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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an 09. 2021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제3부 한국전쟁

제12장 유엔군과 국군  38선을 건너고 중공군 압록강 건너다.

  

                                                 Panmunjom(DMZ)                                                                                                                                                                         


명줄이었던 미군이 없는 사이에 엉겁결에 당한 국군은 단 며칠 사이에 괴멸되었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 전투를 겪으면서 단단해졌다. 미군의 보급도 강화되어 모든 장비와 무기를 갖춘 제법 군대 다운 모습이 되어 갔다. 아시아 사람들을 구크(gook)라고 얕보며  인민군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덤벼든 미군은 어이없이 패퇴했었다. 전투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전장에 투입되었던 그들은 자신의 생명도 보호할 줄 모르는 아둔한 군인들이었으나, 낙동강 전선에서 단단 해 졌다.


기세 등등하던 인민군은 한 달 반만의 낙동강 전투에서 무참히 패했다. 미국의 막강한 해군, 공군력과 화력 그리고 풍부한 보급은 인민군을 압도했다. 믿었던 소련과 중공은 미군의 공격력에 대항할 만 큼 인민군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이 미국과의 전면 대결을 불사하고 적화통일을 이룩하려 할리가 없었다. 


인천 상륙으로 들어온 미 해병대 10군과 이에 합류한 다른 사단들이 서울을 점령했다. 이들은  북쪽에서,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퇴각하는 인민군의 퇴로를 막고,  남쪽에서는 미 8군이 인민군을 밀어붙여서 그들을 진퇴양난의 형국으로 몰아넣었다.  10만 대군이었던 인민군은 겨우 25,000명이 북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뻘찌산이 되었다. 전쟁 초기에 약 10만 명이었던 국군이 겨우  20,000명이 살아남았던 것과 비슷하다. 9월 한 달 동안에 인민군 13만 5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중앙 일보: 채인덕의 글로벌 줌업)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인민군은 북으로 도주하면서 한국 경찰, 공무원과 군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인공 정부와 협조했던 사람들은 인민군과 같이 북으로 갔다. 더러는 강제로 끌려간 인사들도 있었다. 서울로 들어온 한국 정부는 인민군에게 협조했던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처형했다. 


3개월 동안 서울을 점령 한 인민군은 민초들을 선무하기보다는 착취했다. 집에 가지고 있는 쌀을 모두 강제로 거두어 갔다. 나중에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고 하고 빼앗아 갔으나 거짓말이었다. 인민군들이 다 나누어 먹고 시민들에게는 한 톨도 돌아오지 않았다. 쌀 값이 급등하고 시민들은 서울 교외 농촌으로 나가서 혈안이 되어 쌀을 구 했다. 많은 시민들이 풀을 끓여 먹고 3개월을 지탱했다. 젊은 남자들만 보이면 의용군으로 잡아갔다. 인민군이 되어 전장에 나가서 국군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다락방에 숨어서 3개월을 지낸 젊은이들이 많았다. 


해방 후 공산주의를 선망했던 국민감정은 3개월이 지나면서 반공으로 변해 갔다. 인민군이 자초한 결과였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무서운 사상임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교한 정치인들은 때 묻은 항일 감정 외에 또 하나의 좋은 무기를 발견했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국민감정을 이용하여 정적에게 빨갱이 누명을 씨 우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내가 나서부터 박근혜 정권까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친일파와 빨갱이 논쟁으로 유권자들을 농락하는 정치판은 내 70 평생을 우려먹고 막 막을 내리고 있다. 문재인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마지막으로.


