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유리바닥
월급날 아침의 공기는 늘 조금 이상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기분 좋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의 각도에는 미세한 차이가 생겼다. 구두 밑창이 바닥을 밀어내는 속도, 휴대폰을 꺼내는 손끝의 버릇, 지하철 손잡이를 쥔 손마디의 힘이 평소와 아주 조금 달라졌다. 돈이 들어오는 날의 몸은,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숫자를 먼저 알아보는 쪽으로 훈련되어 있었다.
서준호는 그날도 늘 그랬듯 7시 40분의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유리창에는 새벽이 다 걷히지 않은 도시가 어렴풋이 붙어 있었다. 회색은 아직 완전히 낮의 색이 되지 못했고, 사람들의 얼굴 또한 밤과 낮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졸음과 체념, 계산과 기대가 한 겹씩 엷게 포개진 얼굴들. 누구도 서로를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안 되는 종류의 피로가 있었다. 직장인들의 피로는 대개 너무 비슷해서, 남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곧 자기 사정을 들키는 일이 되곤 했다.
준호는 창에 비친 제 얼굴을 힐끗 보았다.
넥타이는 어제 아내가 다려준 것이었고, 셔츠 깃은 다소 해졌으나 아직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버릴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 거의 모든 데 붙기 시작했다. 구두도 그랬고, 겨울 코트도 그랬고, 고장 난 밥솥도 그랬고, 무엇보다 자신도 그랬다. 아직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멀쩡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흔여섯.
고등학생 딸 하나, 중학생 아들 하나. 전세 만기까지는 아직 팔 개월이 남았고, 카드 대금일은 사흘 뒤였고, 어머니의 병원 예약일은 이번 주 금요일이었다. 아내는 구청 근처의 작은 학원에서 오후 시간 접수 일을 했다. 그들의 생활은 화려하지 않았고, 무너지지도 않았다. 물이 가득 찬 잔이 아니라, 늘 가장자리까지 겨우 차오른 잔 같았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넘칠 수 있었고, 그 누군가는 대개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찾아왔다. 교육비, 병원비, 관리비, 계절. 사람을 실제로 무너뜨리는 것은 늘 거대한 사건보다 매달 돌아오는 작은 이름들이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도심 외곽의 물류 솔루션 업체였다.
유리 외벽은 날씨를 지나치게 정직하게 반사했고, 로비에는 계절마다 꽃이 바뀌었다. 누군가 매주 닦아두는 잎사귀들은 지나치게 윤이 났다. 회사라는 장소는 이상해서, 안쪽에서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마를 동안에도 화분만은 늘 적절한 수분을 공급받았다. 복도는 광이 났고, 회의실은 투명했고, 사람들의 인사는 빠르고 정확했다. 정돈된 곳일수록 무너지는 일도 정돈된 형식을 취했다. 지저분한 데서는 비참도 난삽하게 일어나지만, 깔끔한 곳에서는 비참조차 서류철 한 장처럼 반듯하게 접혀 나왔다.
준호는 운영지원팀 과장이었다. 입사 13년 차.
한때 그는 이 회사에서 늙어갈 수도 있으리라고 믿은 적이 있었다. 믿음이란 대개 크고 찬란한 확신이 아니라,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 앉고 같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는 동안 몸속에 조금씩 침전되는 종류의 습관이었다. 회사는 그 습관을 충성이라 불렀고, 직원들은 생계라 불렀다. 이름만 달랐지 결국 같은 의미였다. 떠날 수 없다는 것.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몇몇 직원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모니터들이 하나둘 켜지며 흐린 빛을 뿜었다. 아직 말이 많아지기 전의 사무실은 늘 병실처럼 느껴졌다. 각자의 자리 앞에 앉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회복하려는 사람들 같았고, 각자의 모니터는 밤새 꺼져 있다가 아침마다 다시 심전도를 그려내는 기계 같았다.
준호 자리 맞은편에는 박정우 대리가 앉아 있었다.
서른여섯. 아이는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이었고, 지난해 겨우 영끌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흉내 내며 외곽의 소형 아파트를 하나 샀다. 웃을 때는 이가 먼저 보이는 사람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웃을 때도 이마를 펴지 못했다. 사람은 대출을 안은 뒤부터 표정에 미세한 경사를 갖게 된다. 늘 어딘가 기울어 있고, 무엇이든 한쪽으로 쏟아질 준비를 한 얼굴.
