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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Oct 27. 2021

5.18 광주 항쟁과 미국

노태우 사망에 즈음하여


미주한국일보

노태우가 사망 했다는 소식이다. 공교롭게도 박정희와 노태우의 제삿날이 같은 10월26일이 되었다. 1979년 10월26일 김재규는 박정희를 궁정동 안가 에서 살해했다. 이 사건은 신군부에게 정권 장악의 기회를 주었고 광주 항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만들어 냈다. 9일 후 1979년11월4일 이란의 대학생들은 이란 주재 미 대사관을 점령하고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카터 대통령 정권 말기 였다. 


당시에 미국과 박정희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닉슨과 키신저는 월남전을 끝내고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전쟁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국내의 반전시위가 극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중국이 월맹을 원조 하는 것을 중지 시키기 위해서 키신저와 닉슨은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추진 했다. 미국은 자국군대를 슬슬 월남에서 빼면서 한국군대의 증파를 요구 했다. 


우방 대만을 버리고 적국 중공을 택하는 미국의 행위는 박정희를 불안하게 했다. 장개석 총통은 그의 롤 모델이었다. 더구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을 박정희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지는 전쟁을 한국군에게 맏기고 자국군대를 안전하게 철수 하려는 미국에게 분노 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불안한 안보를 이유로 유신을 추진 했다. 그리고 자주국방을 외치고 원폭 제조에 착수 했다.

유신을 추진 하면서 독재가 강화되자 학생 시위가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시작 되었다. 강경진압을 했다. 차지철은 무차별 사격으로 다 죽여 버리자고 까지 했다. 


미국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미국이 박정희를 지지하지 않는 다는 신호를 끈질기게 보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싸고 돌며 김재규를 왕따 했다. 더구나 가까이에서 보기에 과음하며 여색에 빠져 있는 그가 국가의 수반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에게 박정희는 미국이 지지하지 않는 부패한 독재자 였다. 치밀한 계획 없이 욱 하는 기분에 박정희를 살해 했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래로 한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억누르면 억누를 수록 더 뜨거워 졌다. 박정희가 죽자 학생들과 야당 지도자들은 민주화의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하고 거리로 뛰어 나와 시위를 벌렸다. 미 대사관 사람들에게는 한국이 아주 불안한 상태로 보였다. 자칫 북한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는 정세 였다. 이란처럼 남한이 미국의 통제 안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시작 했다. 카터는 이란의 친미 정권이었던 팔레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엉겹결에 반미 민족자주의 자들에게 당했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그런 꼴이 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 했다


1979년10.26 사태, 12.12 사태, 5.18 광주항쟁을 미국이 처리하는 과정에 1979년11월4일 이란사태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출신의 신군부 세력은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반군부세력을 축출 했다. 신군부가 미군사령관의 허락 없이 군을 이동 시킨 데 대해서 항의는 했지만 곧 침묵을 지키고 사태를 관망 했다. 


1980년 봄은 서울과 전국에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로 남한 전역이 불안 한 상태였다. 북한이 움직일 것을 우려한 미국은 제7함대를 동해로 이동 시키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주한 미 대사

글라스틴은 1980년5월17일 전두환과의 미팅 스캐쥴을 잡아 놓았다. 그리고 5월7일 본국에 “만약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인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 하는 비상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다. 당시 카터 행정부의 외무차관 이었던 워렌 크리스토퍼는 “동의 한다”라고 대답했다.

이로 부터 열흘 후 글라스틴은 전두환과 예정대로 만나고 같은 날 신군부는 쿠테타를 감행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 했다. 1980년5월17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5월18일 공수부대7여단이 광주에 투입 되었다. 공수부대는 미군 허락 없이 한국군이 움직일 수 있었다. 미군 특수부대가 초록색 베레모를 쓰고 있는 것을 흉내내어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는 한국군 최고의 정예 부대였다. 이들은 광주 시민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죽였다. 시위에 가담 했던 안 했던 상관하지 않았다. 글라이스틴은 본국에 “특수부대는 총검으로 찔러서 많은 학생들을 죽였다. ... 그들은 인민군 보다 더 잔인 했다”라고 보고 했다. 