인민공화국의 방어 능력은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공이 주인 었던 38 이북은 빈집이나 마찬 가지였다. 유엔군이 북으로 들어가서 점령하기 만 하면 인공은 지구 상에서 사라지고 한반도는 대한민국으로 통일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나 중공이 문제였다. 9월 27일 워싱톤 수뇌부는 중공과 소련이 파병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인공을 점령하고 이승만 정부로 하여금 한반도를 통일하게 할 것을 맥 아터에게 지시했다. 이틀 후인 9월 29일 George C. Marshall 장군과 신임 Louis Johnson 국방장관은 트루만 대통령의 허가를 받고 맥 아터에게 38선을 넘어서 북진해도 좋다는 전통을 보냈다. (This Kind of war에서)


9월 29일 서울 환도식에 참석했던 이승만은 대구에 내려와서 군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다. 정일권 국군 참모 총장에게 북진을 명령했다. 유엔군 하에 있던 국군은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이 없으면 군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정일권에게 국군 북진을 명령했고 정일권은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서 10월 1일 38선을 넘어서 북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오마이 뉴스) *유엔군 사령관(미군 지휘관이 맡도록 되어 있음)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고 국군은 유엔군 지휘 하에 있었다. 국군통수권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지는 것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지금도 국군의 전시 작전권은 주한 미군 사령관이 가지나 국군 통수권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남한이 얼마나 미국에 예속되어 있는 가를 말해 주는 현실이다. 


오마이 뉴스는 이승만이 12시간 전에 이미 미정부가 북진을 결정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승만의 자주적인 결정은 쇼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시차가 문제이다. 미정부의 북진 결정이 내려진 미국의 9월 29일은 한국 시간 9월 30일 밤이고 이승만이 북진 명령을 내린 한국의 9월 29일은 미국의 9월 28일 밤이다. 


한국전쟁을 기술할 때 어디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 시간, 미국에서 일어난 일은 미국 시간일 가능성이 많다. 이승만은 이미 9월 20일에 유엔군의 결정에 상관없이 북진하겠다고 천명 한 바 있다. 이승만을 비롯한 남북한 전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오죽했을 까? 그의 북진 명령은 너무나 당연 한 행보였다. 


10월 1일 국군 3사단은 동부 전선에서 유엔군에 앞서 38선을 넘었다. 한국 정부가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정 한 배경이다.  유엔군은 10월 7일 38선 넘어 개성으로 쳐들어 갔다. 워커 장군은 한국 내의 작전 지휘권을 자신이 가지는 줄 알았으나 맥 아터는 자신이 직접 총지휘를 하고 워커의 미 8군은 서쪽으로,  일몬드 장군 휘하의  미 해병 10군단은 동쪽으로 북상하게 했다. 8군은 개성-평양-청천강-압록강으로 이어 지고 10군단은 원산-장진호 쪽으로 진격했다. 북한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도로는 평양과 원산을 잇는 도로 밖에 없었다. 북쪽으로 올라 가면 험한 산악 지대여서 동서 교통뿐만 아니라 통신도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8군과 10군단은 서로 통신과 교통이 두절된 상태가 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인천 상륙-서울수복 이후의 맥 아터의 판단은 실수의 연속이었다. 38선을 넘은 것부터 유엔군을 둘로 나누어 북진하게 한 것, 중공군의 북한 내 진입에 대한 판단까지 결코 희대의 명장 다운 행보가 아니었다. 


인민군은 이미 조직적인 전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김일성이 끝까지 싸우라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외치고 싸우지 않고 도망가는 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걸어 들어가다시피 했다. 백선엽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은 10월 20일 평양에 입성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10월30일 이승만은 평양에서 평양수복 환영 연설을 했다. 


