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양 개성 평양 함락
선조 한양을 떠나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주했다는 소식이 궁내에 전해지자 왕과 대신들은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조선 제일의 장수 신립이 일본군을 막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신립 마저도 어처구니 없이 패전하자 궁내 뿐만아니라 한양 전체가 술렁였다. 백성들은 은과 집신을 사들였다. 도둑질이 성행 했다. 조정대신들은 사수파와 파천파로 나뉘어져서 갑론을박 했다. 겁 많은 선조는 슬슬 도망갈 준비를 했다. 영의정 이산해는 파천을 강력히 주장했다.
선조는 난리 통에 죽거나 잡히거나 명나라로 망명할 경우를 염려 했던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도원수로 김명원을 임명했다. 그리고 한양을 사수 할 것이니 사재기 하지 말라고 백성들을 타 일렀다.
한양을 둘러 싸고 있는 성곽에는 성첩이 약 3만개 설치 되어 있었다. 성첩은 요지음의 보초소이다. 원칙은 적어도 한명이 각 성첩에 24시간 보초를 서야 했다. 그러나 겨우 7천 명이 보초를 섰다. 2만3000 개의 초소가 비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근무 중에 자거나 딴짓하기 일 수 였다. 그 중에 일부는 아전에게 뇌물을 주고 아예 근무지를 이탈 하기도 했다. 한양을 방어할 방책은 전혀 없었다.
1592년4월30일 선조는 신하, 궁녀, 노비등 약 100명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향 했다. 일본군이 침공한지 17일 만이었다. 일행이 돈의문(서대문) 밖으로 나서니 남대문 안쪽에 불길이 훤하게 보였다. 아직 일본군이 한양에 당도 했을 리는 없는 노릇이 었다. 왕과 대신들은 분명히 무지한 백성들의 소행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연기는 장혜원 쪽에서 나고 있었다. 노비문서가 저장 되어 있는 건물이었다. 조선 인구 40%가 노비였다. 흔적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악명 높은 임해군과 병조판서의 집에도 불을 질렀다. 외적이 처들어 오기 전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평소에 억압했던 백성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벽제를 지나니 비가 온다. 임금의 피난행렬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널문리가 판문점
선조 일행이 임진강변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어져서 지척을 분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침 강가에 나룻배를 관리하는 화석정이 지어져 있었다. 일행은 이 건물에 불을 질러서 밤을 밝혔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조금 가서 동아리라는 마을에 도착 하니 임진강 지류인 사천강이 길을 막았다. 마침 주민들이 문짝을 들고 와서 배 다리를 만들어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이곳을 널문리라고 불렀다. 360여년후에 중공군과 미군은 이곳에서 휴전회담을 하게 되었다. 널문리 주막집 옆 콩밭에 회담장을 짓고 판문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우리말 널문을 한문으로 판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선조 개성 도착; 일본군의 반이 조선노비?
저녁 8시경에 선조 일행은 동파역에 도착 했다. 일행은 먹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해서 지쳐있었고 무척 배가 고팠다. 부엌에서는 저녁준비가 한창이었다. 갑자기 아전과 병사들이 부엌으로 들어와서 음식을 먹어 치웠다. 책임자는 처벌이 두려워서 도망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려고 했으나 아전과 군사가 도망가 버려서 임금을 호위할 병사가 없었다. 다행히 서흥 부사 남익이 군사 수백명과 말 50필을 가져와서 출발할 수 있었다.
피난 하는 동안 대신들은 임금과 조정이 이꼴이 된 것은 영의정 이산해 잘 못이라고 선조에게 귀가 아프게 아뢰었다. 5월2일 개성에 도착 하자 이산해를 파면하고 유성룡을 영의정에 임명 했다. 신하들은 또 유성룡을 가지고 입방아를 찌었다. 그 날 저녁에 선조는 유성룡을 파면 했다. 유성룡은 아무 보직 없이 의주 까지 임금을 동행 했다.
1592년 5월2일 선조 실록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개성에 도착한 선조는 좌의정 윤두수에게 “일본 병사의 절반이 조선 노비 라고 하는데 사실인가?” 라고 물었다. 윤두수는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조선사람이 일본군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유성룡은 면천법을 제정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 했다. 일본군 목 하나를 베면 양민으로 해주고 둘을 베면 국왕호위무사가 되며, 셋을 베면 벼슬을 주고 넷을 베면 수문장을 시켜준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이 공표되자 많은 노비들이 의병에 지원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이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노비는 양반의 가장 중요한 재산 이었다. 면천법을 발원한 유성룡은 그 법을 빌미로 전쟁 후에 파면되었다.
한양 함락, 일본군 무혈 입성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강건너에 일본군이 나타나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았다. 한양 도성 수비를 믿고 있던 이양원은 일본군이 들어 오기도 전에 도주 했다.
텅빈 성에 고니시 유키나와는 흥인문(동대문)으로 가토 기요마사는 숭례문(남대문)으로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에 두 대문을 허물지 않은 이유이다.
부원수 신각의 최후
신각은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한양 수비대장 이양원을 따라서 양주로 갔다. 그는 함경도 군사와 합세하여 민가를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척렬했다. 임진왜란 발발이후 조선군이 처음으로 전투에서 이긴 것이었다.
한편 김명원은 신각이 명령을 어겼다고 장계를 올렸다. 장계를 받은 조정은 그를 참수했다. 나중에 전공 소식을 듣고 파발을 달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평양성 함락, 선조 의주 도착
6월1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개성을 함락 했다. 선조는 5월6일에 평양에 도착 했다. 6월11일에 평양을 출발하여 6월22일에 압록강가에 있는 의주에 도착했다. 강만 건너면 조선땅이 아니다. 고니시는 6월8일에 대동강가에 도착하여 강건너 김명원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대치했다. 일본군은 강을 건널 묘책이 없어서 고심하고 있었다. 강건너 일본군을 관찰하고 있던 김명원은 일본군이 해이해저 있다고 판단 했다. 6월14일 밤에 기습 공격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보다 도강이 늦어 졌다. 해 뜨기 전에 공격을 마치고 돌아 오려고 했다. 강 가운데 있는 섬 능라도를 건너가니 벌써 동이 트기 시작했다.
초반 기습공격에는 성공 하는 듯 했으나 일본군 증원군이 도착하자 패퇴하기 시작 했다. 배를 탈 틈이 없었다. 수심이 얕은 왕성탄을 도보로 건너 황급히 퇴각했다. 일본군은 왕성탄이 수심이 얕은 지역임을 간파 했다. 조선군이 대동강을 걸어서 건너려면 왕성탄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준 셈이었다.
조선군은 평양성을 비워주고 총퇴각 했다. 식량 10만석은 고스란히 고니시의 손에 들어 갔다. 그러나 다행이 고니시는 의주가 지척인 데도 선조를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평양성에 주저 앉았다. 왜 그랬을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