“과장님, 오셨어요.”
정우가 인사했다.
준호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웃었다.
“일찍 왔네.”
“오늘 월급날이잖아요.”
정우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 끝에 아주 옅은 금속성의 떨림이 묻어 있었다. 월급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기쁨보다 부딪히는 소리에 가까워졌다. 통장을 두드리는 생활비, 벽을 긁는 대출이자, 밀린 결제일이 차례로 덤벼드는 소리. 돈은 들어오는 즉시 자기 주인을 찾아 떠나버리는 철새 떼 같았다. 사람들은 잠깐 깃드는 그것을 보고 안도했고, 곧장 비어가는 둥지를 다시 들여다보며 한숨 쉬었다.
준호는 컴퓨터를 켜고 앉았지만 한동안 화면을 보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회사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적이 돌고 있었다. 큰 소리가 나는 정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쓸데없는 말을 줄이고 웃음의 길이를 조금씩 단축시키는 종류의 정적. 회의실 문이 닫히는 횟수가 잦아지고, 부서장들의 얼굴이 유독 건조해지며, 인사팀 직원들의 발걸음이 자꾸만 특정 라인 사이를 오가는 식의 예감. 직장에서 예감은 대개 틀리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몸이 먼저 배우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오전 9시 14분.
사내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제목은 특별할 것 없이 매끈했다.
조직 운영 효율화 관련 안내
회사에서 사람을 자를 때는 좀처럼 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칼이 아니라 조정, 정비, 효율화, 재배치, 구조개선 같은 말을 쓴다. 그래서 사람을 해치는 말들은 늘 모서리가 없다. 부드럽고 평평하고, 마치 누구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을 것 같은 낯으로 온다. 그러나 실제로 상처를 내는 것은 대개 그런 말들이다. 칼은 적어도 칼처럼 보이기라도 한다.
준호는 메일을 열어 내려 읽었다.
사업 환경 변화, 경영 여건 악화, 선택과 집중, 경쟁력 강화. 문장들은 제자리를 잘 찾아간 듯 고요했으나, 그 고요 속에는 누군가의 식탁이 흔들리고 누군가의 아이 학원비가 밀리고 누군가의 자존심이 주저앉는 소리가 감춰져 있었다. 문장은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잔혹했다. 오물이 묻은 칼보다 잘 닦인 칼이 더 깊이 들어가는 법이었다.
각 부서별 개별 면담을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는 문장에 이르렀을 때, 준호는 목 뒤로 식은 손바닥이 스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겨울이 아니라 금속이었다. 오래 쥐고 있으면 체온까지 빼앗아가는 물건의 온도.
그는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은 이미 메일을 받은 사람들의 침묵으로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바쁘게 키보드를 쳤고, 누군가는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프린터 쪽으로 향했고, 누군가는 커피를 타러 갔다가 컵만 들고 돌아왔다. 다들 알고 있었다. 이런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다만 그 일이 자기 이름으로 오느냐, 옆자리 이름으로 오느냐가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을.
10시 03분, 비서가 와서 말했다.
“준호 과장님, 본부장님이 잠깐 뵙자고 하십니다.”
잠깐.
사람의 인생을 기울게 하는 일은 늘 잠깐이면 충분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무너뜨릴 필요가 없었다. 회사는 몇 장의 종이와 몇 줄의 문장, 그리고 상대가 반박하기 어렵도록 훈련된 어조만 있으면 되었다.
회의실은 유난히 밝았다.
블라인드가 반쯤 걷혀 있어 햇빛이 테이블 위를 길게 눕고 있었다. 그 빛은 따뜻하기보다 서류의 흰색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쓰였다. 본부장과 인사팀장이 마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생수 두 병, 서류봉투 하나, 그리고 지나치게 새것인 볼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준비된 장면이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을 최대한 마찰 없이 전달하기 위한 무대.
“앉으시죠.”
본부장은 늘 그렇듯 점잖았다.
