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생존법
새벽은 늘 먼저 와 있었다.
사람들이 아직 밤이라고 믿고 있는 시간에도, 새벽은 이미 방 안의 사물들 위에 엷게 내려앉아 있었다. 창틀의 먼지, 물이 반쯤 남은 컵, 바닥에 벗어놓은 양말, 충전기에 겨우 매달린 휴대폰, 다 펴지지 못한 이불의 주름 같은 것들 위에, 설명하기 어려운 회색의 기척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세상은 아직 조용했지만 조용하다는 말은 대개 좋은 뜻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어떤 고요는 사람을 쉬게 했고, 어떤 고요는 사람을 몰아세웠다. 그가 견뎌야 하는 것은 늘 후자였다.
민재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했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 가끔은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가슴뼈 안쪽을 탁, 탁, 건드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고, 다음에는 목 안쪽이 말라붙은 감각이 올라왔다. 숨은 들어오고 있었지만 잘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늘 그렇듯이 몸이 먼저 과장했고, 정신은 그 과장을 수습하느라 하루치 에너지를 새벽부터 써버렸다.
천장을 올려다본 채 그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들이마시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내쉬고. 유튜브에서 본 호흡법이었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종이에 적어준 방식이기도 했다. 효과가 없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숫자를 세는 일은 최소한 자신이 아직 세어볼 만한 세계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패닉은 대개 거창하게 시작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오해에서 시작되곤 했다. 몸이 조금 가빠진 숨을 죽음으로 오해하고, 어지러운 머리를 붕괴로 오해하고, 떨리는 손끝을 파국의 전조로 오해하는 것. 민재는 자신이 그 오해의 습관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이제는 안다. 몸은 자주 거짓말을 하고, 마음은 그 거짓말에 너무 쉽게 속아넘어간다.
그는 한참 누운 채로 창문 쪽을 봤다. 커튼 틈으로 미세한 푸른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기분 나쁘게 맑았다. 맑은 날의 새벽은 언제나 약간 잔인했다. 살아야 할 일들을 너무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흐린 날은 핑계라도 있었지만, 맑은 날에는 핑계조차 환해졌다.
알람은 이미 세 번 울리고 꺼져 있었다. 민재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오전 5시 47분. 배달 앱 광고 알림 두 개, 카드사 알림 한 개, 친구 단톡방에 쌓인 무의미한 밈 사진 일곱 개, 읽지 않은 어머니의 메시지 하나.
“아침 꼭 챙겨 먹어라.”
그는 웃지도 못하고 입꼬리만 조금 움직였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이상하게도 자식이 망해가는 기척을 느끼면 제일 먼저 밥을 걱정했다. 물론 그것이 밥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밥은 사실 버티라는 말의 다른 이름이었다. 살아 있으라는 말의 가장 실용적인 번역이었다. 그런데 살아 있으라는 말은 듣는 날마다 무게가 달랐다. 어떤 날엔 담요 같았고, 어떤 날엔 돌덩이 같았다.
그는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놓인 약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반투명 플라스틱 통 안에 서로 다른 크기의 알약이 들어 있었다. 우울을 조금 낮추는 것, 불안을 조금 누르는 것, 잠을 조금 데려오는 것. 의사는 그 약들이 도움이라고 말했고, 민재도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다만 도움이 된다는 것과 내가 괜찮아졌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약을 털어 넣고 물 한 모금을 넘겼다. 삼키는 순간마다 늘 조금 우스웠다. 이렇게 작은 것들이 내 하루를 붙들고 있다니. 인간의 존엄이라는 게 실은 캡슐과 정제 사이에서 겨우 유지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원룸은 좁았고, 좁은 만큼 정직했다. 사는 사람의 상태를 숨겨주지 않았다. 싱크대에는 어젯밤 라면을 끓여 먹고 대충 헹군 냄비가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이력서 출력본과 수정 흔적이 가득한 자기소개서, 접힌 고지서, 반쯤 마른 펜, 구겨진 영수증이 섞여 있었다. 빨래 건조대에는 검은 후드티와 회색 티셔츠, 속옷 몇 장이 축축한 채 매달려 있었다. 공기에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오래된 커피 냄새, 환기를 미뤄둔 방 특유의 체온 같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민재는 잠시 가만히 서서 그 냄새를 맡았다. 사람이 사는 냄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간신히 사람이 살고 있는 냄새.
