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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Oct 30.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 인
가? 3부 한국전쟁

 제2장 국군과 인민군의 장군들

국군과 인민군의 장군들


김일성과 인민군 장군들


"김일성이 북한에서 처음 만든 따발총을 인민군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 네이버 블로그 송풍수월


우리 세대가 알고 있었던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경력을 가지고 있는 소련의 앞자비이었다. 남한에서는 국군의 원조를  광복군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과연 그렇까?


1937년 6월 만주에 근거지를 둔 김일성과 그 예하 부대원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갑산파와 협력하여 함경도 보천보를 기습 공격했다. 워낙 시골 마을이어서 일본군의 경계가 허술했다. 일본 측은 멍청하게 당했다. 화가 나서 맹열하게 추격하다가 김일성의 포위망에 걸려 120여 명의 일본군이 사살되었다. 동아일보는 이를 보천보 전투라고 하여 대서특필했다. 김일성은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조선 항일 부대가 국내에 칩입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만주의 간도 지방은 조선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일본군과 싸운 본거지였다. 조선 말엽의 학정으로 살기 어려워진 조선사람들이 다수 간도와 연해주(넓은 의미의 간도)로 이주하여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이미 40여만 명의 조선사람들이 만주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만주 곳곳에서 독립군을 만들어 게릴라 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참패했다. 이후 일본군은 무차별 조선인 학살과 함께 조선 독립군을 철저히 찾아서 섬멸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은 만주에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만들어서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중국 군대 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은 항일투쟁을 하고 있던 중국인, 만주인, 조선사람들을 모아서 동북 항일연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김일성은 부하들을 이끌고 연군에 합류했다. 20대의 청년이었다. 


일본군은 보천보 사건(1937)의 범인 김일성을 집요하게 추격했다. 김일성은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1938년 2월에서 1939년 3월까지의 도주를 김일성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했다. 오줌이 얼어 붇는다는 만주의 겨울, 더구나 눈이 쌓인 산악지대는 살인적인 추운 날씨였을 것이다. 


1940년, 김일성과 장졸들 200여 명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했다. 소련군은 이들을 구금했다. 소련군은 연군 출신의 중국인과 한국인을 교육시켜서 대일전에 투입했다. 김일성 부대도 구금에서 풀려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소련군 88 특별 여단이 되어 1945년 대일전에 참여했다. 부대장 김일성 휘하에는 최용건, 김책, 최현, 안일, 강건, 오진우 등이 있었고 이들을 빨치산 파라고 한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의 중심인물이었고,  인민군의 지휘관이 되어 남침을 감행한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 군대 소속 정보기관이었던 남의사가 통제하는 구조였다. 이들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홍보와 포로 심문 등 조선인의 일본 말 능력을 활용하는 수준의 임무를 맡았다. 이에 불만이었던 김두봉은 부하와 함께 화북지방 중국 공산당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1942년에 조선의용군을 창설했다. 김원봉은 자신의 부대를 전부 상실한 상태가 되어 새로 창설된 광복군에 들어갔다. 김두봉의 부대는 향후 소위 연안파를 형성했다. 팔로군 포병 사령관 김무정, 조선의용군 정치위원 박일우,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방호산 등이 이에 속 한다. 이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 한 용사들이었다. 


소련군정은 연안파를 견제했다. 물론 빨 지산파에게 유리한 정책이었다. 이들은 해방 직후 귀국이 어려워 졌다. 그들은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공산당군에 소속되어 국공내전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모택동은 이들에게 쓰던 무기를 들려서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이들은 새로 모집한 군인들의 훈련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국공내전 동안에 쌓은 전투 경험으로 한국전에서 인민군 주력 부대가 되었다. 방호산의 6사단 병력은 4사단과 함께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나 빨지산 파는 이들을 푸대접했고 전쟁 후에 숙청되었다. 


한국군

정일권


인민군 장군이 만주에서 일제에 저항하여 싸운 사람들이었던 반면에 한국군의 장군들은 일본군에 소속되어 만주에서 중국군 또는 소련군과 싸우던 인물들이었다. 물론 일본군이 동북 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할 때 일본군의 조선사람들과 항일연군의 조선 사람들이 서로 싸웠을 것이다. 


미군정은 한국군을 창설할 때, 일본군 경력자들을 우선순위로 뽑았다. 그들은 군사지식에 해박했고 친일경력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말을 잘 들었다. 이들은 38선 이북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는 친일 경력을 가진 사람은 해방 직후부터 배척 당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은 일본 육사 47기이다. 그는 1950년 7월에 인민군 총에 맞아 전사했다. 그를 승계한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 8기로 만주국 군대 대위였다. 국군 7 사단장이었던 유재홍은 일본 육사 55기이다. 일본 군 대위로 근무했고 후에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수도사단장이었던 김석원은 일본 육사 27기이다. 구한말에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그는 일본군 대령이었다. 1 사단장으로 한국전에서 용맹을 떨친 백선엽 장군은 만주군관학교 9기로 만군 중위였다. 박정희는 육본 전투정보 군무원이었다. 만주군관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사 57기로 졸업하고 만군 소위로 근무했다.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은 일본군 소위였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적이었던 인민군의 장군과 한국군의 장군은 한반도에서 다시 싸우게 되었다. 인민군은 소련이 훈련시켰고 한국군은 미국이 만들어 준 군대였다. 전자는 공산주의를 위해서 후자는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싸웠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인민군의 장군들을 항일투쟁을 한 애국자라고 할수 도 없고 국군의 장군들을 친일파라고 매도 할 수 도 없는 일이다. 제발 백선엽장군의 묘지를 국립묘지에서 파서 옮기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광복군과 한국군은 아무런 연관도 없다.  


*참고 네이버 블로그 송풍수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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