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과 신립의 어이 없는 패배
조선통신사가 떠나고 몇개월 지난 다음인 1591년9월, 도요토미는 전국 다이묘(성주)들에게 조선침략을 통보 했다. 그의 궁극적인 야망은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에게 나고야에 전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나고야는 규슈북단에 위치해 있어서 조선과 매우 가까웠다. 1591년10월이었다. 도요토미는 가토에게 명을 정벌하면 20개 주를 하사 할 것을 약속했다. 사기가 충천한 가토는 단 2개월 만에 나고야성을 완공했다. 이곳에 약 17만대군을 대기 시켰다.
조선 출정장수들은 일본 서남부 지역 다이묘들이었다. 도요토미 처럼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도요토미 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해서 믿을 만 했다. 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세력이다.
도쿠가와의 막부시대 200여년동안 푸대접 받다가 명치유신 세력으로 살아나서 요지음 일본우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단한 전통이다.
도요토미의 오산
대규모의 원정은 항상 보급이 문제이다. 그 옛날에는 보급을 현지 조달로 해결하려 했다. 일본내의 전쟁에서는 다이묘(번주=영주)만 굴복 시키면 번(영내)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 했다. 그들은 조선에서도 성을 점령하면 성내의 백성들이 따라 올 것으로 기대 했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의병을 일으켜 저항 했다. 그리고 일본의 수군이 남해-서해-한강을 거쳐 한양에 도착하여 육로로 올라온 지상군과 합류하여 병력 손실을 메꾸고 군량미등 부족한 보급을 할 계획 이었다. 그들은 강력한 조선 수군과 이순신이 바다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침공 시작
1592년 음력 4월13일(5.23)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700척의 배에 18,700명의 병사를 실코 부산진으로 들어왔다. 고니시의 1군은 부산진에 상륙, 동래를 함락 했다. 곧바로 조령으로 북진 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가토 기요마사는 2군을 끌고 죽령으로 향했다. 4군과 같이 김해에 상륙한 3군 구로다 나가마사는 추풍령으로 진격했다.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비켜 가고 있었다.
한양에서는 침공소식 4일동안 모르고 있었다.
부산포, 동래, 김해가 별 저항 없이 일본군 손에 넘어가고 일본군이 북상하고 있는 동안 선조와 조정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봉화가 작동하지 않았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장계를 가지고 말을 달려 한양에 도착 했다. 4월13일에 출발해서 17일에야 조정에 장계를 전달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대신들은 선조를 알현하여 대책을 논의 해야 했다. 왠일인지 선조는 대신들을 직접 만날 것을 거부 했다. 할 수 없이 서면으로 대책을 임금에게 알리고 그대로 시행했다. 일본군은 거의 구보하는 속도로 한양을 향해 북상 했다. 조선군의 저항은 지극히 미미 했다.
순변사 이일 충주-조령-상주-대구로 출정
조선 제2의 명장이라고 소문 난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했다. 이일은 일본제1군 고니시와 싸우기 위해서 충주-조령-상주를 거처 대구에서 일본군과 대적할 예정이었다. 대구에서는 각지방에서 모여든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일은 왕이 임명한 이들의 지휘관이었다.
순변사는 왕이 때때로 임명하여 변방의 방비 상태를 점검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관직이었다. 이일 휘하에 군사가 없었다. 모병을 해야했다. 소식을 듣고 약 300명이 모였다. 군 훈련이라고는 받아 본적이 없는 일반 백성들이었다. 유생과 아전들은 갓 쓰고 손에는 종이를 말아서 들고 나왔다. 겨우 60명 뽑았다. 이일은 이들을 인솔하여 먼저 남쪽으로 내려 갔다. 별장 유옥이 군사가 모집되는 대로 내려오기로 했다. 대구에서는 병사들이 기다리고 일본군은 대구를 향해서 처들어 오고 있었다. 벌써 3일을 허비했다.
제승방략과 대구
각고을에서 병사들이 대구로 모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일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적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문이 병사들에게 퍼져 갔다. 군 훈련이라고는 받아 본적이 없는 농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식량은 점차 떨어져 갔다. 거기다 비까지 내렸다. 지휘관이 없는 이들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 씩 둘 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 했다. 결국 성이 텅 비었다. 일본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구를 점령 했다. 제승방략은 전면전에 무용한 제도 였다.
이일 상주에서 패주
상주 목사였던 김해는 이일을 마중나간다고 하고 성밖으로 빠져나가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성안에 있던 병사들도 모두 도망가 버렸다. 그래도 판관 권길이 남아 있다가 이일을 맞이 했다. 이일은 권길을 기특하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군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방치했다고 목을 벨려고 했다. 권길은 병사들을 모집해 오겠다고 애걸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가 모집해온 사람들은 순박한 농사꾼들 이었다.
한 마을 사람이 이일에게 적군이 이미 근처에 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실제로 적군은 근처 선산에 와 있었다. 이일은 병사들을 불안하게 한다고 목을 벨려고 했다. 마을 사람은 “옥에 가두었다가 내일 아침까지 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죽이십시오” 라고 해서 우선 위기는 모면 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이일은 적이 접근하는 것을 몰랐다. 그 촌부의 목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본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일에게는 한양에서 데리고 온 병력과 현지 조달한 병사들을 모두 합쳐서 약 8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을 비우고 전 병력을 성밖 들판으로 끌고 나가서 진치는 훈련을 시행했다.
장군기를 높이 세우고 자신은 말위에 올라 탔다. 그의 뒤에는 읍 관리 4명이 말에서 내려서 서 있었다. 정렬해 있던 병사들은 일본 척후병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일에게 알리지 않았다. 알리면 목을 베어 죽일 것이 아닌가?
이일이 마상에서 성쪽을 보니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군관에게 무슨일이 있는 지 알아 보라고 지시 했다. 군관 자신은 말에 타고 역졸 두명이 고삐를 잡고 천천히 걸어 가기 시작 했다.
군관이 갑자기 조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 졌다. 일본병사가 달려와서 그의 목을 쳤다. 일본군이 벌떼처럼 달려 들었다. 조선 병사들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도망 쳤다. 이일은 옷을 입으면 표적이 뒬 까봐 발가 벗은 체로 신립이 진을 치고 있는 충주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신립장군과 탄금대 전투(4.28)
신립은 조선 제일의 명장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기마병을 철기군이라고 했다. 철기군은 만주 벌판에서 여진족을 섬멸했다. 기마병은 평지에서 싸워야 유리하다. 험한 산속으로 들어가면 싸울 재간이 없다. 숫적으로 열세이고 조총 대신 활로 싸워야 하는 조선군은 좁은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급습하는 것이 유리한 작전이었다. 부장 김여울을 비롯한 많은 장수 들이 죽령(문경 새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를 원했으나 신립은 이를 거절하고 달천평야에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한판승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학자들은 훈련되지 않아서 겁에 질린 병사들을 싸우게 하려고 배수진을 쳤을 것이라고 추측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달천평야는 논이 많았고 비가 많이 와서 말이 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총부대와 기마병의 대결이었다. 100여년의 전쟁으로 단련된 병사들과 농민군의 싸움이었다.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 것은 불가항력 이었다.
신립과 김여울은 탄금대 뒤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일과 신립의 패배 소식을 들은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크게 당황하여 도망갈 준비를 하기 시작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