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압도 했다.
서인 황윤길은 도요토미가 처들어온다고 하고 동인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도요토미의 서신에 분명히 명나라를 정복 하려고 하니 길을 내달라는 요구가 있는 이상 조선 조정은 가만히 앉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성룡과 김성일은 이황의 수제자 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동창이다.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있던 유성룡은 김성일이 거짓말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 대비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이미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서 전쟁 발발이 정치화 된 마당에 통일 된 국론으로 단결하여 전쟁준비가 추진되지 않았다.
더구나 통신사가 도요토미의 서신을 가지고 귀국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이었다. 일치단결하여 준비 했어도 모자라는 시간 이었다.
조정에서 지방에 성이 없으면 성을 쌓고, 기왕에 있는 성을 보수하라고 시달 했다. 그동안 태만 했던 군사훈련을 하라고 재촉 했다. 그러나 지방원님들은 “그까짓 왜구”라고 깔 보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말을 듣지 않았다.
유성룡은 1591년2월13일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천거 했다. 육지에서의 전쟁 대비가 실패하고 있었 지만 이순신의 등용은 조선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적을 알아야 한다. 적에 대한 정보는 필수 였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 까막눈이었다. 일본을 통일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적에 불과한 왜구라고 깔 보았다. 조선은 건국 이래 거의 200년 동안 큰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로운 시대를 겪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저 농사만 짖고 군사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조정은 수수방관 했다.
조선군제
조선은 일반병 정병과 직업군인 오위가 육군이었고 오늘날 해군에 해당하는 수군이 있었다. 직업군인 즉 풀타임 군인은 극히 소수 였다. 궁과 지방 성을 경비하는 병력 정도 였다. 대부분의 병력은 젊은 이 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짬짬이 훈련을 받으면서 복무 하는 형식으로 채워 졌다. 그나마 세금(군포)를 내면 군복무 을 면제해 주었다. 왜구나 여진족등의 침입이 잦은 곳에는 다른지방에서 거두어 들인 세금으로 일정한 보수를 주고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군대를 유지 했다. 왕궁의 경비와 한양의 방위는 오위 즉 직업군인이 맡았는 데 총병력이 약 8,000명에 불과 했다.
외침시 전략; 제승방략제
조선은 외적이 침입할 경우에 가까운 곳에 각 고을에서 파견된 병력이 모이고 이 병력의 지휘관을 한양에서 파견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병사들은 한번도 훈련을 같이 해보지 않은 장군의 지휘를 받아야 해야 했다. 또한 한양에서 현지 까지 지휘관이 도착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자연히 진격하는 적군에 대한 대응이 지연 되었다.
조선수군
도로가 열악 했던 조선은 바다길이 중요한 운반 수단이었다. 나라의 세금을 쌀로 거두어 들여야 했고
모두 배에 실어서 한양으로 운반 되었다. 이 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한 수군을 유지 해야 했다. 따라서 육군에 비해서 수군은 제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은 힘들고 위험 했기 때문에 군포를 납부하고 근무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원 확보가 힘들었다. 조정에서는 많은 혜택을 주고 수군을 모집 했으나 항상 인원이 부족 했다. 급기야는 죄인을 수군으로 투입하기도 했다. .
이순신의 전쟁 준비
이순신은 천성이 저돌적이었다. 소년시절에는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동네 어른들도 무서워 할 정도로
공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8세에 무과에 응시 했으나 시험도중 말에서 떨어져서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1576년 32세에 무과에 급제 했다.
과거 급제후 충청남도 서산,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 하는 동안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기용 해 달라는 청탁을 거절 했다. 겨우 10개월 만에 전라도 발포의 수만군호로 전근 되었다. 새임지에서도 여러 차례 부당한 상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1579년 그를 유심히 지켜 보던 병조판서 김귀영은 이순신을 친히 불러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겠다고 제의 했으나 이를 일언지하 거절 했다. 현실에 타협할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순신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은 출발을 하게 된다.
이순신의 첫번째 백의 종군
결국 1587년 한경도 국경지대로 좌천 되어 여진족에 대한 국경 방어와 둔전 관리 임무를 맡게 되었다. 둔전은 변경 지역이나 군사요충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경작하는 토지 이다. 두만강 하구에 녹둔도라는 섬이 있었 는 데 땅이 비옥하여 조선정부는 이곳에 둔전을 두어 여진족 방어 병력의 군량미로 사용 했다.
그해 가을은 풍년이었다. 9월1일 이순신은 경흥 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했다. 여진족은 미리 숨어 있다가 비어 있는 병영을 급습 했다. 조선군 11명이 전사하고 160명이 포로가 되었으나 이순신과 이경록은 반격하여 여진족을 격퇴 했다.
이순신의 상관은 북병사 이일이었다. 이일은 여진족이 처들어 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처 버렸다. 그는 본영에 충분한 수비병력을 남기지 않고 추수하러 보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이일은 이 책임을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떠 넘 겼다. 이일은 이 두사람을 처형 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으나 선조는 이일이 이들을 모함하고 있음을 알아 차리고 백의종군을 명 했다. 백의종군은 장군이 졸병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계급은 유지 하되 보직이 없는 상태를 말 한다.
1588년 이순신은 2차 녹둔도 전투에서 여진족 장수 우물기내를 생포하여 복직 되었다.
1589년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 임명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선조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591년2월 유성룡은 전쟁대비의 일환으로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 로 추천하였고 선조은 이를 받아들였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 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쟁 여부에 상관하지 않고 군 정비에 나섰다. 관할 구역을 수시로 순시 하여 문제가 발견되는 대로 바로 잡았다. 군기를 잡기 위해서 말 안듣는 백성과 부하 장병을 가차 없이 처벌 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활쏘기를 연마 했다. 그의 명중율은 82%로 궁도협회 8단에 해당 했다.
1592년 4월12일 이순신은 태종때 위협용으로 만들어 놓은 귀선(거북선)을 개량하여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이었다.
조선 수군과 일본수군의 차이
일본 군함은 근본적으로 해적이었던 왜구가 해적질에 편리하게 만들어 진 구조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작아서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적군의 배에 밀착 한 후 뛰어 들어 백병전을 하기에 편리 했다. 함포는 빈약 했고 주로 조총으로 무장 했다. 따라서 적의 배에 가까이 접근해야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조선 함대는 거북선과 판옥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북선은 몇척 되지 않았고 주로 판옥선이었다.
둘 다 이층 배였다. 판옥선 아래 층에서는 110명이 노를 저었고 이층에는 함포가 설치되어 54명의 병력이 주로 포를 쏘았다. 이와 같이 조선 수군은 이미 왜구가 뛰어 들어 백병전을 하기 힘든 구조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 군함의 함포는 사정거리가 1000 미터 였지만 파도에 흔들리는 배에서 쏘는 대포의 명중률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순신은 여러번 실험 끝에 200 미터 정도 접근 하면 적의 배를 침몰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 수군은 배 안에서 적을 관찰 할 수 있었지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조선 수군은 거북선을 적진 깊숙히 진격 시켜 일본수군의 장군 배를 함포 사격으로 침몰 시킨 다음 판옥선이 돌격하는 작전을 썼다.
조선 수군은 화력과 배의 구조 면에서 일본수군을 압도 했다. 거기다 이순신 같은 지휘관이 있었 으니
시작 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은 유명무실 했다. 1592년 음력 4월13일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700척의 배에 18,700명의 병력을 태우고 부산진에 나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