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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an 03. 2021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부 한국전쟁

11장 인천 상륙, 유엔군의 반격과 서울 수복


Chosun.com


조선이 망했다. 일본 놈들 세상이 되었다. 살려면 일본 놈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30여 년이 지나도 조선이 되살아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막 나도 일본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할 무렵 해방이 되었다.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점령했다. 민초들은 공산주의가 옳은지 자본주의가 옳은 지 알 길이 없었다. 우왕좌왕하면서 운이 좋으면 살고 재수 없으면 죽었다. 남쪽에 대한민국 북쪽에 인민공화국이 생기고 38도선을 넘나들수 없게 되었다. 


남쪽에서는 일본 사람들과 좋게 지냈다는 과거사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선호하면 감옥으로 가거나 사형 감이었다. 북에서는 일본 사람과 잘 지내면서 부를 축적한 사람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를 믿어도 살 수가 없었다. 모두 공산주의를 믿어야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2년 후 남쪽은 순식간에 국토의 대부분이 인민공화국이 되었다. 많은 민초들은 이젠 공산주의 세상이 되는 줄 알았다. 사회 하층 계급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옛날 주인이나 윗사람들을 압박했다. 대한민국에 충성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감옥 행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숨을 죽이고 지하에서 저항하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제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민초들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상이 뒤집어진 줄 알았더니 그것도 겨우 3개월 만에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살 수 있단 말인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이모, 고모들은 내가 어렸을 적에 이런 세상을 살았다. 정의와 선악은 아무 소용없는 공 염불이었다. 살아남는 재주가 제일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자식들이 전장에 끌려가고 집이 폭격에 불타고 논밭이 군인들에게 짓 밟히고 민초들은 어느 쪽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할 것인가를 몰라서 우왕 좌왕하는 동안 전쟁은 아랑곳없이 진행되었다. 책상에 지도를 펴놓고 전쟁을 요리하는 장군들에게는 크게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맥 아터는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초에 서해안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7월 22일에 작전을 개시할 예정이었으나 미군이 패퇴하고 낙동강 전선에서의 고전으로 병력에 여유가 없어서 7, 8월에는 적당한 날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상륙작전에 참여하려고 일본에 와 있던 미 해병대는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 두 번이나 투입되어 혁혁 한 공을 세웠다. 


미군은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해서 부산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 피난민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에 백 병씩 끌어 다가 일본으로 보내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반바지 차림으로 끌 려 왔다. 이들이 영어를 할리가 없었다. 미군 지휘관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캇츄샤 8000명이 상륙 작전에 참여했다. (This Kind of War에서)


국군 제1 해병연대와 제17연대가 상륙작전에 참여했다.  국군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학병 3000명을 모집하여 해병대 제1연대로 증편했다. 9월 6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5일간 특수 훈련을 받고 12일에 인천으로 출발했다. 

(뉴스 제이). 

이들이 어떻게 싸울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능력이나 있었는 지 모르 겠다. 


워커 중장은 미 해병 5 연대를 애지 중지했다. 9월 중순, 인민군은 거의 싸울 능력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이들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해병 5 연대를 원대 복귀시키라는 맥 아터의 명령에 워커는 화가 났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낙동강 방어에 실패하면 나는 더 이상 책임을 질 수 없다"라고 하며 해병 5 연대를 인천으로 보냈다. 


고베에 있던 미 해병대가 9월 11일에 인천으로 출발했다. 요코하마에 주둔하고 있던 7사단도 같은 날에 출발했다. 12일에 해병 5 연대가 인천으로 향 했다. 맥 아터와 지휘관이 타고 있는 마운트 맥인리는 사세보에서 인천으로 향 했다. 7만 명의 대군이었다. 


맥 아터가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기 되기까지는 그렇게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1950년 8월 23일, 도쿄 마루노 이치 디스트릭트에 있는 다이치 빌딩 회의실에서는 워싱톤에서 온 육군과 해군 참모장, 각군의 장군들이 맥 아터에게 상륙작전 계획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같은 날(8월 23일) 중공군 참모장 레이 윙푸(Lei Yingfu)는 마오 제퉁에게 미군이 서해안 6곳 중에 한 곳을 선택하여 상륙할 텐데 가장 의심되는 지역이 인천이라고 보고 하고 있었다. 저우 엔라이는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레이 윙푸에게 미군이 어뗳게 전쟁을 진행할 것인가를 조사해서 보고 하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그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저우 엔라이에게 보고 했다. 즉시 자우 엔라이는 그로 하여금 직접 마오에게 보고 하라고 지시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마오는 그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하여 소련과 김일성에게 알리고 소련도 김일성에게 인천 상륙을 알려 주었다. (the Japan times sept. 21, 2000)


마오 제둥(모택동)은 저우 엔 라이(줄래)에게 한국전쟁의 총지휘를 맡겠다. 말하자면 맥 아터 장군의 대항마였다. 그는 8월 말까지 적화통일을 완수하겠다는 김일성의 장담을 믿지 않았다. 저우는 소련으로부터 공군 파견을 약속받는 한편 가오 강(Gao Gang)을 지휘관으로 하는 260,000명의 대군을 만주와 북한의 경계선(압록강)에 배치했다. 대만을 공격하려던 병력이었다. 저우는 차이 챙원에게 한반도의 지형 조사를 지시하고 레이 윙푸에게 미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보고 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중공 고위층과 지휘부는 인천 상륙을 미리 예측하고 소련과 인공에게 알려 주었다. (위키 페디아 Korean War)