세수를 하는 동안 거울 속 얼굴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보게 되었다. 다크서클은 눈 밑에서 밤을 길게 끌고 내려왔고, 턱에는 면도를 하루 미룬 흔적이 까칠하게 올라와 있었다. 스물아홉의 얼굴이라기보다, 몇 년쯤 더 낡아버린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래도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며 중얼거렸다.
“썩 괜찮네. 아주 멸망 직전의 현대인처럼 보여.”
혼잣말은 오래전부터 그의 안전장치였다. 시니컬한 농담은 현실을 바꾸지 못했지만, 현실과 자기 사이에 아주 얇은 완충재 하나쯤은 깔아주었다. 세상이 나를 때리기 전에 내가 먼저 한마디를 던지는 것. 멋있어서가 아니라, 얻어맞는 소리를 조금 덜 크게 듣기 위해서였다.
아침을 먹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는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 두 개, 김치 조금, 생수, 유통기한이 하루 지난 우유,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 그는 삼각김밥을 집었다가 다시 넣고 계란을 꺼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계란을 깨뜨렸다. 흰자가 퍼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그 소리는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세계에는 아직도 이유 없이 반복되는 일들이 있었고, 계란은 깨지면 늘 그렇게 익어갔다. 변덕도 없이. 배신도 없이.
식탁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작은 테이블에 앉아 계란 하나와 김치, 식은 밥을 먹었다. 밥알은 조금 굳어 있었고, 김치는 지나치게 시었다. 그는 씹다가 잠깐 멈추었다. 우울증은 슬픔보다 귀찮음에 가까운 날이 더 많았다. 슬픈 날은 오히려 감정이 있다는 증거라도 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날은 사람이 자신의 속이 텅 빈 창고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날에도 배는 고팠다. 몸은 마음이 망가진 것과 상관없이 제 몫의 연료를 요구했다. 민재는 그게 때때로 모욕처럼 느껴졌다. 정신은 주저앉아 있는데 위장은 너무 성실했다.
오늘은 오전에 면접이 하나 있었다. 대단한 회사는 아니었다. 소규모 콘텐츠 스튜디오의 운영 보조직. 계약직, 낮은 급여, 복지랄 것도 거의 없고, 성장 가능성은 공고문에서만 반짝이는 종류의 일. 그래도 그는 그 공고를 스무 번쯤 읽었고, 지원 버튼을 누를 때 손이 떨렸다. 불안한 사람들에게 기회는 대개 희망보다 공포에 더 가까웠다. 잘될까 봐 무섭고, 안 될 게 뻔해서 무섭고, 잘되면 또 그다음을 살아야 해서 무서웠다. 민재는 가끔 자신의 인생이 절벽이 아니라 무한한 계단 같다고 생각했다. 끝도 없이 다음 칸을 요구하는 구조. 한 칸 오른다고 달라지는 건 별로 없는데, 멈추면 바로 뒤로 굴러떨어지는 구조.
그는 셔츠를 입고 검은 코트를 걸쳤다. 거울 앞에서 단추를 채우다가 손끝이 다시 미세하게 떨렸다. 면접이 있는 날마다 그랬다. 사회는 면접을 가능성의 문처럼 광고했지만, 그의 몸은 그것을 심문으로 번역했다. “당신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지 말해보세요.” 면접관들이 실제로 그렇게 묻는 건 아니었지만, 민재의 신경은 늘 모든 질문의 밑바닥에서 그 문장을 들었다.