인공의 멸망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전황이었으나 미국 정부는 중공의 개입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미 합참의장 오마르 브레들리 장군은 만주에 중공군 3십만 명 이 있고 그중 이십만 명이 압록강변에 배치되어 있으며 6만 명 정도가 북한에 들어와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 아터는 이를 부인하고 있었고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더라도 공군이 없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만약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 집중적인 폭격으로 다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아무도 감히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트루만은 만약 중공이 개입하면 또 한 번 세계대전을 치루어야 하는 어려운 국면을 맞이 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그는 맥 아터에게 귀국하여 면담할 것을 지시했으나 전쟁 중이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10월 15일 일요일, 태평양 상의 조그마한 섬 웨이크 아일란드에서 둘은 만났다.  중공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아서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개입하더라도 미국의 군사력이 능이 제압할 수 있다는 맥 아터의 기존의 입장을 확인했을 뿐, 트루만의 세계대전 방지에 대한 굳은 의지가 맥 아터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1840년 아편전쟁은 중국 백 년 수모의 시작이었다. 동양 유교 문화 종말의 시작이고 서양문화 지배의 신호였다. 영국은 자국 내에서 불법인 아편을 중국에 강제로 팔아먹었다. 차, 비단, 도자기 등의 수입으로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꾸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일본과 서양 제국들은 맹수가 사슴고기 뜯어 먹 듯 중국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 갔다. 그리고 각종 이권을 각국이 편리한 대로 차지했다. 그리스도교를 앞세운 서양인들에게 속고 또 속 았다. 그들은 나라를 망처 먹은 유교를 버렸다. 그리고 서양사람들과 예수교를 믿지 않았다. 믿을 만한 것은 소련과 공산주의였다. 그래도 중국은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 일본의 맹렬한 공격을 견뎌 냈다. 그러나 정부의 형태는 청 나라, 손문의 신해혁명, 원 세계 군사 독제, 군벌 시대, 장개석의 중화민국으로 변화했다.  마침내 모택통의 중국 인민공화국으로 결판이 났다. 1949년 10월 1일이었다. 


1950년 10월은 새나라를 세운 지 겨우 일 년 만이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 중국 내전을 겪은 중국은 남의 나라 전쟁에 개입할 힘이 없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나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른 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상대로 해야 했다. 그러나 골수에 사무친 서양사람들에 대한 원한을 갚을 절호의 기회였다. 


중공 파병의 배경

미군이 인천 상륙을 감행하던 날(9월 15일),  중공은 파병 준비를 시작했다. 10월 14일에는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서 인공 땅에 들어와 있었다. 중공이 국내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감행한 배경은 무엇일까? 중공군 파병의 배경은 한반도 분단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 이면서,  남한 정부와 국민들이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데 꼭 알아야 할 역사적인 지식이기도 하다.


만약 인공이 망하고 한반도를 친미 이승만 정권이 지배하게 된다면 중공은 압록강을 경계로 미군과 직접 대하게 된다. 중공은 막대한 국방비를 들여서 긴 압록강 경계를 방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만주의 자원과 중공업을 보호하기 힘들다. 대만에 아직 장개석(중화민국)이 살아 있어서 중공은 대만을 정벌해야 하는 데, 군사력이 만주 국경에 쏠리면 대만을 공격할 여력이 없어진다.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미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 중국민들이 그들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반동분자의 책동이 증가할 것이다. 외국과의 전쟁은 국내 여론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다.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그들의 침공을 방어한다고 하면 중국민의 독립심을 강하게 하고 공산당의 인기를 상승시켜서 반동분자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 


김일성은 중국 내전 때 모택통의 요구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마오는 이웃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 데 방관할 수 없다고 했다.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었다. 인공과 중공은 역사적으로 끈끈한 동양적인 의리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서로 혈맹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이상. from Interstate - J. of International Affairs Vol. 2014/2015 NO.1; Explaining China's Intervention in the Korean War in 1950)


가장 근본적인 파병 이유는 북한은 중공과 미국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택통은 북한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중공군의 움직임

머우 제동은 1950년 10월 1일, 중국사람들은 외국의 공격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10월 3일 저우 엔 라이는 인도 대사 사다르 파니카를 통해서 만약 미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진하면 중공은 인공을 돕기 위해서 파병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 만이 38선을 넘어오면 우리는 군대를 보내지 않겠다고 미국 정부와 유엔에게 알렸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극동사령부는 협박이지 중공이 파병할 가능 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1950년 6월, 중공군 총사령관 린 비아 오는 600,000 대군을 만주-북한 국경 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미군이 개성에서 38선을 넘은 지 일주일 후인 10월 13, 14일 경에 중공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서 인공 내로 들어왔다. 10월 15일에 투루만과 맥 아터가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만나서 중공군 개입에 대해서 왈가 왈 부하고 있을 때, 중공군 120,000이 벌써 북한 영토에 들어와 있었다.


