는 더 붙이지 않았다.
지윤은 그 짧음이 이상하게 편안하다고 느꼈다.
말을 줄인다는 게 언제나 피로의 표시는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버스가 도착했다.
지윤은 잠시 망설였다.
탈 수도 있었고, 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망설임은 짧았지만 명확했다.
현우도 그것을 알아본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스 문이 닫히기 직전, 지윤은 타지 않았다.
버스가 떠난 뒤 유리벽에 빗물이 더 크게 흘렀다.
현우가 그녀를 봤다.
그 눈빛은 묻고 있었지만 밀어붙이지 않았다.
“차 한잔할래?”
지윤이 먼저 말했다.
그것은 화해가 아니었다.
용서도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서로를 다른 거리에서 한 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시도에 가까웠다.
근처 카페는 비 덕분인지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는 물기를 털어 낸 우산 몇 개가 기대어 있었고, 실내에는 젖은 옷감 냄새와 커피 향이 섞여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떤 주문을 하는지, 커피에 시럽을 넣는지 안 넣는지 같은 것들이 먼저 보였겠지만, 지금은 서로의 얼굴이 더 먼저 보였다. 헤어진 시간만큼 달라진 얼굴. 조금 수척해진 곳, 조금 단단해진 곳.
대화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회사 일, 날씨, 요즘 읽는 책.
그러다 어느 순간, 평범한 이야기가 끝나고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 왔다. 그런 순간은 늘 대단한 예고 없이 왔다. 커피잔을 내려놓는 짧은 틈, 누군가 먼저 숨을 고르는 아주 작은 침묵 같은 데서.
현우가 먼저 말했다.
“상담 받고 있어.”
지윤의 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놀랐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
“응. 처음엔 좀 창피했는데,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까지 갔는지 조금 알 것 같아.”
지윤은 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 버릇을 현우도 보고 있었다.
“너 때문이 아니더라.”
그가 조용히 이어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뭘 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게 터진 거였어.”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듣고 싶었는지 아닌지 자기 자신도 잘 몰랐다.
다만 그 문장이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걸 이제야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현우는 잠깐 웃으려다 말았다.
“내가 너를 믿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버려져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지 못한 거였던 것 같아.”
그 말은 서툴렀지만 정직했다.
사람이 자기 비겁함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말할 때는, 보통 그 전까지 혼자 꽤 오래 서 있었던 경우였다.
지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커피가 입안에 씁쓸하게 퍼졌다.
“나도 할 말 있어.”
그녀가 말했다.
현우의 시선이 조용히 올라왔다.
“나도 질투했어.”
그 말이 공기 위에 내려앉았다.
현우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예상하지 못했거나, 예상했어도 실제로 들을 줄은 몰랐던 사람의 얼굴.
“수빈.”
지윤이 그 이름을 말했을 때, 현우는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알고 있었구나.”
“응. 근데 묻지 않았어.”
“왜.”
지윤은 잠시 웃었다.
웃음 같지 않은, 짧고 마른 숨 같은 웃음이었다.
“무서워서. 내가 묻는 순간 내가 되게 초라해질까 봐. 괜한 거 붙들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끊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참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 시간이 지나면 내가 덜 신경 쓰게 될 줄 알았고. 근데 아니더라. 나는 입 밖으로만 안 냈지, 안에서는 계속 만들었어. 장면을.”
현우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방어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전과 달랐다.
“너 소매에 손 닿던 거 봤을 때도, 휴대폰 뒤집을 때도, 내가 다 상상했어. 근데 나는 그걸 말 안 한 게 더 낫다고 생각했어.”
지윤은 잔을 내려놓았다.
“근데 아니었어. 말 안 한 질투도 관계를 망쳐. 그냥 조용히 식게 만들지.”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불편했지만, 예전처럼 서로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같은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침묵처럼 느껴졌다. 질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결국 둘 다 실제 사람보다 자기 상상을 더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두 사람을 같은 자리로 데려왔다.
“수빈이랑은 아무 일 없었어.”