준호는 그 점잖음이 사람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매끄럽게 봉합하기 위한 기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는 진심에서 나오는 부드러움이 있고, 문제를 덜 시끄럽게 끝내기 위해 연마된 부드러움이 있다. 둘은 닿는 온도가 다르다.
처음 몇 분 동안은 회사 이야기였다.
시장 상황이 어렵고, 투자 환경이 위축됐고, 비용 구조 개선이 불가피하며, 조직 슬림화가 필요하다는 말들. 준호는 그 말을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지 않으면 비이성적인 사람이 될 것 같았고, 이해해도 결국 잘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지만, 직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개 반박보다 이해의 문장을 먼저 익힌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생존술이었다.
이윽고 인사팀장이 서류봉투를 밀어놓았다.
“많이 놀라셨을 수 있습니다. 회사도 여러 방안을 검토한 끝에, 권고사직 형태로 진행드리게 되었습니다.”
권고사직.
그 단어가 회의실 공기 속에 내려앉는 순간, 준호는 이상하게도 바로 분노하지 못했다.
화가 난다기보다, 무언가가 갑자기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의 윤곽이 흐려지고, 유리벽 너머 복도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그림자만 또렷해졌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충격 앞에서 종종 귀보다 시각으로 먼저 도피한다. 눈은 어딘가를 바라보지만, 실은 보지 않는다. 보기 시작하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겨우 나온 목소리는 그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본부장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성과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부분입니다. 준호 과장님도 요즘 상황은 잘 아시잖아요.”
요즘 상황.
그 말은 너무 커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었고, 그래서 하필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순간엔 오히려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세상이 어렵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 어려움이 왜 내 식탁 쪽으로만 기울어지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바람이 센 건 맞지만, 왜 유독 내 창문만 먼저 깨지는가. 그런 질문은 회사 언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인사팀장이 덧붙였다.
“오늘 급여는 정상 지급될 예정입니다. 위로금 부분도 규정에 따라 최대한 반영하고요. 협의가 원만하게 되면 경력증명서나 재취업 관련 추천도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급여는 정상 지급됩니다.
준호는 그 문장을 한 번 더 속으로 따라 읽었다.
급여는 들어오고, 자리는 사라진다. 한 달 동안 자신이 버틴 시간의 값과,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다는 통보가 같은 날 도착한다. 마치 누군가 장례식장 문 앞에서 도시락 값을 쥐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고픔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돈이 무엇을 위로할 수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
그는 물병을 열지 않았다.
뚜껑을 비트는 사소한 소리 하나에도 이 장면이 너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생각할 시간은 얼마나 주십니까.”
“가능하면 오늘 중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좋겠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요구는 언제나 희망형 어미를 달고 왔다. 명령이라 쓰지 않고 요청이라 부르는 방식으로. 압박이라 쓰지 않고 협의라 부르는 방식으로. 언어는 종종 폭력을 닦아 반짝이게 만드는 천이었다.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 복도 끝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바닥은 어제와 똑같이 윤이 났고, 복사기는 제 할 일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웃으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인생에서는 방금 뚜껑이 열렸는데, 회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계속 흘러갔다. 사람 하나가 제자리에서 밀려나는 일이 이토록 매끄럽게 배경에 흡수될 수 있다는 것이. 거대한 건물은 언제나 개인의 파국을 소음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준호는 화장실 칸에 들어가 한참 서 있었다.
앉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변기 위에 놓인 흰 뚜껑만 내려다보았다. 칸막이 아래로 사람들의 구두가 드나들었다. 검은 구두, 갈색 구두, 운동화. 발들은 제각각 다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준호에겐 모두 한 줄의 컨베이어 위를 지나가는 물건처럼 보였다. 이 복도 끝에서 누군가는 오늘 잘리고, 누군가는 오늘 회식 장소를 정하고, 누군가는 오늘 아이 어린이집 상담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발끝만 보이는 세계에서는 아무도 구별되지 않았다. 사람의 사정은 늘 바지 자락 위에 있었고, 아래로는 다만 걷는 방식만 남았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급여가 입금되었습니다.