저우 엔 라이는 김일성에게 "10만 명의 예비 병력이 없으면 인천에서 미군의 상륙을 막으려 하지 말고 북으로 퇴각하라"라고 조언했다(wikipedia, Korean war). 저우 엔 라이는 이미 사실상 한국전에서 인공 측 총사령관이었다.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저우 엔 라이는 유엔군을 북쪽 산악지대로 유인하려 했을 까? 아무도 모르지만 결과를 추인해 보면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제갈공명과 손자병법을 낳은 중국의  저우 엔 라이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명장 맥 아터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상륙은 심한 간만의 차이 때문에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월미도는 인천과 뚝길로 연결되어 있다. 아침 6시 30분, 미 해군이 대포로, 공군이 폭격으로 폭이 겨우 900미터 조금 더 되는 섬을 잿더미로 만든 다음 미 해병대 1개 대대가 월미도에 상륙했다. 인민군 해병대 400명은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17명이 부상당 했다.  썰물과 함께 군함은 일단 바다로 후퇴했다. 


해병대가 밀물이 되어 바닷물이 높아질 때까지 월미도에서 기다리는 동안 미군함은 대대적인 사격을 계속했고 공군은 인천과 인천 주위 25마일 안의 인민군에 대한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후 5시 33분 미 해병 5 연대 장병들은 16 피트 높이의 방파제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인천 항은 모래사장이 없고 갯벌이어서 군장비가 통과할 수 없고 병사들이 도보로  진격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배에서 내리면 곧바로 방파제였다. 사다리를 타거나 포탄이 만들어 놓은 구멍을 빠저 나갔다. 방파제 방어선을 뚫는 데 겨우 20분이 걸렸다. 인천에는 2000명의 인민군이 있었고 9월 16일 오전 01시 30분에는 인천이 완전히 포위되었다. 국군 해병대에게 인천 시가지에 남아있는 적군을 처리하게 했다. 복수 심으로 꽉 차있는 그들 앞에는 남자, 여자 어린아이, 아군과 적군 모두 안전하지 않았다. (This Kind of War에서)


미 제10군단은 9월 16일 새벽에 인민군의 큰 저항 없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 18마일 만 더 진격하면 서울의 심장부를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18일에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한강변에 도착했다. 미군이 속속 서울로 진격하는 동안 낙동강 전선으로 향하던 인민군 18사단이 미 해병대를 공격했다. 수원에 있던 인민군 70 연대도 합세했다. 그러나 미 해병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9월 16일, 미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한 것을 확인한 맥 아터는 워커에게 낙동강 방어선을 뚫고 북으로 총공격 할 것을 명령했다. 북에서 도망 오는 인민군을 막고 남쪽에서 밀어붙이려는 전략이었다. 낙동강 전선에 있는 인민군이 미군의 인천 상륙 소식을 들으면 사기가 크게 저하될 것으로 믿었다. 보급과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당황 하지 않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민군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여 낙동강 전선의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9월 17일이 되어도 인민군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9월 18일 국군 1사단이  다부동 동쪽에서 북한군 방어선  후방에 진출하여 인민군 퇴로 차단에 성공했다. 미 2사단도 낙동강 도하에 성공하여 서쪽으로 진격했다. 총공격이 성공할 가능성을 보여 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9월 21일 인민군 13사단 작전참모 이학구 총좌가 투항했다. 사단 병력이 겨우 1500명이었고 사단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어 지휘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대가 거의 해체된 상태였다. 


9월 21일부터 낙동강 방어선은 급속도로 무너 졌다. 인민군들 간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당황한 인민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 하기 시작했다. 9월 22일부터는 미군 정찰기가 후퇴하는 인민군의 무리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9월 23일 낙동강 전선 인민군에게 전면적인 후퇴 명령이 하달되었다. 맥 아터의 샌드위치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미군 777 특수 부대는 9월 26일 오전 오산에서 인천 상륙 부대인 미군 31 연대와 만날 수 있었다. (한국 국방안보 포럼: 다시 쓰는 6.25 전쟁; 반격)


                        국민일보

예상보다 큰 인민군의 저항이 있었으나, 9월 28일 미군은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9월 29일 정오 국회의사당에 이승만과 맥 아터가 들어왔다. 한국 고위 관리들과 미군 장성이 모여 있었다. 단상에는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와 미군 고위 장성들, 오스트리아 태생의 이 대통령 부인이 앉자 있었다. 


맥 아터는 "대통령 님, 신의 자비로운 은혜로 인류의 희망과 열망의 기준인 유엔의 뜻에 따라 싸워서 고도 서울을 해방 시켰습니다...... 유엔 지휘부를 대신하여 당신 정부의 그 자리(대통령 직)를 다시 찾아 들이니 헌법에서 규정한 당신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내가 어떻게 나 자신과 한국 국민의 영원한 감사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This Kind of War에서).  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는 아직도 포탄 맞은 건물들이 타고 있었다.  거만한 맥 아터와 불쌍한 이승만의 대화였다. 제 발로 설 수 없었던 나라의 일면이었다. 이 식을 서울 반납식이라고 할까 아니면 서울 수복 환영식이라고 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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