현우가 말했다.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알아.”
“근데 네가 그렇게 느끼게 만든 건 내 잘못이야.”
그는 한 번 더 숨을 골랐다.
“그때 내가 자꾸 휴대폰 뒤집은 것도, 먼저 설명한 것도… 나는 그냥 너 신경 안 쓰게 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행동이었지.”
지윤은 그 문장을 듣고 아주 오래된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해명이 아니라, 자기 행동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보는 말.
그런 말은 늦었지만 여전히 힘이 있었다.
카페 밖으로 비가 조금 약해졌다.
창문 위를 흐르던 물줄기가 가늘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우산도 조금씩 높아졌다. 두 사람은 그날 오래 이야기했다. 헤어진 뒤의 시간들, 혼자 지낸 밤들, 자신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얼마나 겁이 많았는지, 상대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상처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신 자기 몫의 어두움을 자기 입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정직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진실을 이제야 테이블 위에 꺼내 놓는 일.
그날 대화 끝에 둘은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은 너무 쉬웠다.
대신, 조금 더 보자고 했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덮지 말고, 실제로 달라질 수 있는지 확인하자고.
그 이후의 시간은 조용한 복구의 시간이었다.
현우는 더 이상 지윤의 침묵을 자기 불안으로 번역하지 않으려 애썼다.
답장이 늦으면 바로 상상하지 않고, 먼저 자기 호흡을 고르려 했다.
상담에서 배운 대로, 떠오르는 장면을 사실로 취급하지 않고 종이에 적어 보기도 했다.
‘내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것 / 실제로 확인된 것’을 따로 적는 일.
처음엔 우스워 보였지만 효과가 있었다.
머릿속은 언제나 한 덩어리로 감정을 몰아가는데, 글로 쓰면 그것이 조금 분리되었다.
지윤도 바뀌려 했다.
불편한 것이 생기면 더 늦기 전에 말해 보기로.
괜찮은 척하다가 관계 전체를 식히는 대신, 작은 불편을 작은 문장으로 꺼내 보기로.
처음 몇 번은 어색했다.
“오늘 네가 휴대폰 자꾸 보는 거 좀 신경 쓰여.”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 예전의 현우라면 바로 변명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했다.
“미안. 회사 단톡 때문인데, 네 앞에서 그랬으면 불편할 수 있지.”
그 짧은 대화 하나가 지나간 뒤, 지윤은 이상하게 어깨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아니, 별것 아닌 일을 별것 아니게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관계를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지 이제야 알았다.
둘은 천천히 다시 가까워졌다.
주말에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책 이야기를 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둘 사이에는 이제 침묵 말고도 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심스러운 말.
조금 창피하지만 그래도 꺼내는 말.
나 지금 좀 예민해.
그 이름 나오면 기분이 이상해.
오늘은 그냥 피곤해서 말이 짧아.
이런 것들.
사랑은 대단한 고백보다 이런 사소한 말들 위에서 오래 버티기도 했다.
초여름이 가까워질 무렵, 두 사람은 바다를 보러 갔다.
멀지 않은 동해 쪽의 작은 도시였다.
오래 계획한 여행은 아니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지윤이 갑자기 바다 보고 싶다고 말했고 현우가 별말 없이 차를 몰았다. 하늘은 맑았고, 햇빛은 이미 초여름의 결을 조금 갖고 있었다. 바다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파도는 크지 않았고, 모래사장 위에는 듬성듬성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물가 가까이 갔다가 차갑다고 웃으며 도망쳤다.
지윤은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것을 손으로 넘겼다.
현우는 그녀를 보다가 웃었다.
지윤이 물었다.
“왜.”
“그냥.”
그는 더 붙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괜히 숨기는 말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저 웃음이 난 것처럼 보였다.
사람은 같은 문장도 다른 시간에 다르게 읽었다.