화면 위의 문장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숫자는 정확했고, 안내 문구는 친절했고, 어느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 은행 시스템은 그의 사정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 점이 서글펐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 중 가장 잔인한 것들은 대개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이 없어도 문제없이 작동한다는 사실로 자신을 완성한다.
준호는 통장 잔액을 한참 바라보았다.
한 달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그 한 달은 이미 끝난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 도시락을 싸며 서둘렀던 새벽, 야근 후 귀가하던 퇴근길, 부장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던 오전, 주말에까지 노트북을 열었던 저녁들이 숫자로 환산되어 입금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돈은 그 시간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돈은 들어왔지만, 견딘 날들의 표정까지는 데려오지 못했다.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그는 손을 멈췄다.
여보, 나 오늘…
문장의 뒤가 이어지지 않았다.
인생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망가지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어렵고 힘들고 막막하다는 말을 하며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은 그 말들 바깥에서 일어났다. 말로 옮기는 순간 실재가 될 것 같아서, 차라리 입 안에서 오래 굴리게 되는 종류의 일.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정우가 준호를 보았다.
눈빛에 잠깐 망설임 같은 것이 스쳤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준호는 잠시 그 얼굴을 보았다.
정우는 선한 사람에 가까웠다. 그러나 선하다는 것과 남의 절망 앞에 끝까지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능력이었다. 특히 직장이라는 좁고 긴 통로 안에서는 더 그랬다. 여기서 사람들은 누군가의 추락을 보는 순간, 곧장 자기 발밑을 먼저 확인하게 된다. 냉정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저 빈자리의 모양이 언젠가 자기 어깨에 맞춰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실감 나게 알아서.
“그냥 좀… 그래.”
정우는 더 묻지 못했다.
물으려는 사람의 입술과 멈추는 사람의 눈동자 사이에는 늘 돈 냄새가 아주 엷게 끼어 있었다. 대출 상환일, 아이 병원비, 카드 결제일, 다음 달 생활비. 남의 슬픔 앞에서조차 자기 통장 잔고가 먼저 떠오르는 삶. 그것은 도덕의 실패라기보다 구조의 성공에 가까웠다. 시스템은 사람을 서로 무심하게 만드는 쪽으로 언제나 효율적이었다.
점심시간이 와도 준호는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사무실이 잠시 비자, 공기 중에는 식지 않은 컴퓨터 열과 복사기에서 나온 종이 냄새가 남았다. 그는 책상 서랍을 천천히 열었다. 진통제 몇 알, 충전 케이블, 오래된 명함, 딸이 초등학교 때 그려준 작은 그림, 어느 세미나에서 받아온 볼펜, 다 먹지 못한 비타민. 십수 년의 회사 생활이 결국 이렇게 한 서랍 안에서 조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사람의 시간은 살아낼 때는 그렇게 무거운데, 물건으로 꺼내놓고 보면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마치 오랜 계절이 지나간 뒤 방 안 어딘가에서 발견되는 마른 잎처럼.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정우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과장님, 혹시 잠깐 커피 한잔 하실래요?
준호는 한참 화면을 보았다.
그 짧은 문장 안에 어색한 선의와 미안함과 망설임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도와주고 싶지만 어디까지 들어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손끝 같은 문장. 준호는 잠시 고맙다고 느꼈고, 동시에 피곤해졌다. 위로는 종종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거나, 너무 가까워서 아픈 법이었다.
괜찮다. 일 봐라.
보내고 나자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정우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직장에서는 인간성조차 급여일과 평가 시즌에 맞춰 형태를 바꾼다. 사람들은 비겁해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무너질 여유가 없어서 외면한다.
오후 세 시 반, 준호는 결국 서류에 서명했다.
사직 합의서라는 제목 아래 자기 이름을 적는데, 이상하게도 분노보다 정교한 공허가 먼저 찾아왔다. 잉크가 종이에 스미는 속도는 느렸고, 자신의 이름은 그날 따라 낯설었다. 누군가 오래 입어 체형이 바뀐 외투를 다시 걸친 것처럼. 이 이름으로 수많은 결재 문서를 올리고, 메일을 보내고, 회의록을 작성하고, 고객사와 통화했는데, 막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 이름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
회사 쪽은 배려라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번 주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개인 물품은 추후에 정리해도 된다고. 하지만 준호는 알았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배려라기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리라는 것을. 누군가 박스에 짐을 담아 나가는 장면은 직장에 불필요한 파문을 남긴다. 회사는 파문을 싫어한다. 파문은 질문을 만들고, 질문은 결속을 느슨하게 하고, 느슨해진 결속은 효율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하나를 내보내는 일마저 최대한 소리 없이 진행한다. 마치 먼지를 털 듯.