집을 나서기 전,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켜지지 않은 스탠드, 반쯤 열린 서랍, 의자에 걸쳐진 담요, 창문에 맺힌 얇은 습기.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이 썩 든든하진 않아도, 적어도 세상이 자기를 완전히 바깥으로 밀어내진 않았다는 뜻이기는 했다. 그는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건물 복도는 차가웠다. 벽 사이에 갇힌 새벽 공기는 사람들이 다녀가기 전까지는 늘 약간 병원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윗집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래층 문틈에서는 된장국 냄새가 올라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공기가 얼굴을 바로 물었다. 초봄이었지만 아침은 아직 겨울의 남은 혀를 가지고 있었다. 길가의 나무들은 앙상했고, 보도블록 틈에는 어제 비에 젖은 먼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편의점 유리창에는 삼각김밥과 도시락 광고가 붙어 있었고, 맞은편 빨래방은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부지런해서, 늘 자신 혼자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을 만들어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걷는 동안 민재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다. 사람들 말소리와 차 지나가는 소리를 그대로 듣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떤 멜로디에 마음을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이어폰이라는 작은 벽을 귀에 걸친 채 걸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다녔다. 각자의 고립을 기술로 보조하면서.
정류장에는 이미 몇 사람이 서 있었다. 교복 입은 고등학생 둘, 커피를 들고 있는 직장인 여자, 택배기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 누구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다들 휴대폰 화면이나 도로 끝만 바라보았다. 민재는 그 무심함이 좋았다. 타인의 무관심은 때때로 가장 값싼 친절이었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도 내가 무너지는 소리에도 특별히 놀라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고, 이상하게도 그건 안도감을 줬다.
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올라탔다. 민재는 카드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찍고 창가 쪽 빈자리에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풍경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침의 도시는 늘 비슷한 표정이었다. 아직 덜 깬 건물들, 셔터를 반쯤 올린 가게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굳은 어깨, 편의점 앞 재떨이 근처에 모인 담배 연기, 학교 앞 분식집에서 막 시작된 튀김 기름 냄새, 골목에서 큰소리로 싸우는 까마귀 두 마리.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자질구레한 움직임들의 총합인지도 몰랐다. 거대한 의미보다, 아직 쓰레기차가 지나갔고 빵집이 문을 열었고 누군가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놓쳤다는 사실들로 유지되는 것.
민재는 면접 예상 질문을 머릿속으로 더듬으려 했지만, 몇 정거장을 지나자 가슴 안쪽이 묘하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아주 익숙한 조짐이었다. 숨이 갑자기 얕아지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시야 주변이 약간 하얗게 번졌다. 버스는 평범하게 달리고 있었는데 몸은 이미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아니야. 아직 아니야. 그냥 공기가 답답한 거야. 그냥 사람이 많아서 그래. 그냥 면접 때문에 긴장한 거야. 그런데 공황은 언제나 ‘그냥’으로 시작해서 결코 그냥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정류장 이름이 전광판에 뜨는 동안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버스 안의 광고판 글자가 갑자기 너무 선명해졌고, 사람들 숨소리와 가방 지퍼 닫히는 소리, 카드 단말기 삑 소리가 전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세계가 갑자기 가까워지고 커질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이 내 신경 바로 위에 올라타는 느낌. 민재는 손잡이를 잡고 일어섰다. 내리기엔 조금 이른 정류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공황은 목적지보다 탈출을 먼저 요구했다.
문이 열리자 그는 거의 비틀거리듯 내려왔다. 차가 떠난 뒤 매연 냄새가 남았고, 아침 햇빛은 생각보다 차갑게 밝았다. 정류장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벤치 두 개, 운동기구 몇 개,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들, 모래가 드러난 화단. 그는 그쪽으로 걸어가 벤치에 앉았다가 이내 다시 일어섰다. 앉아 있으면 더 갇힌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숨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내쉬고. 손은 여전히 떨렸고 목은 조여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속으로 말했다.
“그래, 또 너냐.”
공황을 적으로 대하면 더 무서워졌다. 민재는 어느 날부터 그것을 좀 비열한 방문객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예고 없이 찾아와 거실 한가운데 드러누워 사람을 진 빠지게 만드는 존재. 쫓아내려고 소리칠수록 더 신나하는 존재. 그래서 그는 시니컬하게 대했다.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 집세는 안 내면서 존재감만 크네.”
누가 들으면 우습다고 할 농담이었지만, 자기 몸 안의 폭풍을 아주 조금 객관화해주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는 공원 한 바퀴를 느리게 돌았다. 어린이용 미끄럼틀엔 아직 이슬이 남아 있었고, 모래 위에는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벤치 아래에는 어제 누군가 마시다 버린 캔커피가 굴러다녔다.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의 흔적으로 어질러져 있었고, 그 어질러짐이 이상하게도 현실감을 주었다. 그래, 아직 여기다. 너무 선명해서 끔찍할 뿐이지, 그래도 여기는 현실이다.
