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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Dec 26.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부 한국전쟁

제10장 낙동강 전투(Battle of Pusan Perimeter)


                         Walton Harris Walker


나는 육이오 사변이 나던 해에 만 4살이었다. 전주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 부산으로 갔다. 외할아버지가 부산에서 한 약방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32세, 어머니는 28세였다. 내 동생은 이제 겨우 돌을 지났을 것이다. 아버지가 등에 짐을 지고 막 역에 들어오는 기차에 뛰어오르는 장면, 우리 식구가 화장실을 차지하고 갔던 일들이 희미하게 생각난다. 열차 창 밖으로 오줌을 누었는 데 머리에 이고 있는 수박장수 바구니에 오줌이 떨어지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물론 그때 나이을 감안 하면 나중에 어른들이 하던 이야기를 기억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길가에 있는 한약방에 앉자 있으면 지에므시 트럭 가는 소리가 부르릉하고 크게 들려온다. 한약방 약 설합에서 감초와 계피를 훔쳐 먹다가 들켜서 할아버지에게 혼나고 외삼촌들에게 놀림을 받던 일이 생각난다. 외할머니 손을 잡고 전차길 있는 길을 건너 국제시장 가던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부산이 이와 같이 평화로운 가운데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한 부산 접경지역(교두보) 전투는 유엔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인민군이 부산 접경지역만 점령하면 적화통일을 완수하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지구 상에서 사라진다.  양측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다 같은 민족이 아니었던가?


1950년 8월 4일부터 유엔군과 국군은  자니 워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월튼 워커 중장 지휘 하에 들어갔다. 맥 아터와 같은 쇼맨쉽이 없는 과묵하고 용감한 명장이었다. 그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인민군의 공격을 훌륭하게 막아 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깝께도 1950년 12월 23일, 그는 서울 도봉구에서 항상 하던 버릇대로 지프차에 서서 타고 가던 중 반대 방향으로 달리던 국군 소속 웨판스 캐리어 트력과 충돌하여 차에서 떨어 저서 사망했다. 그는 맥 아터 못지않게 한국전쟁에 크게 공헌했다. 워커힐 호텔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에게 갚을 수 없는 빚를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산 교두보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남북 100 마일, 태백산맥의 산악 지대를 따라 구축한 동서 방어선이 50 마일이었다. 동서 방어선은 국군이 남북으로 구축된 서부 방어선은 미군이 주력 부대였다. 동쪽은 바다였고 미군이 이미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워커 장군은 북쪽은 산악 지대이기 때문에 인민군이 산악 행군에 지처 있었을 것이고 중장비 이동이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주력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인민군은 낙동강 돌출부에서 밀양으로 통하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 지역의 방어는 미군 24사단과 25사단이 맡고 있었다. 


또 하나의 인민군 공격 지점은 상주 대구 코리도 였다. 미군 25사단 27 연대의 지원을 받은 국군 1사단이 다부동에서 이 통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미 8군 사령부와 남한 정부가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 한 방어 지점이었다.


 워커 장군은  우선 일본에 있는 3개 사단을 투입하고 풍비박산이 난 국군을 재 정비했다. 부산으로 각국에서 유엔군과 미군이 들어오고 군수 물자와 무기가 끊임없이 도착했다. 


전투능력이 부족하고 싸울 의욕이 없는 미군은 한 달여 동안의 전투에서 많은 무기를 잃었고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전쟁에 대한 불만은 커지기만 했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능력조차도 없을 정도로 전투능력이 없던 미군은 점점 군인 다워 지기 시작했다. 한편 투루만은 38 이남 영토 회복을 전쟁의 목표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 국민 전쟁 동원령을 내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의 전쟁터로 내몰렸다. 전쟁 특수로 미국 경제는 붐을 이루었다.