둘은 해 질 무렵까지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모래는 낮의 열기를 조금 품고 있었고, 바람은 해가 낮아질수록 서늘해졌다. 하늘은 천천히 빛을 바꾸었다. 푸른색이 묽어지고, 가장자리부터 옅은 분홍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때 현우가 말했다.
“나 사실 오늘 너한테 말하려고 한 거 있어.”
지윤은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아무 의미 없는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손이 잠깐 멈췄다.
“무슨 말.”
현우는 바로 꺼내지 못했다.
그는 잠시 바다를 보다가, 다시 지윤을 봤다.
예전처럼 불안해서 흔들리는 눈이 아니라, 오랫동안 정한 말을 이제야 입 밖으로 옮기는 사람의 눈이었다.
“나는 네가 다시 나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너무 큰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는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이번엔 비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더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근데 계속 생각했어. 같이 있고 싶다고. 그냥 다시 만나는 걸 넘어서.”
지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바람이 손등을 스쳤다.
“예전 같았으면, 불안해서 서두르거나 확인받고 싶어서 말했을지도 몰라. 근데 지금은 아니야.”
현우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
“네가 나를 안심시켜 주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네가 네 방식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버티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사람 옆에서 나도 내 어두운 쪽을 계속 봐야 한다는 걸 아니까.”
지윤은 그 말을 들으며 이상하게 눈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달콤한 말이라기보다, 어렵고 정확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우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주 천천히.
마치 이 순간이 누군가를 붙잡는 장치가 아니라, 오래 생각한 문장의 끝이라는 걸 보여 주듯이.
상자는 검은색도, 번쩍이는 것도 아닌 담백한 짙은 남색이었다.
그는 상자를 바로 열지 않고 손에 쥔 채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바람이 잠깐 더 세게 불었다.
멀리서 아이 웃는 소리가 났다가 사라졌다.
파도는 계속 같은 속도로 밀려왔다가 물러났다.
지윤은 그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겁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밀어붙이지 않는 자세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말은 사랑과 달랐다.
더 오래, 더 깊은 구조를 요구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지윤은 자기 안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두려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과 다시 시간을 쌓아 보고 싶은 마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 아직도 무서울 때 있어.”
그녀가 작게 말했다.
현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끔은 또 같은 데서 흔들릴 것 같아.”
“응.”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야.”
“나도 완전히 괜찮은 사람 아니야.”
그 짧은 주고받음 뒤에, 둘 다 조금 웃었다.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웃는 웃음이었다.
완벽해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함을 알고도 그 옆에 서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웃음.
지윤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현우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그 손은 예전보다 덜 차가웠고, 그렇다고 완전히 뜨겁지도 않았다.
사람의 손은 늘 그 정도였다.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의 온도.
“응.”
그녀가 말했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하게.
현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짧은 순간, 참았던 숨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반지가 있었다. 유난히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빛은 있었지만 조용한 빛이었다. 그는 지윤의 손가락을 잡을 때, 아주 조심했다. 예전처럼 확인하려는 손이 아니라, 허락받은 자리에 닿는 손처럼.
반지가 손가락에 들어갔다.
지윤은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차분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하늘은 점점 더 붉어졌고, 바다 위로 긴 빛의 길이 생겼다가 부서졌다. 모래사장에 앉은 사람들의 그림자도 길어졌다. 누군가가 멀리서 사진을 찍고 있었고, 셔터 소리가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들렸다.
현우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윤은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손을 잡고 앉아 있으면서, 둘은 아마 같은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다투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아니라,
다툴 때도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다퉈야 한다는 생각.
의심이 올라오면 상상으로 키우지 말고 말로 꺼내야 한다는 생각.
참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확인받으려 드는 것이 사랑도 아니라는 생각.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그런 서툰 훈련을 계속하겠다는 약속에 가깝다는 생각.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윤은 창밖을 보았다.
어둠이 천천히 깔리고 있었고, 고속도로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손가락의 반지를 몇 번 만져 보았다. 현우는 운전하면서도 가끔 아주 짧게 그녀 쪽을 봤다. 그 시선은 들뜨기보다 조용했다.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나치게 기뻐하면 깨질까 봐 오히려 더 조심하는 얼굴.
