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보급로 차단, 전라도 점령 실패
이순신을 성웅이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말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으로 느끼고 있을 까 의심해 본다. 이순신은 한민족이 낳은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인품, 지도력, 무인으로서의 전투력, 지휘관으로서의 전술력 모든 면에서 그 보다 더 낳은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 다. 구태여 영국 해군 제독 넬슨과 비유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무능한 왕과 아첨하는 신하, 그들의 모함, 형편없는 지상군을 극복하고 일본의 침략을 한몸으로 막나 낸 인물이다. 그는 신이 창조한 최고의 인간중의 한명이었다.
전투 불능에 가까운 조선 육군의 패전으로 일본군은 1592년6월14일, 침공한지 두달만에 평양성을 함락 했다. 곧바로 의주로 가고 있는 선조를 추격했다면 조선왕과 대신들을 전멸 시키거나, 모두 포로로 잡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평양성에 들어온 고니시는 추격을 멈추었다. 교체 병력, 식량등 보급이 문제였다.
일본 수군은 남해에서 호남에 상륙하여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서해를 돌아서 인천과 한강을 거쳐 한양에서 북상하는 육군을 만날 계획이었다. 수군의 중요한 임무는 육군이 필요한 식량등 보급과 그동안 손실 된 병력 보충이었다. 도요토미는 허약한 조선이 이순신이 지휘하는 강력한 수군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하고 일본수군의 서해 진입을 차단 했다.
이순신은 5.7 옥포해전에서의 첫 승리를 필두로 5.29 사천, 6.2 미륵도와 당포, 6.5 고성 당항포 에서 연전연승 했다.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첫 출정 했다. 일본 수군은 호남 땅에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조선왕자 조선인 아전이 잡아 가토에게 넘기다.
선조는 의주로 도망가면서 명나라 망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자 광해군을 국내에 남겨 기회를 보려고 했다. 자신은 명나라에서 안전하게 있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들어 오면 그뿐이었다. 우선 세자가 험지에서 죽던 살던 상관할 바 아니었다. 광해군은 전쟁 터를 돌아 다니며 국민이 단결할 것을 촉구하고 의병모집에 매진 했다.
한편 다른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쪽으로 피난 했다. 그들은 선조가 명으로 망명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함경도 회령에 이르자 압록강을 건느려고 했다. 그 지방의 아전이었던 국경일은 두 왕자를 나포 했다.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명으로 가려는 왕자들을 곱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임해군이 악명 높은 왕자이기도 했다. 그는 동부 전선의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두 왕자를 넘겼다.
명나라 조선을 의심
명나라 조정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고 일본과 조선이 합세하여 명을 칠려고 한다고 의심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수차 사신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 했으나 이러한 의구심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결국 명은 임세록이라는 사신을 조선에 보내어 정세를 확인 하려고 했다. 아무 보직도 없었던 유성룡은 명나라 사신 접대 업무를 맡게 되었다. 유성룡은 그에게 대동강가에 진치고 있는 일본군 진지를 보여주는 등 전황 설명을 잘 해주었다. 임세록이 명에 돌아 간 후로는 명이 조선을 의심하지 않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 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에게 함락 되면 명이 위험하다고 판단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이 미국에게 점령 당하면 중국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중공군이 개입했던 것과 똑 같은 역사의 반복이었다.
명은 요동에 주둔하고 있는 조승훈에게 평양성 공격을 명했다. 조승훈은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무조건 돌격 했다. 평양성 안에 일본군이 얼마나 있는지, 평양성이 어떻게 생겼는 지 전혀 사전 정보 없이 그저 해적 떼 왜구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혼 쭐이 나서 요동으로 돌아 갔다.
한산대첩
1592년7월8일, 선조는 의주에 있고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한지 한달이 체 안되었던 때였다. 조선 수군은 거제도 건내량에서 일본배 74척을 발견 했다. 조선 수군은 배 6척을 한산도 앞바다에 내보내어 일본배를 유인 했다. 조선수군은 학익진을 펴고 일본수군을 대파 했다. 이순신, 이억기 그리고 원균이 모두 같이 싸웠다. 이를 한산대첩이라 하고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 이다.
그 후 이순신은 7.10 안골포, 8.29 장림포와 부산, 9.1 부산 등 6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 했다. 일본 수군의 전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 했다. 일본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별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바다에서 멀어져만 가는 지상군에 대한 보급을 할 재간이 없었다. 고니시는 평양에 주저 앉자 고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바다에서 전라도로 진입할 수 없게 되자 진주성을 공략 하여 육로로 호남으로 들어 갈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