십 분쯤 지나자 숨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리는 아직 힘이 빠졌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면접 시간까지는 삼십오 분이 남아 있었다. 늦지 않으려면 다시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로 갈아타야 했다. 그는 휴대폰 화면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잠깐 보았다. 창백하고 눈빛이 풀려 있었다. 딱 누가 봐도 “방금 인생을 포기할 뻔했다가 취소한 사람” 같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완전히 망하진 않았어. 아직은 사회적으로 기능 가능한 정도의 폐허다.”
그 말은 기묘하게 그를 움직이게 했다. 민재는 편의점에 들어가 작은 생수 한 병과 박하사탕을 샀다. 계산대 앞 아르바이트생은 졸린 얼굴로 바코드를 찍고 영수증을 건넸다. 아무도 그의 떨림을 묻지 않았다. 아무도 “괜찮으세요?”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고마웠다. 괜찮지 않은 사람은 이미 자기 상태를 알고 있다. 때때로 필요한 것은 관심이 아니라 통과였다. 그냥 계산하고, 그냥 문이 열리고, 그냥 다시 거리로 나가는 것. 세계가 나를 지나가게 해주는 것.
면접 장소는 번화가 뒤편의 오래된 상가 건물 6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방향제 냄새와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고, 거울에는 각 층의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3층 피부관리실, 4층 세무사무소, 5층 영어학원, 6층 콘텐츠 스튜디오. 문 앞에서 코트를 한 번 여미고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한 뒤, 그는 초인종 같은 벨을 눌렀다.
안에서 밝은 목소리의 여자가 나와 그를 맞았다. 생각보다 어린 얼굴이었다. 회의실은 작았고, 테이블 위에는 회사 소개서와 종이컵, 물병이 놓여 있었다. 대표로 보이는 남자와 팀장이라는 여자가 차례로 들어왔다. 그들은 친절했다. 친절한 면접은 더 괴롭기도 했다. 차갑게 거절하는 사람들보다, 적당히 웃으며 내 가능성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나도 내가 뭔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질문은 평범했다. 이전 경력, 공백기, 지원 동기, 스트레스 관리 방법, 팀 커뮤니케이션 경험. 민재는 준비해온 문장을 말하다가 중간중간 자기 목소리가 약간 멀게 들리는 순간들을 견뎠다. 공황의 잔여물이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는 답했다. 과장하지도, 지나치게 솔직하지도 않게. 공백기에는 건강 문제와 개인 사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프로젝트 보조 경험을 정리해서 설명했고, 반복 업무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 관리 방법을 묻는 질문에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지나치게 숭고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단하게 버티겠다고 마음먹으면 오히려 무너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오늘 할 몫 정도만 하자고 생각합니다.”
면접관 둘은 잠깐 조용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 여자가 메모를 하며 웃었다. 민재는 그 웃음의 의미를 끝내 해석하지 못했다. 좋다는 건지, 애매하다는 건지, 그냥 사람 좋게 웃어준 건지. 인생의 많은 장면은 해석 불가능한 표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불분명한 얼굴들을 지나치게 오래 붙들고 괴로워한다.
면접은 삼십 분 만에 끝났다. 결과는 다음 주 중으로 연락 주겠다는 말과 함께. 언제나 그렇듯, 희망과 거절을 동시에 준비하라는 문장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이미 오전이 한참 밝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더 많아졌고, 햇빛은 유리 건물 표면을 아프게 튕겨냈다. 민재는 길가 커피숍 앞에 잠시 멈췄다. 유리창 안쪽에는 노트북을 펴고 앉은 사람들, 통화하는 사람, 웃는 사람, 아이스 음료를 젓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상한 소외보다 이상한 유머를 느꼈다. 세상은 이렇게 다들 바쁜 척 살아가는 거구나. 정확히는, 바쁘지 않으면 불안이 들킬까 봐 바쁜 척.