낙동강 돌출부 전투(The Battle of Nakdong Bulge)


8월 5일부터 19일까지 경남 창녕군 영산면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인민군 제4사단은 서울을 점령한 정예 부대이다. 별명이 아예 서울 사단이다. 사단장은 소좌(소장) 이권무였다. 그는 영웅 칭호를 가지고 있는 북한 최고의 명장이었다. 그는 모택동 군대였던 8 로군에 소속되어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고 중국 내전에서 장개석 군대와 싸웠다.  소련 장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4사단 병력은 국공내전에서 맹 활략을 했던 병사들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전투 능력이 미군과 국군을 훨씬 능가했다. 이들의 목표는 8월 15일까지 남한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소좌는 7000명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낙동강 건너편에는 미군 24사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전 전투에서 인민군 포로가 된 딘 소장을 승계한 처취(Church) 소장이 지휘관이었다. 그는 인민군이 8월 중순쯤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대전 전투에서 많은 손상을 입은 24사단은 약 40%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8월 5일 자정에  4사단 16 연대  인민군은 어깨 높이밖에 차지 않는 강물을 무기와 옷을 벗어 머리 위로 치켜들고 걸어서 건너왔다. 미군은 이곳에 보초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일부는 뗏목을 만들어 도하했다. 중장비는 물속 다리를 만들어서 강을 건너게 했다. 가마니에 모래와 돌을 넣어서 다리가 물에 잠기게 했기 때문에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급습을 당한 미군은 경남 영산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크로버 리프 힐과 오 봉니 능선을 내주 었다. 영산이 인민군 손에 들어가면 밀양이 위험 해진다. 밀양은 대구의 후방이고 부산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곳이다. 강을 건너온 인민군 대포는 영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처취 소장은 곧 반격을 명령했다. 제2 보병사단 병력이 투입되었다. 양측은 열흘 동안 필사적으로 싸웠다. 


Frank E. Munoz 소위는 애리조나주 투산이 고향이다. 그는 워싱톤주 포트 루이스에 주둔하고 있는 9 보병연대 중장비 부대(Heavy Weapons Company) 소대장이었다. 뮤노즈는 1950년 7월 첫 주에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깡마른 보통사람 체격의 타프 하게 보이는 28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진주만 이 일본군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직업군인이 되기를 결심했다. 자신이 군인이고 더구나 장교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다.  


타코마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 거의 한 달이 걸려서 7월 31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배안에서 한국에 대한 사전교육이나 한국전쟁에 대한 부리핑은 전혀 없었다.  라디오에서 들은 한국전쟁 뉴스와 신문에서 본  한국지도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비지식의 전부였다. 2차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부대장은 무기관리를 잘하라고 당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다고.  


부산에 도착하니 도대체 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부둣가는 시끌벅적했다. 많은 장비들이 야적장에 하늘 높이 쌓여 있었다. 곧바로 기차를 타고 밀양으로 가서 외곽 높은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24사단과 제1기갑 사단 소속 부대에 연락을 취했다. 


여기서 그들은 참혹한 전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두 손을 등 뒤에 묶어 놓고 꿇어 앉힌 체로 머리 뒤에 총을 쏘아 죽인다는 이야기, 인민군은 밤중에만 공격하고,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피난민 속에 섞여 있다가 갑자기 총을 쏘아 댄다는 이야기는 장병들을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와서 돌출부를 공격하기 시작한 지 닷샛만에 뮤노즈 부대에게 방어망 뚫린 구멍을 막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국의 팔월 더위는 미국 북서부의 서늘한 날씨에 익숙한 뮤노즈 부대 장병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날씨였다. 전투능력이 떨어진 것은 물론 더러는 미리 지쳐서 전투에 참가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뮤노즈는 직업군인답게 부하들을 독려하여 잘 싸웠다. 밀고 밀치는 치열한 전투였다. 주위의 대대들이 무너지고 지휘하던 장교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면 뮤노즈가 그들 부하 장병들을 지휘했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5년 동안 편안하게 지낸 장병들은 전투능력이 매우 좋지 않아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병력이 점점 감소했다. 남아 있는 병사들도 싸울 의욕이 없었다. 


