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의병장들의 반란을 우려 했다.
제1차 진주성전투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진주 판관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신했다. 이경이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주선으로 김시민이 목사 대리를 맏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보고 했던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과 관군을 연결해 주는 일을 하는 초유사라는 직책을 맏아 영남지방에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성으로 돌아온 김시민은 거창군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 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진주 목사가 되었다. 주민과 관군을 독려 하여 방어 준비에 나섰다. 한편 김성일의 도움으로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와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가 성으로 드러와 김시민과 합류 했다. 경상 우병사 유승인이 패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김시민은 이를 거절 했다. 그는 김시민 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지휘체계 가 무너질 것을 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남북으로 소백산맥이 가로 막고 있다. 조선수군에게 제해권을 빼았긴 마당에 호남지방을 점령하여 군량미를 확보하려면 험준한 산맥을 피해서 평지인 남단으로 내려와 진주성을 통과 해야만 했다. 양군의 사활이 걸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10월6일 일본군은 군사 3만명을 동원하여 총공격을 개시 했다. 해자를 매우고 동문쪽 두 곳을 뚫을 려고 시도 했으나 군관민이 총 단결하여 나흘 만에 일본군은 패퇴 했다. 10월10일 김시민은 총탄에 맞아 전사 했다.
도요토미는 패전소식에 대노했고 차후에 다시 공격할 것을 명 했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과 심유경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명나라에서 원병이 가는 동안 일본군이 북상하여 의주를 공격할 것을 우려 하여 심유경을 먼저 평양에 보내서 고니시와 휴전회담을 하게 했다. 1592년10월 초에 심유경은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 평양성으로 가서 고니시와 회담을 했다. 고니시는 보급문제로 전쟁을 계속하기가 힘든 상항이어서 반가운 손님이었다. 50일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 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 선조 배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영하의 몽골족이 일으킨 보바이의 난을 평정 한 후 같은 군사 5만명을 이끌고 의주에 도착했다. 1592년12월25일 의주 용만관에서 이여송은 선조를 배알 했다. 이여송은 교만한 태도로 “신하의 나라를 구하러 왔다”고 선언 했다. 선조는 그가 무척 반가왔다. 버선 발로 마중했다. 선조는 위장용 환도를 하사 했다. 왕이 이여송에게 명과 조선의 군사를 총 지휘할 권한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군사를 조선사람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조선의병의 활략
일본에서는 다이묘(번주)들 끼리 싸움에서 패전하면 그 번주의 백성들은 모두 이긴 번주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성을 점령 해도 성안의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다시 공격해 왔다. 뜻 밖의 일이었다.
훈련원 부봉사 권응수와 정대임은 현지에서 의병을 모아 영천을 수복했다. 9월20일 경상 죄병사 박진은 권응수를 도와 주고 군사 1만병을 동원하여 경주성을 탈환 했다. 비격진천뢰라는 대포가 주효 했다. 이포의 대포알은 시한폭탄이었다. 대포 알이 경주성안에 떨어 지면 바로 폭발하지 않았다. 일본병사들은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폭발하여 굉음을 내면서 파편이 날아왔다. 혼비백산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 했던 대포였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전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게릴라 전을 하다가 관군과 합세하여 정규전에도 참여 했다. 의령, 삼가, 합천, 영산에 있는 왜군을 섬멸했다. 전라도에는 고경명과 김천일 이 의병을 일으켰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활략했다. 경상도 의병은 호남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스님들도 의병에 참여 했는데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이 유명하다.
조정에서는 의병의 역모를 우려 했다.
임진왜란 중에 관군은 지극히 취약 했다. 반면에 의병이 곳곳에서 승전보를 알려 왔다. 조정대신들과 왕은 의병대장들이 혹시 역모를 하지 않을 까 우려하여 이들의 동태를 살 폈다. 전라도 광주 출신 의병대장 김덕령은 유학자이면서 천하장사였다. 그는 일본군과 싸우는 쪽쪽 승리 했다.
1596년에 임진왜란이 일단락 끝나고 전투가 소강 상태 였을 무렵 서얼출신 이몽학이 난을 일으켰다. 조정은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최담령을 이 사건에 연루 시켜 체포 했다. 김덕령은 국문중에 두다리가 불어저 사망 했다. 최담령은 사형 당했다. 곽재우와 홍계남은 석방되었다. 그후 곽재우는 항상 감시를 당했다. 그는 전쟁 후에 산속에 들어가 도가에 심취 했다.
임난후에 거의 모든 공은 피난따라갔던 문신들이 차지했다. 의병장들의 공은 거의 무시했다. 해방후에 독립운동가들과 비슷한 신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