분노한 데모대는 광주 도청을 점령하고 미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 했다. 그러나 미8군 사령관은 유엔군 지휘하에 있는 한국군 20사단을 동원하여 광주를 반란군(시민)의 손으로 부터 다시 찾을 것을 명령 한 후였다. 데모대의 요청을 거절한 사실에 대하여 글라이스틴 전 미대사는 후에 “그 결정은 옳았다, 후회하지 않는 다.”라고 말 했다. 전두환은 광주를 포위하고 통행을 금지했다.  광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국에 매일 광주에서 북한 공비가 나타나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도 했다. 미 대사도 그렇게 믿었는 지는 확인 할 길이 없다. 이러한 신군부의 가짜 뉴스를 지금까지 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80년 5월22일, 미국무장관 에드몬드 머스키, 국가안보 고문 브레진스키, 중앙정보부장 터너, 국방장관 브라운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회의가 열렸다.  “단기적으로는 현 군 세력을 도와서 우선 안정을 찾도록 하고 장기적으로는 민주화를 하도록 압력을 가 한다”는 데 합의 했다. 


5월23일 글라이스틴은 한국 국무총리 대행을 만나서 강력한 진압이 필요하다고 알리고 한미 연합 사령부 소속 부대를 한국군 지휘로 이전하기로 합의 했다. 8군 사령관 위크햄 장군은 DMZ 에 배치된 20사단을 계엄 사령부에 넘겼다. 미국은 이사실을 비밀로 하기를 원했으나 전두환은 뉴스로 이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자신이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국민이 확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전두환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 했다. 이로 인해서 많은 한국사람들 가운데 반미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1980년 5월27일 20사단이 광주에 진입하여 광주 항쟁은 종료 되었다. 


1980년6월 카터 정부는 수출입 은행장 존 무어의 한국방문을 인준 했다. 한국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600 million 달러 차관을 보증 하는 것이 목적이 었다. 이것은 카터 행정부가 전두환 정권을 인정 한다는 확실한 제스처 였다. 악질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의 행위는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반미감정을 부추 겼다. 


1981년 새로 부임한 레건 대통령은 전두환을 백악관으로 초청 했다. 대통령 취임 후 외국 수반으로 서 첫 번째 손님이었다.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돼 있는 김대중을 석방하고 미국 망명을 허용하는 대가 였다. 그러나 이일로 광주 항쟁 희생자 묘지에는 레건 대통령의 허수아비 모형이 세워지기도 했다. 


잠정적인 안정을 위해서 전두환을 지지 했던 미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을 비롯 한 민주 헌법으로의 개정을 요구 하는 시민 시위가 계속 되자 시민편에 서기 시작 했다. 1980년 5월 안보회의 해서 결정한 대로 민주화 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였다. 거스틴 시규어 차관은 1987년2월 전두환에게 민간정부로 이양할 것을 요구 했다. 그리고 한국민이 원하는 민간정부로 권력을 이양하지 않으면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미국정부는 전두환 정부에게 야당과 대화 할 것을 요구 했다. 1987년6월에는 대통령 직접선거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공식적으로 요구 했다.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하자 미 국무부는 이를 거부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 했다.  6월29일에 직접선거 헌법개정이 발표 되자 미국관리들은 자기들의 연설이나 성명이 전두환정부를 설득하는 데 주요 했다고 주장 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 했던 김대중이 돌아오고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삼파전에서 노태우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전두환, 정호용과 같이 광주 시민 학살을 음모 했던 노태우가 2021년10월26일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군대는 적군과 싸우라고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 진 집단이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은 “광주를 공산 반란군이 점령” 했다는 거짓 상황을 만들어서 군대를 동원하여 같은 동포를 대량 학살하게 한 살인마 들이다. 당시의 광주 시민은 자신들이 납부한 세금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총탄에 맞아 죽고 총검에 찔려 죽 었다. 이들은 이제 겨우 20대의 젊은 군인들에게 이런 몹쓸 짓을 시킨 악마 들이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미국의 압력이 없었다면 과연 직선제 개헌을 했을 까? 만약 미국이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계엄령을 선포하게 했으면 그들이 권력을 놓았을 까? 노태우는 천당에 갈까 지옥에 갈 까? 


참고: Blowback; The Cost and Consequences of American Empire by CHalmers Johnson 2001               and 2004


          Gwabgju Archives/Gleysteen/Key Policy Docuements posted on June 17, 2020 by Roxy

          Shor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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