언덕 뒤 쪽에 참호를 파고 병사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를 안았다. 적군에게 총을 쏘라고 해도 그냥 참호 속에 숨어 있기만 했다.  뮤노즈는 부하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다. 그는 참호를 지나가면서 나라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요지의 훈시를 하며 왔다 갔다 했다. 한 병사가  "여 보시오, 집에서 만 마일 떨어진 나라에서 싸우면서 어떻게 나라를 위해서 싸운 다고 할 수 있겠소?" 하고 반분했다. 그렇지만 뮤노즈는 참호 하나하나를 방분하며 최선을 다해서 병사들을 설득했다.  뮤노즈는 미국 정부의 녹을 먹는 훌륭한 장교였다. 


뮤노즈가 소속되어 있는 9 연대와 24사단은 전력을 다해서 싸웠지만 강을 건너온 인민군 4사단을 물러나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방어선을 겨우 유지할 뿐이었다.  밀양이 함락되면 대구와 부산이 위험해진다. 워커 중장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워커는 해병대를 동원하기로 결심하고 맥 아터에게 해병대 파견을 요청했다. 미 해병대는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해서 이미 한국에 와 있었다. 7월부터 계획했던 상륙 작전은 차일피일 미루어 가면서 적당한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17일 워커 중장은 5,000명의 미 해병대에게 낙동강을 건너온 인민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미군과 유엔군이 전투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란한 자경에 처해 있는 만큼 인민군 4사단도 더 이상 진격하기가 힘든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신병이 도착했다. 그들은 훈련도 받지 않은 남한 농촌 청년들이었다. 인민군은 그들에게 줄 무기도 없었다. 이들의 40%는 기회를 보아 도망갔다. 도망가지 않고 부대에 남아있는 시람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고 전투에 노출되면 탈영하기 때문에 참호 파기, 무기 운반, 나무베기 등등 노동일을 시켰다. 


미군의 폭격은 인민군의 숨통을 조였다. 먹을 것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총알 등 무기가 부족했다.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무거운 무기들은 더욱 보충하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인민군의 사기는 아직도 높았다.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그들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퇴각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평화시대 군대 정책으로 훈련을 등한시 한 일반 군대와는 달리 해병대는 전시와 다름없는 훈련을 받았다. 일반 군대 가 의무적으로 끌려온  징병으로 만들어졌던 반면에 해병대는 지원하는 자를 골라서 훈련시킨 정예 부대였다.  마산을 출발한 미 해병대는 밀양에 집결하여 돌출부 쪽으로 진격했다. 무기와 식량이 부족하고 열흘 동안의 전투에 지친 인민군은 잘 훈련된 힘에 넘치는 미 해병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8월 18일 오후부터, 인민군은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8월 19일 오후에 미군 패트롤은 낙동강 동쪽에서 한 명의 인민군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전투 시작할 무렵 7천 명이었던 인민군 4사단은 겨우 3000명이 살아서 도망갔다. 미군은 1200구의 인민군 시체를 매장해야 했다. 

인공의 영웅 이권무가 이끄는 서울 사단은 궤멸되었고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미 해병대의 숨은 공적이었다. 


다부동 전투


서부전선의 한국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는 피해가 훨씬 적었다. 첫 6주 동안에 한국군 약 7만 명이 사망했다. 미군 사망자는 약 6000명이었다. 미군에 비하면 국군은 비교적 잘 싸웠다. 아무래도 제 나라 전쟁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본다. 인민군 사망자는 3 만내지 6만으로 추정된다. 거의가 국군이 해낸 성과라고 한다. 한국전쟁은 국군이 인력을 담당하고 미국이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하여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월 초에 낙동강 방어선이 편성되었지만 방어지역이 너무 넓어서 실직적으로 방어 하가 힘들었다. 8월 11일 육군본부는 축소된 방어선인 303 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국군을 재 배치했다. 국군 1사단은 12일 밤에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은 좌로는 328 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능선, 우로는 가산과 팔공산에서 뻗는 고지들로 둘러 쌓여 있다. 이 지역은 대구로 통하는 관문이어서 전략상 매우 중요했다.