건물을 나설 때 출입 게이트는 더 이상 그의 사원증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원증은 이미 인사팀에 반납했고, 게이트 너머는 어제까지와 다른 종류의 바깥이 되어 있었다. 소속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닐 때는 무게조차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목덜미가 맨몸이라는 사실을 안다.
밖은 봄빛이 막 올라오고 있었다.
햇살은 환했고, 도로 옆 가로수에는 연둣빛이 아주 조금 배어나고 있었다. 계절은 참 무심해서, 누군가의 생활이 오늘 무너졌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제 순서대로 몸을 불려 갔다. 세상은 언제나 개인보다 큰 리듬으로 움직였고, 그 큰 리듬 앞에서 사람의 절망은 너무 자주 사소해 보였다. 그러나 사소해 보인다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은 모르고 혼자만 정확히 아는 고통일수록 더 깊게 박혔다.
준호는 회사 근처 은행 앞 벤치에 앉았다.
갈 곳이 딱히 없었다. 집으로 가기엔 시간이 어중간했고, 돌아갈 사무실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휴대폰을 열어 월급 입금 내역을 보았다. 숫자는 멀쩡했다. 그 멀쩡함이 도리어 모욕처럼 느껴졌다. 돈은 들어왔는데 미래는 비어 있었다. 마치 잘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만 빠져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데 정작 먹을 사람의 자리가 없는 느낌.
도심의 직장인들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구겨진 셔츠, 땀에 젖은 머리카락, 목에 건 사원증, 편의점 커피, 담배 냄새, 점심시간이 끝난 뒤의 급한 걸음들. 그는 문득 그들이 모두 얇은 유리 위를 걷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각자 자기 발밑만 간신히 버티고 있으면서, 깨질 소리는 듣지 않으려 고개를 들고 걷는 사람들. 유리는 투명해서 바닥처럼 보이지만,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자기 체중이 무서워지는 물질이었다.
그날 저녁, 정우는 탕비실에서 혼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월급 입금 알림을 세 번째 확인하는 중이었다. 숫자는 같았고, 잔액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꾸만 다시 열어보게 되는 것은, 돈 때문이라기보다 안도의 형식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번 달도 일단 지나간다. 오늘까진 살아 있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대신 잔액을 반복해서 본다. 숫자는 살아 있음을 가장 사무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이니까.
그러나 오늘 정우는 자꾸 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의실에서 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오던 그 사람의 어깨. 사람이 갑자기 늙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주름이 생겨서가 아니라, 몸이 자기 무게를 갑자기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 어깨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고, 손끝이 쓸데없이 정리정돈을 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 사이에 아주 짧은 정지가 생긴다. 준호의 몸에 오늘 그런 정지가 생겼다.
정우는 위로하고 싶었다.
정말 조금은. 그러나 동시에 그 마음 곁에는 다른 마음이 너무 빨리 따라왔다. 이번 달 대출이자. 아이 분유값. 아내가 말한 치과 치료비. 다음 주 카드값. 준호에게서 눈을 떼는 순간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꼈고, 다시 휴대폰 화면을 보는 순간 또 안도했다. 그리고 바로 그 안도 때문에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직장인들의 양심은 자주 두 겹으로 산다.
한 겹은 사람을 향하고, 다른 한 겹은 통장을 향한다. 문제는 대개 후자가 먼저 떨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군가 무너질 때 옆에 서고 싶다가도, 그 무너짐이 자기 생계를 건드릴 것 같으면 본능처럼 한 발 물러선다. 비열해서가 아니라, 생존이 먼저 배우게 만든 몸짓이라서. 이 세계는 사람에게 연민을 가르치기 전에 불안을 주입했고, 불안은 거의 언제나 연민보다 반응 속도가 빨랐다.