11월 중순에는 중공군 180,000이 청천강 미 8군 앞에, 120,000이 장진호 해병 10군단 전면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맥 아터는 중공군 사단 또는 군단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면 미 공군이 이를 포착하는 것은 당연했고 집중 폭격으로 이들을 섬멸할 수 있다고 장담해 왔다. 그러나 중공군은 미공군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미 육군의 후미까지 들어와서 포위하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공군이 아니었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군이 점점 높고 험한 산골로 들어오면서 바퀴 달린 중장비 이동이 어려워지고,  좁은 길 때문에 부대가 일열로 늘어서고, 대대, 분대가 서로 고립되어 연락이 잘 안 되는 상황이 점점 많아졌다. 대포, 탱크 등 우세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미군에게는 점점 불리해지는 지형이었다. 병사들은 산악지대 행군에 능숙하지 않아서 무기와 식량까지 버려서 몸을 가볍게 하려고 했다. 철모, 총검을 버리고 행군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미군 장성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중공군은 엉터리 군대가 아니었다. 당시 백인들이 중국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은 요지음의 50배 100배였다. 전투 능력이 없는 중국 농부들을 모아 만든 군대 정도로 생각했다. 중공군은 그와 정 반대였다.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 일본군과 싸우면서 실전 경험이 줄충 한 군인 들이었다. 더구나 무기도 변변한 것 없이 식량도 충분하지 않은 악 조건에 단련된 백전노장 들이었다. 산악 지대 행군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만주 안퉁에서 북한 내 진지까지 300마일을 단18일만에 산 능선을 타고 들어 왔다. 밤 9시부터 새벽 3시 까지 만 움직였다. 그 외의 시간에는 모두 정지했다. 위반하면 즉석에서 총살이었다. 행군하는 동안에는 군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능선을 따라 남하하고 기계화된 유엔군은 골짜기를 따라서 북진했다. 중공군은 올라가는 미군을 보고 있었으 나 미군은 중공군이 내려가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10월 25일, 국군 1사단은 운산에서 수상한 자를 포로로 잡았다. 북쪽 중국말을 하는 중국인이었다. 바로 미 8군에 넘겼다. 이와 비슷한 중국인 약 100명가량이 추수 감사절 전까지 잡혔다. 미군은 인민군이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사람들로 부족한 병력을 채우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은 미군을 안심시키기 위한 중공군의 계략이었다. 미군 측은 중공군 개입을 부정하는 입장이어서 그들이 중공군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10월 중순 이후 여기저기서 소규모의 충돌이 일어나더니 10월 말경에 중공군이 청천강 지역 해서 제법 큰 규모로 공격해 들어왔다. 장진호 근처에서도 해병 제1사단이 중공군과 교전을 했다. 일주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더니 11월 둘째 주부터는 갑자기 중공군이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조용했다.  좀 위험한 지역까지 순찰을 해봐도 중공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 졌다.  (This Kind of War 에서)


11월 말이 가까워 지자 미군은 중공군이 대규모로 북한 땅에 들어와 있지 않다고 안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넘는 순간부터 린 비아오의 손바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맥 아터의 패배였다. 


맥아 터는 추수감사절 다음날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내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총공격을 명령했다. 유명한 크리스마스 공격이었다. 김일성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을 제압하고 대한민국을 멸망시킬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맥아터는 청천강과 장진호 전선에서 중공군을 제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없애고 한반도를  대한민국으로 통일하려고 했다. 그러나 맥아터의 판단은 김일성의 그것 못지 않게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낙동강에서는 그의 적이 인민군이었으나 청천강과 장진호에서는 중공이었다. 이제 전쟁은 인공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군과 중공의 전쟁으로 변했다. 중공은 인공보다 훨씬 강한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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