그는 가장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창가 자리에 앉았다. 종이컵은 뜨거웠고, 커피는 썼다. 쓴맛은 그를 조금 안정시켰다. 단맛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견딜 수 없게 다정했다. 민재는 휴대폰을 열어 메모장에 오늘 면접에서 대답하지 못한 문장들을 적었다. ‘더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공백기 질문에서 눈을 피하지 말걸.’ ‘웃을 때 너무 어색했나.’ 그렇게 적다가 결국 지웠다. 이미 끝난 장면은 대개 복기할수록 왜곡되었다. 인간의 불안은 편집 기술이 뛰어나서, 지나간 일을 자꾸 더 수치스럽고 더 실패한 방향으로 재구성했다.
창밖으로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작은 가방이 등에 들썩였고, 어떤 아이는 친구를 밀치며 웃고, 어떤 아이는 혼자 바닥만 보며 걸었다. 민재는 이유 없이 그중 한 아이의 뒤통수를 오래 보았다. 저 아이도 언젠가 자라서 아침마다 숨을 확인하는 사람이 될까. 아니면 그런 일은 겪지 않고 무사히 건너갈까. 누구의 삶에 어떤 날씨가 들이치는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또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엔 이미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커피를 다 마신 뒤 그는 근처 강변으로 걸었다. 당장 돌아가기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집은 쉼이 되는 날도 있었지만, 어떤 날엔 불안을 증폭시키는 확성기처럼 느껴졌다. 혼자 있는 방은 생각을 조용하게 해주는 대신, 생각이 내는 소리를 크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도시의 바깥 가장자리 같은 곳들을 어슬렁거렸다. 강변 산책로, 큰 도서관 로비, 쇼핑몰 푸드코트, 오래된 서점. 돈 없이 오래 머물 수 있고, 아무도 존재 이유를 묻지 않는 장소들.
강은 회색빛이었다. 햇빛이 닿는 부분은 유리처럼 번들거렸고, 그늘진 부분은 납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와 코트 깃을 흔들었다. 산책로에는 러닝하는 사람들, 강아지를 끌고 나온 노인, 유모차를 미는 부부, 벤치에서 김밥을 먹는 택시기사 둘이 보였다. 세계는 언제나 나보다 조금 앞서서 돌아가고 있었다. 민재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걸었다.
우울은 때때로 검은 구름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곤 했지만, 그의 경우에는 오히려 너무 맑은 날 찾아왔다. 세상이 또렷할수록 자기 안의 빈 곳도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강물 위로 반짝이는 빛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살고 싶다는 마음과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다르다. 자신은 오랫동안 그 사이 어디쯤에 걸터앉아 있었다. 적극적으로 내일을 원하지는 않지만, 오늘을 끝장낼 용기나 확신도 없는 상태. 그 상태는 비겁함이 아니라 피로에 가까웠다. 그리고 피로는 생각보다 오래 사람을 살게 했다. 완전히 끝낼 힘도 없어서, 다음 날까지 질질 끌려가는 생. 민재는 그 점에서 자기 자신을 조금 비웃었다.
“죽을 만큼 힘들다더니, 또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강변까지 산책을 하네. 참 성실한 파멸이다.”
그 말 뒤에, 아주 옅은 웃음이 따라왔다. 자기비하와 자기연민 사이에는 종이 한 장 차이가 있었고, 그는 늘 그 위를 위태롭게 걸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니컬함은 이상하게도 조금 덜 자학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쓰러진 사람 옆에 쭈그리고 앉아, “꼴이 말이 아니네. 그래도 아직 안 죽었지?” 하고 말해주는 오래된 친구의 어투에 가까웠다. 날카롭지만 버리지 않는 말. 매몰차지만 등을 보이지 않는 말.
점심 무렵, 그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서 강변 벤치에서 먹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기다리는 삼 분 동안 바람이 컵 표면의 열을 조금씩 식혔다. 라면 국물은 짰고, 면발은 과하게 부드러웠다. 그래도 먹을 만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견디면서도 맛에는 의외로 쉽게 위로받았다. 그는 국물을 마시다가 옆 벤치에 앉은 노부부를 힐끔 봤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귤을 나눠 먹고 있었다. 남자가 귤 껍질을 까서 건네자 여자가 말없이 받아먹었다. 그 침묵은 오래 함께 산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로 만들어진 침묵. 민재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목 안쪽이 잠깐 시렸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와 나란히 늙어가는 꿈 같은 걸 포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조차 버거운 날에도.