“우리 또 흔들릴까?”
지윤이 문득 물었다.
현우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흔들리겠지.”
지윤이 피식 웃었다.
“솔직하네.”
“근데 예전처럼은 안 흔들리려고.”
그는 앞을 보며 말했다.
“적어도 내가 만든 장면을 너한테 덮어씌우진 않을 거야.”
지윤은 조용히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나도 안 참을게.”
그 짧은 문장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안 참을게.
단순한 선언 같지만, 지윤에게는 오래 묵은 습관을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말하지 않는 쪽이 아니라 말하는 쪽으로, 혼자 식는 쪽이 아니라 같이 버티는 쪽으로 가 보겠다는 말.
현우는 아주 잠깐 웃었다.
그 웃음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스쳤다.
“그래. 그게 더 무섭더라도.”
“응.”
“그래도 말해 줘.”
차는 어두운 길을 계속 달렸다.
바깥은 밤이었고, 안쪽은 조용했다.
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둘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예전과 달랐다.
무언가를 숨기거나 해석하는 침묵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조금 더 가 보자고 하는 사람들 사이의 침묵이었다.
여름이 올 것이고, 가을도 올 것이고, 다시 겨울도 올 것이다.
계절은 반복될 것이고, 사람도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질투는 아마 또 고개를 들 것이다.
어떤 날은 말끝이 짧아질 것이고, 어떤 날은 휴대폰을 자꾸 보게 될 것이고, 어떤 날은 이름 하나가 괜히 마음에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둘은 안다.
그 순간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거기서 상상을 키울지, 말을 건넬지, 침묵으로 식힐지, 그 갈림길이 관계의 온도를 바꾼다는 것을.
밤길 위로 차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지윤은 손가락의 반지를 다시 한번 만졌다.
작고 단단한 그 감촉이, 대단한 약속의 증거라기보다 아주 구체적인 연습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어쩌면 그런 것이었다.
한 번의 열렬한 감정보다,
계속해서 오해하지 않으려 애쓰는 일.
계속해서 자기 안의 어두운 방을 환하게 두려는 일.
그리고 끝내, 그 방 안으로 누군가를 다시 들이기로 결정하는 일.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어둠은 깊었지만, 멀리 도시의 불빛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불빛은 작고 많았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 같지만, 가까이 가면 전부 다른 창문이고 다른 삶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종류의 빛.
사람의 마음도 아마 비슷할 것이라고 지윤은 생각했다.
멀리서 보면 사랑이거나 질투이거나 상처이거나 하나의 이름으로만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방과 틈과 숨이 있다는 것.
현우는 운전대 위에 한 손을 올린 채 다른 손으로 조용히 그녀의 손을 찾았다.
지윤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밤을 건너고 있었다.
무언가를 다 이해한 사람들처럼이 아니라,
아직도 서툴지만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어쩌면 약속은 늘 그런 얼굴로 시작되는지도 몰랐다.
완벽한 확신이 아니라,
흔들릴 것을 알면서도 다시 같은 쪽을 보기로 하는 조용한 선택으로.
작가의 말
질투는, 완전히 건강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감정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잃을 가능성까지 함께 떠안게 된다.
질투는 어쩌면 그 가능성이 만들어내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질투는 사랑의 일부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 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상대를 보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 만들어낸 장면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때부터 질투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대신 해석하고,
확인하려는 대신 의심하고,
말하기보다 상상으로 관계를 채워버리는 방식.
질투를 상대에게 던지는 순간
그것은 상처가 되고,
자기 안에만 가두어 두는 순간
그것은 침묵이 된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이것이다.
질투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 질투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사랑의 방식이 된다.
한편으로 종합해서 올릴까 고민하다가.
1부와 2부 3부가 결이 다르기에
나눠서 올려드렸습니다.
다만 각 이야기는 연결이 되어있으니 1부를 시작으로 보시는 것을 당부드립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