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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27. 2022

미국과 한국, 미국사람과 한국 사람

한국전쟁과 광주 항쟁


National Park Service

한국전쟁 베테란 기념 벽(the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Wall of Rememebrance)이 위싱톤 DC National Mall 에 세워 졌다는 소식이다. 휴전 협정이 맺어진 날인 7월27일에 메모리얼 월 봉헌식이 개최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벽에는 전사한 36,000명의 미군과 7,100의 캇츄샤로 참전했던 한국인 미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에서 기부한 돈 22 밀리온 달러로 건설 되었다고 하나 한국측에서 17 밀리온 달러를 냈다고 한다.  미군의 희생이 얻어낸 결과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감사의 표시이다. 미국이 없었으면 북한이 한반도를 적화통일 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싸웠던 미군은 한국인의 영원한 은인이다.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벽에 이름이 새겨진 베테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 까? 아마 한국사람들이나 미국사람들은 용감 무쌍한 군인들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겁많고 순진한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갓 나온 애숭이 젊은이 들이었다. 


1945년에 이차대전이 끝났다. 전세계 전선에서 싸우던 젊은이들이 돌아 왔다. 미국은 붐이었다. 세계 GDP의 70% 이상을 생산하고 있었다. 징병제였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했다. 평화무드는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심하게 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국회는 평화시 군사 정책을 통과 시켰다. 장군들은 군사훈련을 등한 시 했다. 군인들은 훈련 대신 운동을 하며 병영 생활을 했다.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한 무기가 지급되어야 했는 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 했다. 총기 소제는 기본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에 한국과 미국의 생활정도의 차이는 극과 극이었다. 병사들은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옛날 욍국의 왕자처럼 살다가 갑자기 빈민굴로 쫒겨난 신세 처럼 되었다. 인분냄세가 코를 찌르고 세탁,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시에는 하수 냄새가 진동 했다. 더운 여름 날씨에 모기가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인민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미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가는 그런 군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민군의 탱크가 나타나자 정반대로 미군이 줄행랑을 쳤다. 소대장이 진격을 외쳤지만 그들은 무기는 물론 철모와 물병까지 버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 쳤다. 어디로 가야 안전한지도 모르고. 군사훈련은 적군과 싸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자신의 생명을 보호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 과제 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사투를 하는 동안 그들의 전투력도 많이 좋아 졌다. 그러나 손실된 병력이 빨리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현지 한국인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모자라는 병력을 매꾸었다. 캇튜사(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의 시작이었다. 영어도 못하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었다. 전투에는 참여 시킬 수가 없었다. 그저 부대 노역을 맡았다. 미군은 그들의 도움을 받기는 커녕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의 총탄은 미국과 이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름도 전우 미군들과 같이 한국전쟁 기념 벽에 새겨 졌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1980년 5월 광주. 궁지에 몰린 시위대는 미국 대사에게 구원을 요청 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는 미국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의 미국 대통령 카터는 누구 보다도 더 인권을 중요시 했다. 미국정부가 독재자 전두환을 지지하고 있으리라고는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을 것이다. 미국은 전두환이 특전사를 투입하고 전방 22사단을 동원하여 광주를 점령 해도 묵묵 무답이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국가안보라는 미명아래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것을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이는 분명한 학살 방조 이다. 왜냐면 미군이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박정희 암살 후 선거를 통해서 다음 지도자를 선출하게 하지 않고 군사독재자를 지지한 이유는 남한이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 처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공산화 되는 것을 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국 정보기관이 얼마나 한국에 대한 정보를 충실하게 수집하지 않고 있었는 지를 증명 해주고 있다. 카터 행정부의 안보 담당자들이 가지고 있던 한국에 대한 선입견은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이었다고 생각 한다. "한국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56년 항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소련 탱크가 항가리 국민시위대를 진압 하기위해서 나타 났다. 소련은 소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국가가 되려고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 했다. Blowback의 저자 찰머스 존슨은 1980년 광주 항쟁을 1956년 항가리 사태에 비유 한다. 무력으로 항가리에 공산주의를 지속 시킨 소련과 한국에 군사독재를 존속 시킨 미국이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https://prospect.org/features/roots-rage/

He compares the 1980 uprising in Kwangju, South Korea, to the 1956 Hungarian uprising. South Korean protesters in Kwangju were put down with the help of the U.S. military, he says, in the "most notorious act of political violence in South Korea's history." The event is forever associated with the United States. What is worse, Johnson observes, everyone in Korea knows about the U.S. role, but the American people do not, since the Pentagon is still withholding information about its involvement. 


Blowback의 저자 존슨은 "더욱 기가 막힌 점은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광주 항쟁 당시에 미국이 어떻게 했는 지 다 알지만 미국 사람들은 아무것 도 모른다. 왜냐면 펜타곤이 진실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부연 했다. 


한국전쟁 때 희생된 미군에게 가슴속 깊이 감사하던 사람들도 미국 당국의 표리부동한 행동의 진실을 알게 되면 무척 분개하고 급기야는 반미 감정을 가지게 된다. 미국은 그동안 표방하는 미국의 가치와 상반되는 일을 국익이라는 미명아래 많이 해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미국의 국익을 지킬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독재자에 항거하는 사람들 편에 섰더라면 장기적으로 미국에게 더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권력에 눈이 어두어 미국의 하수인이 되어 자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자국민을 학살 했다. 군대는 외적과 싸우라고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만들어 진게 아닌 가?  그들은 나라의 역적에 해당하는 천인공노할 인간 들이었다. 이런일이 없으려면 강한 군대을 가진 부유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외세의 입김에서 자유스러워지고 민주주의가 지켜 진다. 


그러나 저러나 18세의 애띤 청년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이억만리 떨어진 나라에서 앞이 창창한 인생을 짧게 마쳐야 만 했다.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하고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교외의 집에서 알뜰 살 뜰 살며 인생을 보냈어야 했을 젊은이 들이다. 그 벽에 이름이 적힌 그들의 희생이 눈물겨울 정도로 고맙다.  한국의 번영은 그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 This Kind of War by T.R. Fehrenbach, The Classic Korean War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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