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8.15 60주년 기념
KBS: 전세계 40인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1945년
8월15일 그날의 기억/ 광복 60년 그날의 기억(2005년8월9일 방송)
8.15의 기억 2부: 해방 후 미군정기, 사회곳곳에서 움트던 변화의 움직임
8.15의 기억 3부: 해방이 되어도 좋아진 게 없었던 굶주린 시민들의 대규모 봉기
8.15의 기억 4부: 신탁통치를 둘러싼 극렬한 좌우 대립과 단독 정부 수립, 그리고
제주 4.3 사건 까지
그들은 모두 다 다 같은 사람이었다. 일본군 장교였던 사람, 일본군 병사 였던 사람, 일본 육사 생도 였던 사람, 군수 였던 사람, 조선 방송국 아나운서였던 사람, 독립운동가 였던 사람 그리고 싱가포르에 일본군 포로로 잡혀 있던 오스트랄이아 병사도 모두 다 일본이 항복 했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 했다. 그들은 영원히 일본사람 지배하에 살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
곧 바로 조선사람들이 만든 나라가 세워 질것을 기대 했으나 38선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군이 점령 했다. 1945년9월9일 중앙청앞 국기 계양대에는 일장기 대신에 성조기가 올라 갔다.
미군정이 시작 되었다. 일본 사람들이 경영 하던 나라 였다. 공장을 운영하던 맨네져, 기술자가 다 없어 졌다. 어깨넘어로 겨우 배운 기술을 가진 조선 사람들이 인계를 받아 겨우 겨우 공장이 돌아가거나 아예 문을 닫는 공장 도 많았다. 인천의 기차 만드는 공장도 겨우 4개월 만에 어렵게 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철도 운영도
몇 차례의 대형 사고를 치루고 겨우 기차가 안전하게 움직 였다.
미군정은 일본군대 경험이 있거나 일본육사 출신인 조선사람들을 영어를 가르쳐 국군 지도자로 등용 했다. 영어를 잘 하면 출세길이 확 트였다. 통역관들은 미군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하여 치부 했다.
모든 것이 자유 였다.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총동원령이 내려 모든 것이 배급제 였던 일제 말엽의 핍박이 확 풀렸다. 수확한 쌀을 자기가 전부 가질 수 있고 시장에 내다 팔 수가 있게 되었다.
농민들은 이제 부터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약삭 빠른 상인들이 매점 매석을 하기 시작 했다. 쌀 때 쌀을 사두었다가 비쌀 때 내다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 총독부가 귀국자금 마련을 위해서 화폐를 과도하게 발행 하여 인프레이션이 심각 했다. 쌀 값이 천정 부지로 올라가고 품귀 현상까지 나타 났다.
미군정은 쌀을 거두어 들여 배급해주는 제도로 바꾸었다. 일제말엽과 똑 같은 제도 였다. 악독한 경찰이 다시 농민들 집을 찾아와서 강제로 쌀을 거두어 갔다. 일제 경찰이 다시 문전에나타 난 것이었다. 미군정은 전 인구를 배불리 먹일 쌀이 없었다. 배급양은 턱 없이 부족 했다. 일본놈들만 나가면 다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국민은 크게 실망 했다. 거기다 콜레라 까지 퍼졌다. 민중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대구에서 경찰과 시민이 충돌 했다. 대구 10월항쟁이다. 폭도들은 경찰서에 방화하고 지주들의 집을 털 고 경찰을 죽였고 경찰은 폭도들에게 발포 했다. 순찰 업무를 수행하던 미군도 폭도들에게 총을 쏘 았다.
배곺은 군중과 박봉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공산주의자들이 가만히 쳐다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이들을 부추겨시위와 무장봉기를 책동 했다. 박헌영과 이북 공산당 본부의 지령으로 남한 공산당은 움직였다.
38선 이북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바뀌어 조선사람들이 솔선수범하여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 되었다. 친일파 숙청, 지주와 자본가 체포와 재산물수, 예수교 신자 탄압이 진행되었다. 이북 공산주의 혁명의 피해자들은 필사적으로 이남으로이주 했다. 이 계통의 젊은이 들은 서북청년당등 극우 단체에 가입하여 폭력을 불사 하고 좌익 청년들과 대결 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제안 했다. 소련은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미군정이 이를 한국 정치 단체에 제의 하자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져 정국은 무척 혼란 스러워 졌다. 반탁이었던 이북은 불시에 찬탁이 되고 우익은 반탁이 되었다. 암살과 폭력이 난무 했다.
제주도는 일제 때 까지 전라남도에 속 해 있었다. 제주도는일본에 가까웠고 미드웨이 해전 패패 이후 조선주둔 일본군 중 가장 많은 군대가 제주도에 있었다. 제주도민은 일본 본토에서 일 하거나 장사를 하여 본토 사람에 비해서 풍족 했다.따라서 자녀들이 일본에서 교육 받을 기회가 많 았다.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 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제주도에는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다.
제주도는 건국준비원회로 시작하여 인민위원회로 바뀐 뒤에도 중앙 행정 기관이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민족 자치 기관인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움직 였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전라남도에서 분리 하여 도로 승격시키고 중앙에서 직접 관리 했다.
여러가지 복잡한 원인이 거두 되지만 간단히 요약 하면 제주4.3사건은 남로당과 미군정의 대결이었다. 남로당은 미군정에 불만에 찬 민중을 폭도화 해서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실시 되는 5.10 선거를 방해 하고 자 했다. 미군정은 전 제주도를 반란군이 점령 한 것으로 간주 하고 전 주민을 상대로 무차별하게 진압작전을 전개 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경찰은 여기에 서북청년당 등 극우 단체를 동원 했다. 이 와중에 무지 한 민중이 수 도 없이 희생 되고 보트 피플(?)이 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여 조총련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다같이 "나도 사람 이요" 하고 외치고 있다. 친일파도 좌익 노동 운동가도 극우 반공주의자도 경찰도 국군도 미군도 대구 전매청에서 담배를 훔치던 여직원도 모두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그 시대를 살 았다. 이 다큐는 "알 았 습니다. 다 이해 하겠 습니다. 친일파니, 빨갱이니 하고 싸우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 하고 있다. 이분들은 이제 다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렵게 사셨 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명작입니다. 꼭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