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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Dec 13.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부 한국전쟁

제9장 임진전쟁과 한국전쟁; 분할의 시작과 끝


위키 문헌 이순신 초상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해는 1950년이다. 358년 후의 침략자는 일본 대신 인공이었다. 그러나 두 전쟁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 


조선은 외국의 칩입에 대응할 만한 군대를 중앙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약에 외적이 칩입하면 그 근처 지방의 군대가 작전지역에 모이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여 외적을 막아내는 형식의 국방이었다. 이를 제승방략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방에도 요지음으로 치면 향토 예비군 정도의 군대가 있었지 실제로 매일 근무하는 군대는 극히 소수였다. 외적 칩입 시에 군대라고 모여드는 젊은이들은 사실상 전투 능력이 없는 농부들이었다. 외국의 침략이라는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을 고려하지 않고 외적 즉 왜와 여진족의 몰출 정도에 대비한 국방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안보를 큰 나라에 의존하는 사대에서 비롯한 비굴하고 어리석은 전략이었다. 


조선 제이의 명장이라고 소문난 이 일은 한양에서 군대 모집에 실패하고 대구에 모여 있는 군대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막아 볼 요량으로 한양을 출발했다. 그러나 대구는 이미 일본군에게 함략되고,  그는 상주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겨우 60명 정도의 병력밖에 없는 그는 그 지방 농부들을 모아 모두 800여 명을 훈련시키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일과 병졸들은 싸울 생각도 못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는 도망가다가 장군의 신분을 가리기 위해서 옷을 모두 벗 어 던지고 꾀 벗은 채로 충주에 있는 신립을 찾아갔다. 조선 제일의 장수 신립은 단천가 논 밭에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대패하고 탄금대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준비하지 않은 조선 육군의 단면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 지칭하는 외적은 "왜"였다. 고려 때부터 한 반도에 출몰하던 왜적은 단순한 해적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적(해적)을 모두 소탕했다. 그리고 일본은 강력한 군대를 가진 버졌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이 침략한 것이 아니고 왜적이 출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임진년에 왜가 칩입한 난리였다. (*요지음은 임진전쟁이라고 한다.)


조선 육군이 전쟁준비를 소홀이 했던 반면에 조선 해군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은 근대국가에서 볼 수 있는 도로망이 없었다.  산속의 산책로 정도의 육로가 전부였다. 바뀌 달린 운송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발달하지 않았다. 보부상과 지게 등이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상 수송이 발달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해군을 양성해야 했다. 서해안의 왜적의 출몰을 막지 않으면 서해안에서 한강으로 통하는 수송로가 위험해진다. 


임진왜란 일 년 전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죄수사가 된 이순신은 혼신을 다해서 전쟁준비를 했다.  그리고 전쟁 직전에 거북선을 완성했다.  이순신은 10여 차례의 해전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군의 해양 보급로가 봉쇄 되었다. 원래 일본군은 육로로 한양을 점령하고 서해안 수로로 보급을 할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보급에 크게 지장을 받은 일본군은  평양성을 점령하고도 가까운 의주에 피신하고 있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을 더 이상 추격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선전하는 동안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고 명나라에서 원군 이 들어온다. 그리고 작전권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넘어간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소서행장을 추격하다가 벽제에서 혼줄이 난 후 더 이상 싸우려고 하지 않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고 협상을 선호 했다. 보급 문제에 봉착하여 전쟁을 계속하기가 힘들어진 일본군은 명이 제의한 협상에 응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도 훈련이 되어 육지에서의 전투도 점점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권률 장군은 명군의 도움 없이 행주대첩에서 승리하여 한양 탈환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358년 후 국군은 인민군에게 대패했다. 10만에 가까운 병력이 겨우 2만여 명이 되었고 그나마 패잔병을 모아서 전투에 투입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사실상 한국 정부와 국군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다. 8월 초에 완전히 국군은 유엔군 예하에 소속되었고 유엔군 사령관인 미군 장군 지휘하여 들어갔다. 낙동강 방위선의 총지휘관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었다. 


요동은  명나라 군대의 조선에 대한 전초 기지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기지에 해당한다.  전쟁 초기에 명나라는 일본과 조선이 작당하여 명을 침략하려 한다는 의심을 했다. 한양을 내주고 평양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요동에 있는 전무사 임세록이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평양성을 방분 했다. 유성룡은 그를 극진히 모시고 대동강가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지체 없이 요동으로 돌아가서 일본군 침략이 사실임을 명조 정에 알렸다. 1592년 7월 18일 요동 장수 조승훈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략했다. 