그날 저녁 준호가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 안에서는 된장국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 안쪽에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식탁이 있을 것이었다. 너무 평범한 풍경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무서웠다. 파국은 대개 무너진 배경을 동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와 똑같은 저녁 냄새, 똑같은 슬리퍼 소리, 똑같은 식탁 위 반찬통들 사이로 조용히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사람은 더 오래 실감하지 못한다.
아내는 부엌에 있었다.
딸은 식탁에 엎드려 문제집을 풀고 있었고, 아들은 소파에 반쯤 누워 영상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고, 밥솥은 방금 취사가 끝난 듯 미세한 김 냄새를 풍겼다. 준호는 신발을 벗다 말고 잠깐 멈췄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저녁 속으로 오늘의 일을 들여놓는 것이, 검은 잉크를 맑은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왔어요?”
아내가 돌아보며 웃었다가, 이내 웃음을 조금 거두었다.
오래 함께 산 사람은 안다.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어도 안다. 가방을 내려놓는 방식, 목 뒤를 한 번 쓸어내리는 버릇, 대답의 높낮이. 어떤 날 사람은 말하기 전부터 이미 말한 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준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딸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고, 아들은 체육 시간에 발목을 삐끗했다고 했다. 아내는 맞장구를 치며 국을 더 떠주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준호의 숟가락에 가 닿았다. 밥알이 거의 줄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보았다.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배가 부른 게 아니라 마음이 먼저 막힌 사람이다.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간 뒤, 아내는 싱크대 물을 잠그고 그를 마주 보며 앉았다.
말은 천천히 꺼내야 했다. 너무 빨리 꺼내면 부서질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준호는 손을 깍지 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장이란 이상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오래 품고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슬픔조차 혼자 번역해야 할 것 같아진다. 무너졌다고 말하는 것도 책임감이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리 입을 다물어도 무너짐은 몸에서 먼저 새어나왔다. 축 처진 어깨, 들쭉날쭉한 숨, 시선을 오래 못 맞추는 눈. 감정은 늘 입보다 먼저 몸에서 발각되었다.
“나… 오늘 회사에서.”
아내는 조용히 기다렸다.
“권고사직 받았어.”
그 말이 식탁 위에 내려앉자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다른 무게를 가졌다.
냉장고 모터 소리, 멀리서 오가는 차 소리, 윗집에서 의자를 끄는 마찰음이 오히려 또렷해졌다. 사람의 삶이 크게 흔들리는 순간엔 이상하게 주변의 사소한 소음이 선명해진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들리는 탓인지도 몰랐다.
아내는 바로 놀라지 않았다.
그 대신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준호는 그 차가움을 느끼며 아, 오늘 나는 하루 종일 제대로 살아 있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응.”
“월급날인데?”
그는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입가에 금이 가는 소리 같았다.
“그러니까. 월급은 넣어주고, 나가래.”
그 한 문장을 끝으로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울음은 처음엔 울음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숨이 몇 번 걸리고, 턱이 떨리고, 목젖 근처가 자꾸만 막히는 식으로 왔다. 다 큰 남자의 울음은 대개 그렇게 뒤늦게 몸을 배운다. 젊었을 때는 화가 먼저였고, 억울함이 먼저였지만, 어느 나이를 지나면 눈물은 분노보다 앞서 패배를 닮아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더 수치스러워한다.
“미안하다.”
그가 겨우 말하자, 아내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왜 네가 미안해.”
“가장이 이런 꼴이면…”
“가장도 사람이지.”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단단했다.
나무가 부러지지 않기 위해 안쪽으로 결을 조이는 소리 같았다.
준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다.
“애들 학원비도 그렇고, 대출도 그렇고, 어머니 병원비도 있고… 나이도 있는데 어디 금방 되겠어. 나 하나 믿고 사는데 내가…”
말이 끝으로 갈수록 얇아졌다.
말은 원래 입 안에서 가장 먼저 늙는 것인지도 몰랐다. 특히 자책의 문장들은. 반복해서 되뇌다 보면 자기 살을 먼저 갉아먹어서, 나중에는 거의 뼈만 남은 소리처럼 들린다.
아내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회사 믿고 산 적 있었나.”
