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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pr 14. 2022

유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
고난의 역사

유크라이나 대통령도 유태인이다. 


blog 바람과 사라진 티끌: Destruction of the Temple of Jerusalem by Francesco Hayez

유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어 젤렌스키는 유태인이다. 나라가 없어서 떠돌이 신세가 된 유태인이 국가의 수반이 된 것은 그가 유일 하다. 1991년 독립 이후 두 번의 시민 혁명을 겪으면서 유크라이나 사람들은 개개인의 종교에 관계 없이 모두 똑 같은 유크라이나 사람으로 보는 눈이 트였다고 할 수 있다. 유쿠라이나에는 러시아 정교, 폴란드 캐돌익, 유태교 를 믿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유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은 그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살았다. 유태인들이 아닌 유크라이나 사람들도 힘들게 살아 왔는 데 유태인들의 고난은 더욱 심 했다. 


현재 유크래인에 살고 있는 유태인 인구는 유롭에서 3번째, 세계에서 5번째 라고 한다. 지금은 3-40만명으로 추산 하고 있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2.5 백만이었다고 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 되면서 많은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 했다. 


1942년 1월20일, 나치당 고위층과 나치 독일 정부 대표가 베를린 교외 Wannsee 에서 만났다. 이 회합의 의장은 Reinhard Heydrich 였고 오늘날 이회의를 Wannsee Conference 라고 한다. 이회합을 토대로 나치 독일 정부 안보부는 "유태인 문제 최종 해결"을 위한 유태인 말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서 유롭에 사는 모든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죽이기 위한 "대량살상 수용소"를 만들었다. 


나치정부(Reich)는  개스 챔버가 있는 유태인 수용소를 Birkenau, Treblinka, Sobibor, Belzec, Majadanek 에 만들었다. 독일과 나치 점령지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기차 회물칸에 빽빽이 실려 수용소 역에 도착 한다. 도착하자 마자 수용소 관리 장교는 젊은 남자를 한쪽에 모으고 다른 쪽에는 늙은이, 여자, 아이들을 서게 한다. 그리고 기술이 있는 사람들을 골라 낸다. 바느질, 귀금속 세공, 목수, 대장장이 등이 나선다. 


나머지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다른 쪽에 서있는 남편과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고 장교의 지시에 따라 수용소로 들어 간다. 나치 장교는 이들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왼전 나체로 만든 다음 개스 챔버로 보낸다. 개스가 가득찬 커다란 창고 안에서 무두 죽으면 바로 태운다. 다른 쪽에 있는 남자들과 기술을 가진 여자들은 끝이지 않고 연기가 나는 다른 쪽 수용소를 바라 보며 매일 일을 한다. 벗겨진 옷은 깨끗이 세탁한 후 고쳐서 살아 있는 유태인들에게 입힌다. 옷 안에는 보석, 돈, 때로는 단도 같은 호신용 무기가 들어 있었고 나치는 이것들을 수용된 유태인에게 수집하도록 했다. 이들은 노동을 할 수 없게 되면 모두 죽어야 했다. 


개스 챔버를 이용한 유태인 대 학살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 이다. 그러나 이전에 유크라이나의 유태인들은 나치의 총에 맞아 학살 되었다. 1941년 여름과 가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역사가들은 "총알에 의한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by bullets)" 라고 명명 했다. 


1941년6월22일, 나치 독일은 러시아를 침공 했다. 러시아로 가는 길에 있는 유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다른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은 속속 독일에 점령 되었다. 히틀러는 점령지의 유태인을 소비에트(볼쉐비크) 협력자라고 하여 대량 학살 했다. 이 때는 아직 개스 챔버가 있는 수용소가 건설 되기 전이어서 모아놓고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비 야 학살(the Massacre at Babi Yar) 이다.



Holocaust Museum: An aerial photograph of Babi Yar taken by German Air Force on September 6. 1943

1941년 9월19일 독일군은 유크라이나 수도 키에브 들어 갔다. 당시에 유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었다. 독일이 침공하기 전 키에브에는 160,000명의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키에브 인구의 20%에 해당 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많은 젊은이 들이 소련군으로 징집 되거나 다른 나라로 피난 했다. 약 10만명의 유태인이 키에브를 떠 났다. 남이 있는 유태인은 대부분 여자, 어린아이, 노인 이었다. 


소련군은 키에브에서 후퇴 하면서 독일 군이 들어올 무렵에 폭파 하도록 장치 되어 있는 지뢰를 묻어 놓았다. 

이 지뢰가 터져 독일군 지휘본부, 시내중심부에 있는 중요한 건물이 파괴 되고 수많은 독일군 장병이 죽었다. 

지뢰 폭발로 인해서 화재가 발생 하여 많은 집들이 소실 되었다. 독일군은 지뢰폭발을 유태인의 소행으로 덮어 씨웠다. 한편으론 유태인을 제거 하면 빈집이 많이 생겨 회재로 인한 주택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1941년9월29-30일 나치독일군은 케에브의 유태인 대부분을 바비 야라고 하는 좁은 골짜기에 모아 놓았다. 그들은 유태인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다음 골짜기에 밀어 넣고 총으로 쏘 아 죽였다. 33,771명이 사살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개스 챔버가 설치 되기전에 사살된 유태인이 무려 일백50만명에 달한 다고 한다. 


러시아의 유쿠라이나 침공을 푸틴의 전쟁이라고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에 이어 악마같은 지도자가 또 등장 한 것 처럼 보인다. 히틀러는 힘에 의해서 제압 당 했고 스탈린은 병사 했다. 아무래도 푸틴도 힘으로 굴복 시켜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Bill Ackman은 헤지판드 맨에저 이다. 2020년1월 코비드19 판데믹을 미리 예상하고 관계 주에 거금을 투자 하여 큰 돈을 번것으로 유명 하다. 그는 유태인 이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해 왔다. 러시아가 유크레인을 침공 하자 이스라엘은 난처한 입장에 처 했다. 1991년 유크레인 독립 이후 수많은 유크레인 유태인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크레인에 살고 있는 유태인을 방치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비위를 건들일 수 도 없다. 유엔에서 러시아를 비난 하는 쪽에 서지 않을 려고 했으나 미국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찬성 표를 던졌다. 그렇지만 쌩숀에는 참여 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푸틴을 직접 만나서 휴전을 위한 설득을 시도 했다는 소식이다. 빌 앸크만은 유크레인 전쟁 종식의 열쇄는 중국이 쥐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가 시진핑을 설득 중이라는 소식이다.  


참고: The "Holocaust by Bullets" in Ukraine; The National WWWar II Museum in New Orl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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