인민군은 8월 15일부터 총공격을 개시했다. 양측이 전력을 다해서 싸웠으나 국군이 밀리는 편이었다. 미군은 원군을 파견할 만큼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대안으로 B-29 98대를 동원하여 융단 폭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8월 16일 다부동 서측 466 고지를 공격해서 국군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미군 25사단 27 연대가 투입되었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 침투한 인민군이 대구역 부근에 박격포를 발사 대구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대구에 있던 남한 정부는 이날 부산으로 이동했다. 1사단과 미군 27 연대는 합동 작전으로 인민군의 공격을 대체로 방어하고 있었으나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미군 3사단 23 연대와 국군 8사단 10 연대가 추가되었다. 


국군은 매일 발생하는 600-700명의 전사자를 보충해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단기 훈련을 받은 학생들을 전장에 내보냈다. 이를 학도병이라고 한다. 나이 든 분들은 군 노무자로 전쟁을 도왔다. 대대에 50-60명이 배치되어 전투원의 식사, 탄약 등 기타 보급품을 날랐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산악지대에서 지게가 안성맞춤이었다. 

미군들은 지게를 처음 보고 그 효율성에 감탄했다. 지게 모양과 비슷한 "K"부대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8월 20일 밤에 인민군은 갑자기 다부동지역에 집중되었던 병력 배치를 주위 전선으로 일부 옮겼다. 따라서 8월 21일부터는 전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이날 밤 인민군과 미군은 처음으로 전차전을 전개했다. 다부동 계곡에서 서로 쏘아대는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어둠을 뚫고 불꽃을 튀기며 날아갔다. 언덕에서 계곡을 내려다 보면마치 볼링공이 핀을 향해서 날아가는 모양을 상상하게 해서 Bowling Alley 전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이날 밤 인민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정복욱 중좌가 작전지도를 가지고 귀순했다. 적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국군은 유학산을 탈환했다. 23일 이후 국군 1사단이 주 저항선을 안정시키자  미 27 연대는 마산으로 복귀했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은 다부동 근처에서 인민군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내어 대구 방어에 성공했다. 역사상 최초의 한미 연합 작전의 성공이었고 그동안 국군을 믿지 못했던 미군은 국군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 하기 시작했다. 양군의 신뢰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다부동 전투

“내가 선두에 설 테니 후퇴하면 나를 쏴라”

국군 1 사단장 시절의 백선엽 장군.

 