준호가 눈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회사 다니니까 버틸 수 있었던 건 맞지. 월급이 들어오니까 살았고. 그런데 그게 우리 인생을 보장한 적은 없잖아. 그냥 우리가 그때그때 붙잡고 버틴 거지.”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바닥의 감촉에 가까웠다.
차갑지만 거짓은 없는 것. 준호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도 더 슬퍼졌다. 직장이 인생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은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 사이에서 오래 버틴다. 인정하는 순간 너무 춥기 때문이다.
“그럼 뭘 믿고 살아야 해.”
그가 낮게 묻자, 아내는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보장은 없는데, 그래도 돌아올 자리는 있잖아.”
그녀는 주방과 식탁, 닫힌 아이들 방 문, 건조대에 널린 셔츠, 냉장고 옆에 붙은 학교 가정통신문 쪽을 아주 잠깐씩 보았다.
“이런 거. 같이 걱정하고, 같이 줄이고, 같이 버티는 거.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준호는 그제야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회사가 내어준 위로금 얘기보다,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말보다, 이 초라한 부엌의 형광등 아래서 듣는 저 문장이 훨씬 잔인하고 훨씬 따뜻했다. 잔인하다는 것은 현실을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따뜻하다는 것은 그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뒤, 준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어둠 속 식탁 윤곽을 바라보았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커튼 틈으로 들어와 바닥 위에 길고 희미한 사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낮에 받은 서류를 다시 꺼내어 훑어보았다. 종이들은 여전히 반듯했고, 회사 로고는 여전히 정중했다. 종이는 참 이상해서, 사람의 시간과 자존심과 공포를 죄다 담고도 조금도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가벼운 것들이 종종 인생을 가장 깊게 베었다.
그는 정우 생각을 했다.
자신을 보며 몇 차례 머뭇거리던 눈. 그리고 결국 휴대폰 속 월급 문자를 확인했을지도 모를 손가락. 준호는 그것이 비겁하다고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누군가 잘려 나가는 날, 남은 사람은 두 번 확인한다. 저 사람이 나가는 것이 정말 나 때문이 아닌지, 그리고 이번 달 월급은 무사히 들어왔는지. 죄책감과 안도가 한 몸에서 같이 숨 쉬는 순간. 직장인들의 가장 비참한 표정은 아마 그때 생길 것이다. 남의 추락 앞에서 자기 통장을 확인하는 순간. 인간적인 마음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유지할 형편이 없어서.
다음 날 아침, 정우는 회사에 와서 빈자리를 보았다.
준호의 책상은 이미 반쯤 정리되어 있었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고, 자잘한 서류들은 묶여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으며,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 있던 가족사진도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의 부재는 종종 사람보다 정리된 자리에서 더 또렷해진다. 어제까지 체온이 있던 자리에 오늘은 질서만 남아 있을 때, 비로소 누군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오전 회의에서 본부장은 말했다.
“준호 과장님은 개인 사정으로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업무는 당분간 분담해서 진행해주시고, 조직 안정에 협조 바랍니다.”
개인 사정.
정우는 그 말이 너무 정확하게 틀렸다고 느꼈다. 회사가 한 일을 개인의 사정이라고 부르는 순간, 시스템은 깨끗해지고 사람만 흐려졌다. 늘 그런 식이었다. 바람은 구조에서 불어왔는데, 쓰러진 나무의 책임은 나무 개인의 뿌리 상태로 정리되는 식.
정우는 회의 내내 자기 손을 쥐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월급 입금 알림, 대출 상환일, 아이 웃는 얼굴, 준호의 구부정한 어깨, 그리고 방금 회의실에서 들은 ‘개인 사정’이라는 말이 뒤엉켜 떠다녔다. 직장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곳인 동시에 사람을 가장 정교하게 고립시키는 곳이기도 했다. 한 사람씩 책상에 앉혀두고, 각자의 성과를 따로 측정하고, 불안을 개별화하고, 추락마저 개인 문제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점심시간, 그는 결국 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과장님, 어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 주세요.
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
괜찮다. 몸 잘 챙겨라.