식사를 마치고 그는 근처 도서관에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와 책 냄새가 동시에 밀려왔다. 도서관은 이상한 장소였다. 모두가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이 외롭기보다 합의처럼 느껴졌다. 여기서는 누구도 쓸데없이 강하지 않은 척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앉아 있으면 됐다. 민재는 창가 자리 하나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구인 사이트에 접속해 새로운 공고들을 훑었다. 비슷한 자격요건, 비슷한 저임금, 비슷한 자기소개 문항. 성실함, 소통 능력, 문제 해결력, 책임감. 세상은 늘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좀 더 매끈하게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우울과 공황을 겪는 사람의 하루에는 설명할 수 없는 구간이 너무 많았다. 아침 여섯 시 십오 분에 갑자기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이유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나. 버스 두 정거장 사이에서 삶 전체가 위협처럼 느껴졌던 순간을 어떤 스펙의 항목으로 옮기나.
그는 한 공고에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더뎠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자기소개 첫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늘 “저는 어떤 사람입니다”라는 문장 앞에서 막혔다는 것을. 정말로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상황에 따라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울한 날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괜찮은 날의 나는 면접장까지 가서 대답도 하는 사람이다. 공황이 오는 날의 나는 버스에서 도망치는 사람이고, 지나고 나면 다시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는 사람이다. 무너지는 사람과 버티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사회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자본주의는 일관된 기능을 사랑하지, 불규칙한 생존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오후 세 시쯤, 도서관 창문에 비치던 햇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민재는 노트북을 덮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상하게 아주 피곤했다. 많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계속 무너지지 않는 쪽을 선택해왔기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일은 근사한 의지보다 사소한 선택의 누적일 때가 많았다. 오늘 집을 나간 것, 버스에서 내린 뒤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 편의점에서 생수를 산 것, 면접을 포기하지 않은 것, 점심을 먹은 것, 지원서를 한 개 더 저장한 것. 이런 일들은 남이 보기엔 너무 하찮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민재에겐 그것들이 작은 전쟁들이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단하진 않아도, 개같이 성실하네.”
그 말에 스스로 피식 웃었다. 웃음은 크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그는 그 웃음을 붙잡고 싶었다. 세상에는 거창한 희망 대신, 아주 미세한 자기 편들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거울 앞에서 오늘도 쓰레기라고 말하는 대신, 오늘도 어쨌든 나갔다 왔다고 말해주는 일. 하찮더라도 해냈다고 인정해주는 일. 민재는 그것이 낭만적이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 말고는 진짜로 버틸 방법이 없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도서관을 나왔을 때는 해가 기울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도시의 색이 낮의 직설을 조금 걷어내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는 주황빛이 얇게 묻었고, 창문들은 각자 다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길가의 분식집에서는 떡볶이 냄새가 올라왔고, 붕어빵 기계 앞에 사람들이 몇 명 서 있었다. 민재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 원짜리 두 장을 내고 붕어빵 세 개를 샀다. 종이봉투가 손바닥을 데웠다. 뜨거운 팥이 혀를 살짝 데였고,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기분을 현실로 붙들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거창한 깨달음보다 혀끝의 뜨거움에서 더 분명해질 때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은 퇴근 전의 애매한 시간답게 비지도, 차지도 않았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졸고 있거나 화면을 보고 있었다. 민재는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아침보다 약간 덜 창백했고, 눈빛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아주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면접 결과는 모른다. 공황은 또 왔다. 불안은 여전히 목덜미 어딘가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하루 전체가 실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데군데 금이 간 그릇이 끝내 물을 조금은 담아낸 날 같았다.
집 근처 역에서 내리자 저녁 냄새가 났다. 저녁 냄새라는 것은 대개 여러 집의 국과 볶음, 세제와 난방, 바깥 공기의 차가움이 섞여 만들어지는 생활의 냄새였다. 골목 입구의 치킨집에서는 기름 끓는 소리가 났고,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는 중년 남자 둘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의 집 창문 너머로 예능 프로그램 웃음소리가 새어나왔고, 윗동네 교회에서는 수요예배 찬송가 같은 것이 바람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도시는 저녁이 되면 각자의 피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식혔다.
