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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Oct 25.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부 한국전쟁

제1장 폭풍전야



제1장 폭풍전야


일본이 패전한 후 38선 이북은 공산주의 국가가 이남은 자본주의 국가가 세워졌다. 1945-1948년, 3년 동안 남북의 민족 주주 의자들은 분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으나  소련과  미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우리 민족이 원해서가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분단이었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이 소진한 것은 아니었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쟁이 남아 있었다. 


해방 후 남과 북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북은 안정 남은 혼란이었다.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은 북한은 통일의 마지막 수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소련의 도움으로 전쟁준비를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다. 이승만도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욕망은 김일성 못지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의 군사원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전쟁 발발의 기초적인 원인인 힘의 불균형은 한반도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일성이 전쟁을 하면 남한을 제압할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정황이었다. 


미군 철수

1948년 9월 15일 미 제25군단이 남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건국 한지 한 달 만이다. 소련군은 북한에서 10월부터 철수 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한 지 한 달 만이다. 이승만과 한국 정부는 크게 당황했으나 철군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북에서 소련군이 철수하고 있는 마당에 미국이 남한에 군대를 남겨둘 수가 없었다.  12월 12일에 유엔은 남북 외국군은 조속한 시일 내에 모두 철수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남한 정부는 미국에 그저 좀 천천히 하라고 부탁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미군은 1949년 6월 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남한에서 철수했다. 6.25 가 일어나기 일 년 4일 전이었다. 


소련 핵무기 실험 성공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핵실험에 성공했다. 히틀러가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다는 정보는 연합국들에게 커다란 경종이었다. 영국, 미국이  핵무기 연구를 시작했다. 소련은 뒤늦게 1943년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소련의 스파이들은 영국과 미국의 핵무기 연구소에서 설계도를 입수할 수 있었다. 미국은 소련이 1953년 경에 핵무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1949년 소련의 핵 실험은 미국을 당혹하게 했다. 미국은 더 이상 지구 상에서 유일한 핵국가가 아니었다. 그동안 핵이 없었던 소련은 재래식 무기 증강을 해 왔다. 소련이 핵을 보유하게 되자 미국의 군사력은 이미 소련에 뒤지고 있었다. 


핵무기는 세계대전을 방지해 주었다. 전쟁 없는 냉전의 핵은 핵무기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보여준 핵무기의 위력은 강대국 간의 전쟁을 전쟁 당사자들의 파멸로 이해했다. 


중국의 공산화

1937년에 시작한 중일전쟁은 1945년 9월 9일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은 일본과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서로 싸우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하를 놓고 두 세력은 자웅을 겨누기 시작했다. 국공내전의 시작이었다. 


국민당의 부패와 장개석의 독재는 공산당의 단단한 군기와 모택동의 친 농민정책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공산국가가 되었다. 전자는 미국이 후자는 소련이 도왔다. 소련의 승리였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 부재

중국이 공산화되자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 방어의 전초기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형 공산국가인 소련과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면 미국의 안보가 위태 해 진다. 미국은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을 강국으로 만드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2대  공산국가에 고추처럼 매달려 있는 한반도, 반은 이미 공산화되어  지도상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남한을 유지할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조선인 공산당군 귀국

일제 강점기에 조선사람들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산당군에 소속되어 중일전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공산군에 남아서 국민당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945년 8월부터 빠르게 안정을 찾은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북한)은 공산당군(팔로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48년 중반 이후부터 모택동은 조선군을 북한에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국공내전의 승리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쟁에 경험이 많은 잘 훈련된 장병들이었다. 모택통은 쓰던 무기까지 들려서 돌아가게 했다. 이들은 신참 인민군 장병들을 훈련시켰고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4사단과 6사단의  주력이 되었다. 


핵국가가 된 소련은 전쟁준비가 완료된 김일성에게 허약한 남한을 침공하라고 허락했다. 해볼 만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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