다부동 전투에서 한미 양국 군에게 서로의 신뢰를 깊이 심어 준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1950년 8월 21일 아침, 반격을 시작하기로 돼 있었는데 적이 먼저 공격을 해 왔다. 그때 11 연대 1대대 병력이 벌써 적군에게 쫓겨 후퇴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11 연대와 인접해 있던 미 27 연대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미 8군 사령부에 “한국군이 후퇴해 퇴로가 차단당하게 됐다. 늦기 전에 우리도 철수하겠다”라고 보고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잠시 후 미 8군 사령부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 왔다. “도대체 한국군은 싸울 의지가 있는 군대냐”는 질책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나는 즉시 지프를 몰고 11 연대 전방으로 나갔다. 보고는 사실이었다. 11 연대 병사들은 축 처진 모습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김재명 1대 대장을 불러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라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대대장인 그도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병사들이 밤낮없이 계속되는 전투에 지쳤습니다. 거기다 보급이 끊겨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었습니다.” 지치고 허기진 병사들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앉아라.” 아무리 다급해도 병사들의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내 말 잘 들어라.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도 후퇴할 곳이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후퇴하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와 같이 싸우는 미군들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먼저 후퇴하다니, 이 무슨 꼴인가?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나는 권총을 세워 들며 돌격명령을 내리고 장병들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우렁차게 함성을 지르며 내 뒤를 따랐다. 한번 기세가 오른 병사들은 거짓말처럼 용감했다. 어렵지 않게 고지를 탈환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이켈리스 대령은 나중에 내게 “미안하게 됐다”라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사단장이 직접 앞장서는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고 말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지난 8월 17일(2020년) 자 조선일보는 김원웅 광복회장의 "백선엽 사형감, 다부동 전투는 미군이 다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다부동 전투가 일어난 지 70년이 지났다. 한국전쟁에서 국군 최고의 명장을 폄하하는 광복회장의 말에 아현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 보수세력과 기득권층의 약점인 친일 경력을 공격하여 먹고사는 남한 진보세력의 앞 잡이 다운 선전이다. 집권세력이 그러라고 광복회장 자리를 주었을 것이다. 국군묘지에 묻혀 있는 그의 시신을 옮기라는 아우성에 부응하는 의견이기도 하다. 


백선엽은 평안남도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이다.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 특설대 장교로 근무했다.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이 조선인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백선엽의 적은 팔로군, 동북 항일연군, 조선 의용대였다. 항일 무장 세력은 인민군이 되었고 이들을 토벌하던 사람들은 국군이 되었다. 시카고 대학 한국 통 역사학과장 부루스 커밍스의 Korean War는  만주에서 서로 싸우던 장군들이 어떻게 한국전쟁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백선엽은 그의 성장 시기에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서 우수한 인재였다.  당시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간교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앞세워서 만주인, 중국인, 한국인들의 항일세력을 토벌했다. 이것이 백선엽에 주어진 임무였다. 해방 후 그는 일본에게서 배운 세계 일류의 군사지식을 대한민국을 공산 세력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십분 사용했다. 게릴라전에 능한 팔로군 소탕에서 얻어진 경험으로 빨치산 소탕에 큰 공을 세웠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사람이 일본에게 충성한 것은 조선 지배층의 부패로 인한 국력의 약화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개개인의 행동을 지적하여 역적 취급하는 것은 나라 안의 분열을 조장하여 외세 특히 일본을 돕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인민군 9월 총공격


8월 한 달 동안 양측이 필살의 전투를 벌이는 동안 미군과 유엔군은 부산항을 통해서 병력, 무기, 군수 물자가 속속 들어왔다. 한편 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과 해군은 하루 평균 40대가량이 한반도 전역을 폭격했다. 인민군의 보급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8월 30일 경에는 인민군 병력이 10만 명이 체 안되었던 반면에 유엔군은 무려 18만이 되었다. 더구나 무기와 화력 그리고 보급은 비교도 안될 만큼 우세 해졌다. 인민군의 30%는 남한에서 강제로 끌려온 병력이었다. 군복도 제대로 보급이 안되어 미군 군복을 입고 있는 병사도 많았다. 하루 한 끼나 두 끼의 주먹밥을 먹고 싸워야 했다. 


경북 금천에 있는 인민군 전방 총사령관은 최용건이었다. 그 밑에는 1 군단장 김웅, 대구 동쪽 방어는 김무종 소좌가 맡고 있었다. 김책이 중앙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모두 팔로군 출신이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9월 1일 총공격을 계획했다. 