정우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몸 잘 챙겨라. 직장인이 직장인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쓸쓸한 인사 같았다. 잘 지내라는 말보다 더 실제적이고, 힘내라는 말보다 덜 무책임했다. 회사에서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닳고, 몸이 닳으면 존엄도 함께 마모된다는 사실을 오래 버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시간은 다시 흘렀다.
사무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회복해갔다. 업무는 재배치되었고, 빈자리는 금세 다른 파일과 다른 사람들의 손길로 메워졌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회의에 들어갔고, 메일을 보냈고, 점심을 먹고, 야근을 했다. 회사는 늘 그렇듯 사람의 부재를 효율의 이름으로 흡수해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 정도의 결원쯤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그러나 정우는 월급날마다 잠깐씩 멈추게 되었다.
입금 알림이 뜰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도 누군가는 안도하고, 누군가는 잘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순간에 누군가는 살았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끝났다고 느낀다. 월급날은 모두에게 같은 날짜지만, 결코 같은 의미로 오지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연장의 날이고, 어떤 이에게는 중단의 날이었다.
며칠 뒤 새벽, 준호는 다시 지하철을 탔다.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셔츠는 아내가 다시 다려주었고, 구두는 여전히 같은 것이었다. 도시의 유리창들은 똑같이 아침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회사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그 틈에 섞여 손잡이를 잡았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목적지뿐이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는 손잡이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알았다.
창에 비친 얼굴은 조금 수척해져 있었으나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지고, 생각보다 오래 버틴다. 그 두 사실이 동시에 참이라는 것이 인생을 더 어렵게 만들지만, 또한 계속 살게도 만든다. 준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직장은 인생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월급은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다. 사원증은 존재의 증명서가 아니라 잠시 빌린 출입 권한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아침마다 다시 셔츠 단추를 잠그고 지하철에 오르는가. 아마 먹여 살려야 할 얼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무너지게도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추고,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 내리고 또 올라탔다.
준호는 그 움직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아주 얇은 유리 위를 걷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고. 밑은 보이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바닥. 누구는 오래 버티고, 누구는 금이 가고, 누구는 깨진 자리에서 다시 몸을 추슬러 다른 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서로의 금 간 자리를 보면서도, 너무 두려워 모른 척할 때가 많다. 그것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 두려움이 곧 자기 생계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 안쪽에서는 다시 국 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새. 사람을 성공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적어도 다시 앉아 숟가락을 들게 하는 냄새. 그는 문을 열었다. 아내가 돌아보며 물었다.
“왔어요?”
준호는 잠시 그 말을 들었다.
왓어요. 그 짧은 문장 안에는 묻지 않는 배려와 기다림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이 조금씩 스며 있었다. 회사는 사람을 내보낼 수 있지만, 돌아왔다고 말해주는 목소리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응. 왔어.”
그는 대답했다.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하루가 아니라 한 생이 조금 들어 있었다.
오늘도 보장된 것은 없었다. 내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알게 되었다. 직장은 사람을 품은 척하다가 가장 먼저 손을 놓을 수 있는 곳이지만, 끝끝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대개 그 밖에 남아 있는 작고 초라한 자리들이라는 것을. 식탁, 국 냄새,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다시 단추를 잠글 수 있게 만드는 몇 개의 얼굴.
어쩌면 삶은 보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각난 온기들을 이어 붙이며 겨우 계속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유리 위를 걷는 동안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작가의 말
회사에서 ‘정리’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사람의 마음은 아주 조용하게 얼어붙는다.
나 역시 그랬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몸에 익혀 살던 곳을 떠나야 했을 때, 이유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설명되지 않는 두려움이었다. 상황은 언제나 그렇게, 개인의 감정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지금도 회사에 앉아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다.
나는 혹시 유리로 된 바닥 위를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언제 금이 갈지 모르는 투명한 바닥. 그 위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루를 버틴다.
법은 하루아침의 권고사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때때로 법보다 빠르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 틈 사이 어딘가에는, 설명되지 않는 현실들이 조용히 존재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은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기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회사라는 이름 안에서 나를 완전히 정의하지 않으려 한다.
설령 그 문 밖으로 밀려나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그날의 나 역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수 있기를 믿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같은 바람을 건넨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흔들릴 때에도,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는 흔들리지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날아오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