민재는 편의점에 들러 할인 스티커가 붙은 도시락 하나와 캔맥주 한 개를 샀다. 맥주를 집어 들다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장바구니에 넣었다. 술이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떤 날은 목 안을 지나가는 차가운 쓴맛이 하루를 정리하는 부실한 의식처럼 필요했다. 그는 계산을 마치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아침에 두고 나간 공기가 그대로 있었다. 다만 바깥의 차가움이 조금 묻어 들어와 방이 아침보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고, 양말을 벗어 구석에 던졌다. 잠깐 방 안을 멍하니 서성이다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깥 공기가 얇게 들어왔다. 먼 데서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차가운 저녁 냄새. 그는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데우고, 작은 상 위에 올려놓았다. 김이 피어오르는 흰밥과 제육볶음, 무생채, 콩나물. 싸구려 도시락이었지만 뜨거웠고,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었다.
밥을 먹으며 그는 텔레비전 대신 휴대폰으로 예전에 저장해둔 짧은 코미디 영상을 틀었다. 억지로라도 웃기 위해서였다. 우울한 사람들은 종종 웃지 못한다고 오해받지만, 실제로는 너무 자주 웃어서 더 이상해 보일 때도 많다. 웃음이 기쁨의 증거가 아니라 방어의 형태일 때도 있으니까. 민재는 영상 속 사람들의 과장된 표정과 엉뚱한 대사를 보며 몇 번 소리 없이 웃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몸은 이미 하루를 다 쓴 사람처럼 무거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그는 방바닥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댔다. 불은 형광등 대신 스탠드만 켜두었다. 노란 불빛이 방 한쪽만 조용히 적셨다. 이런 시간에 찾아오는 침묵은 새벽의 침묵과 조금 달랐다. 새벽의 고요가 시작도 전에 사람을 겁먹게 하는 종류라면, 밤의 고요는 일단 하루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종류였다. 물론 끝났다고 해서 마음이 다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밤은 종종 낮 동안 미뤄둔 생각들을 다시 데려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지, 정말 나아질 수는 있는지, 사랑 같은 건 내게 다시 올 수 있는지, 일은 구할 수 있는지, 돈은 얼마나 더 버틸지. 질문들은 늦은 시간일수록 더 집요해졌다.
그는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작은 수첩을 꺼내 오늘을 적기 시작했다.
‘아침에 또 공황. 버스에서 내림. 그래도 면접 감. 도서관 감. 지원서 하나 더 씀. 붕어빵 먹음. 아직 안 끝남.’
너무 단순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삶이 무너질 것 같은 날에는 단순한 문장이 더 진실할 때가 있었다. 거창한 감상은 쉽게 거짓말이 되었고, 사실은 늘 짧았다. 공황. 그래도 감. 먹음. 씀. 안 끝남.
그는 펜을 내려놓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약간 흔들었다. 밤은 천천히 깊어졌고, 건너편 건물의 창문들은 하나씩 불이 꺼졌다. 누군가는 벌써 잠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야근 중일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 일도 없는 표정으로 내일 도시락 반찬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동시에 너무 많은 삶을 품고 있어서, 자기 고통만이 유일하다는 착각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물론 남들도 힘들다고 해서 내 아픔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이 고통이 기이한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사람을 아주 조금 덜 부끄럽게 했다.
민재는 이불을 펴고 누웠다. 몸을 눕히자마자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던 피로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천장을 보는 버릇은 여전했다. 하루 종일 수많은 표정과 소리와 빛을 통과한 뒤에도, 결국 밤에는 다시 이 익숙한 흰 면적 앞에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아침과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지만, 아침과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인간은 대개 극적인 사건 때문에 변하는 게 아니라, 하루를 하나 넘길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다른 결을 갖게 된다. 오늘의 자신은 여전히 우울했고, 여전히 불안했고, 내일 아침 또 같은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지나온 몸은 어제의 몸과 같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렸지만 면접장까지 갔던 다리, 떨렸지만 질문에 답했던 목, 숨이 막혔지만 결국 다시 숨을 세었던 폐. 몸은 생각보다 많은 기억을 저장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사람을 다시 살게 했다.