2012년 6월 20일 자 조선일보는 "인민군 쳐들어 온다"알린 죄...  62년 만에 재심이라는 제하에 홍윤희 씨의 억울한 사정을 보도했다. 그는 사변 전에 국군 중사로서 육본에 근무하고 있었다. 사변이 터지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살기 위해서 인민군이 되었다. 그는 경북 군위 근처의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8월 31일 그는 인민군 장교들이 9월 1일 총공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9월 1일 새벽 그는 인민군을 탈출해서 국군에게 이 정보를 알렸다. 이 정보는 미군에게 보고되어 미군 작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9월 11일 국군 헌병대는 그를 체포 했다. 군사볍원은 무기장역을 선고했다. 1955년 사면 석방되었다. 빨갱이 딱지가 붙은 그에게 대한민국은 살기가 힘든 나라였다. 다행히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한 노력을 한 결과 62년 만에 사면되었다. 아직 어느 쪽에 붙어야 살아남을지 모르던 시절에 붙은 빨갱이 딱지는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고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민초들은 "빨갱이 공포"속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선엽 장군이 일깨워 주는 친일과 홍윤희 씨가 알려준 친공은 대한민국 국민의 억울한 원죄였다. 


인민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여러 곳에서 미군이 밀렸다. 9월 첫 이주 동안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중 가장 중요하고 치열 한 전투는 낙동강 돌출부에서의 전투였다. 8월에 인민군 4사단의 공격을 미 해병대가 격파한 지역이다. 


미군 제9보병 사단 맞은편에는 인민군 박교상 장군의 제9사단이 있었다. 8월 31일 저녁 박교삼은 부하 장병들에게 적의 옆구리를 찔러서 밀양과 삼랑진을 점령하여 대구와 부산 사이의 미 8군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워커는 전장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부하들에게 "후퇴는 없다,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라고 명령했다. 별로 인기 있는 명령은 아니었다. 그래도 미군은 밀렸다. 워커는 마산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를 다시 돌출부 전투에 투입했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보충병이 시급했다.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본국에서 잘박한 보층병을 제때 보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 8군은 한국인 청년들을 미군부대에 보충해 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적인 차이가 너무나 컸다. 미군은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군사 훈련도 부족했다. 전투 대신 노동 일에 배치했다. Korean Augmentation United States Army(KATUSA)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민군은 부족한 무기, 식량, 군수 물자에도 불구하고 국군과 유엔군에 많은 피해를 주면서 9월 중순까지 공격을 계속했지만 중과 부적이었다. 9월 12일 대구 전투를 기점으로 인민군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9월 14일 경에는 인민군의 2/3가 남한에서 끌고 온 청년들이었다.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은 겨우 30%가 살아남아 있었다. 8월 15일까지 적화통일을 이루려는 김일성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인민군 이학구 대좌는 2군단 작전참모로 춘천 지역 공격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중 가장 전쟁준비에 충실했던 김종오 대령의 6사단이 춘천 지역 방어를 맡고 있었다. 예상을 뒤 없고 2군단은 김종오 대령에게 크게 패했다. 이학구는 죄천되어 13사단 참모장으로 대구 전투에 참여했다. 9월 1일 총공격이 실패하고 9월 16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 한 직후 유엔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퇴각하던 중 인민군 13 사단장 최용진은 이학구의 작전지휘가 틀려 먹었다고 기압을 주었다. 화가 난  이학구는 9월 20일 최용진에게 권총을 쏘고 부하 한 명을 대리고 미군에게 투항했다. 최용진은 팔에 권총을 맞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미군은 그를 처음에는 후대하고 인민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방송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반 포로와 마찬 가지로 거제도 수용소에 집어넣었다. 미군과 협조한 이학구는 인공을 배반한 역적이었다. 만약 그가 수용소 안에서 미군과 협조할 려고 들면 다른 포로들이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인민군 포로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그는 수용소 안에서 항미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그는 수용소장 미 육군 도드 준장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포로교환 과정에서 남한으로 귀환할 것을 원했으나 미군은 이를 거절하고 대전 전투에서 인민군 포로가 된 미군 딘 소장과 포로 교환이 되어 인공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끝었다. 당시에 미군은 귀순자들을 일반 포로와 똑 같이 취급했으나 국군은 대부분 남한 국민으로 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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