그는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심장은 이제 아침만큼 요란하지 않았다. 여전히 완벽하게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불이 붙었던 신경은 쉽게 식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완벽하게 괜찮아지는 것만이 목표일 필요는 없다고, 그는 요즘 조금씩 믿어보는 중이었다. 아주 형편없는 날에도 샤워를 하고, 버스에서 내려 공원을 걷고, 편의점에서 물을 사고, 면접장 의자에 앉고, 지원서 한 줄을 쓰고, 붕어빵을 먹고, 밤에 기록을 남기는 것. 그런 식으로 사람은 회복이라기보다 지속에 가까운 것을 배운다. 그리고 지속은 생각보다 위대한 기술이었다.
창밖에서 누군가 늦게 귀가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개가 한 번 짖었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윙 하고 돌아갔다 멈췄다. 민재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공기가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왔다. 내쉬었다. 공기는 입술 사이에서 조금 새어나가며 흐트러졌다. 그의 숨은 맑은 유리 같은 것도, 완전한 안정 같은 것도 아니었다. 중간에 자꾸 흔들리고, 끝이 조금 떨리고, 어디까지가 들숨이고 어디부터가 날숨인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부서졌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은 이상하게도 투명했다.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속임수가 없었다. 괜찮은 척 부풀려진 숨이 아니라, 정말 오늘을 다 지나온 사람의 숨. 중간중간 금이 가고, 가끔 갑자기 가빠지고, 그렇다고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는 숨. 그는 그 숨을 들으며 생각했다. 살아 있는 일은 어쩌면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이렇게 조금 모자라고 조금 흔들리는 숨을 끝내 놓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세상은 여전히 가혹하고, 내일은 또 어둡고, 아침은 아마 다시 먼저 와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의 자신이 오늘의 기록 한 줄 정도는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 안 끝남.
그 말은 희망이라기보다 사실에 가까웠다. 아직 안 끝났다는 것은 아직 더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직 더 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직 어쩌면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래는 대개 잔인할 만큼 열려 있었고, 그 개방성이 사람을 겁먹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틈으로만 바람이 드나들었다. 완전히 닫힌 인생에는 공기도 없었다.
민재는 눈을 감았다. 어둠이 천천히 시야를 채웠다.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새벽의 창틀, 프라이팬 위 계란, 정류장의 사람들, 버스에서 내리던 순간, 공원의 벤치, 편의점 생수병, 면접장의 종이컵, 강변의 빛, 붕어빵의 뜨거운 팥, 저녁 골목의 냄새, 수첩 위의 짧은 문장.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하루였다. 망가짐과 지속이 같은 문장 안에 들어 있던 하루. 패배와 생존이 구분되지 않던 하루.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 숨은 투명했다. 다만 아주 미세하게, 부서질 듯 불완전했다.
그래서 오히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밤은 조용히 방 안에 내려앉았고, 그는 그 불완전한 숨의 끝을 놓치지 않은 채, 내일 쪽으로 조금씩 미끄러져 갔다.
작가의 말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때로 익사에 가까운 일이었다.
숨은 분명 이어지고 있었지만, 물 위로 올라오는 감각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청춘의 어느 시절, 나는 그 시간을 그렇게 건너고 있었다.
버틴다는 말은 쉽게 쓰이지만,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는 고독이 늘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하루는 서로 다른 세계에 가까웠다.
나에게도 그랬다.
어제와 닮은 오늘이었지만, 그 안의 감정과 무게는 매번 달랐다.
그 시간을 견디며 걸어오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 여기까지 와 있었다.
특별히 잘나서도, 확신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무너지지 않는 쪽을 반복해서 선택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이 글의 화자 역시,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에 닿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지금의 고통은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라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지를 준비하듯,
사람 역시 견디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넓혀간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건너고 있다.
완벽하게 살아내지 못하더라도,
조금 흔들린 채로, 조금 모자란 숨으로도.
그렇게 하루를 지나온 것만으로,
어쩌면 이미 충분히 잘 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이 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잘 되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사십 년의 하루를 견디며 살아온 윤담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