그는 평양에 일본군 규모나 방어 작전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왜적 정도로 깔 보고 돌격했다. 참패였다. 요동으로 퇴각했다. 1592년 12월, 몽골족 보 바이의 난을 평정한 군대 5만 명을 이끌고 이여송이 의주에 도착했다. 선조는 그에게 전군의 작전권을 주었다. 이여송은 즉각 평양성을 공략하여 함락에 성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이여송은 조선의 영웅이 되었다. 살아 있는 데도 공덕비와 생사당을 세워 그를 추모 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미군이 어느 정도로 도와주어야 할 것인가를 몰라서 우왕좌왕할 때 일본에 있던 맥 아터가 수원에 와서 전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지상군 파병을 건의한 것과 요동에 있던 임세록이 평양 전황을 확인한 후 파병을 결정한 것, 조승훈이 무작정 평양을 공격하여 참패한 것과 찰스 드래드 스미스 중령이 북한군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겨우 1개 대대 병력으로 수원-오산 도로변에서 북한 탱크 부대에게 괴멸된 것,  딘 장군이 대전에서 참패하여 군복을 벗어던지고 반나체가 되어 도망가다가 인민군 포로가 된 것과 이 일이  꾀 벗고 신립을 찾아간 것이 대동소이 함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이여송에 대한 추앙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대접받는 맥아터에 비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미 일본에 막강한 공군과 세계 제일의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출격하여 한반도를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와 집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항공모함을 북한군 포격 거리밖에 대놓고 출격하여 목표물을 파괴하고 돌아오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민군은 미군의 막강한 해, 공군력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남침을 개시했다. 전쟁 초기부터 미군은 남북한 전역에 막대한 양의 포탄을 퍼부었다. 초기에는 적과 아군, 민간인을 구별하지 못해서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기도 했지만 폭격은 인민군의 보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유엔군의 낙동강 방위선을 뚫으려는 인민군은 무기, 식량,  병력의 보충이 충분히 되지 않아서 크게 고전했다. 유엔군 지상군이 속속 부산에 도착하여 반격 준비를 하는 동안 인민군 전력은 점점 취약 해 졌다. 낙동강 북부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미 해병대가 서부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서 선전하여 인민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것은 미군이 하늘과 바다를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58년 전 공군이 없던 시절에 이순신 장군은 바다를 훌륭이 지켜 냈다. 겁 없이 북으로 진격한 일본군은 식량, 무기, 병력을 보충할 바닷길이 막혀 버렸다. 화살에 맞아 죽는 병사들보다 굶어 죽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한양을 제 발로 걸어 나가야 했다. 


나는 이순신을 역적이라고 잡아넣은 조선에 아무런 애착도 없다. 조선의 역사는 후손들에게 온갖 서러움을 한 아름 안겨준  산 증언이다. 이순신은 당신 혼자의 힘으로 이러힌 열악한 조건을 이겨 내고 나라를 지켜 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순신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이유이다. 


1592년 12월에 의주에서 선조가 이여송에게 작전 지휘권을 위임한 이후로는 임진 전쟁은 명과 일본의 전쟁이 되었다. 이여송이 조선군을 지휘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 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이승만은 맥 아터에게 작전권을 위임했다. 인공과 미국의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중공이 개입하면서 중국과 미국의 전쟁이 되었다. 대륙에서 태평양에 다리처럼 돌출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태평양 세력이 충돌하기 좋은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대륙 세력과 태평양 세력의 충돌이 한반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 두 전쟁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동질성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역사상 최초로 한반도의 분할이 명과 일본의 협상에서 논의된 이유도 대륙 세력과 태평양 세력의 충돌을 종식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에는 태평양 세력은 극히 미미 했다. 대륙에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반도에 있는 조선은 대륙세력에 종속되어 살길을 찾았다. 끝이 안 보이는 평화가 계속되었다. 국방을 소 홀이 하고 지배층의 안위를 위한 정치를 하는 동안 부패가 만연 했다.  그동안에 이웃나라 일본이 강해졌다. 태평양의 섬나라는 대륙을 넘겨다 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태평양 세력)이 반도라는 다리에서 처음으로 싸운 전쟁이었다. 임진전쟁 후 도꾸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의 막부시대에는 조용했다. 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조선과도 잘 지냈다. 조선은 또 일본을 무시하고 청나라에 빌 부터서 나태해졌다. 200년 동안 도꾸가와 막부시대에 차별받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후손들은 막부를 무너트리고 명치유신을 이룩하여 호전적인 일본제국을 건설했다.  다시 반도에서 대륙세력과 태평양 세력이 충돌했다. 청일전쟁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세력이 바닷 놈들 한테 졌다. 일본은 이제 됐다 했다. 막 먹잇감을  삼키려는 순간 또 다른 대륙 세력이 나타 난다. 제정 러시아였다. 둘은 써우지 말고 한반도를 나누어 먹자고 흥정을 시작했다. 분할의 역사상 두 번째 이벤트였다. 39도선, 38도선 이야기가 오갔다. 협상이 결렬되고 다시 다리에서 또 전쟁이 터졌다. 러일전쟁이다. 한반도를 러시아가 먹느냐 일본이 먹느냐의 한판 승부였다. 일본의 승리였다. 이때 또 하나의 태평양 세력이 등장한다. 미국이었다. 티어도어 루주 벨트 미국 대통령은 려시아와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 협상을 중제 했다. 이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이 필립핀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받아들인 다는 약속을 했다. 그래서 한민족은 나라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동안 잘 지내던 두 태평양 세력은 2차 대전 동안에 세계 헤게모니를 두고 전쟁을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이었다. 일본의 참패였다. 태평양 세력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대륙세력은 중국과 소련이 되었다. 말만 했던 분할은 현실이 되었다. 38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국이 점령했다. 다리에서는 또 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이다. 새로운 태평양 세력 미국과 대륙세력인 두 개의 커다란 공산국가와의 전쟁이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라는 말은  한국 지식인들 간에 자주 회자된다. 그러나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한국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망망대해인 태평양과 드 넓은 대륙 사이를 잇는 다리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은 약한 나라에서 절대로 한시도 안심하고 살 수가 없다. 항상 두 세력은 반도에서 우위를 차지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약해지면 덮친다.  먹히지 않으려면 부국강병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일본, 미국, 중국은 모두 두 세력에 속하는 외세이다. 이들을 나라별로 구별하여 우방이니 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포괄 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먹잇감을 노리는 이리 떼 들이다. 안정된 경제를 유지하고 자주국방을 다져야 한다.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절묘한 외교가 필요하다. 망한 모든 나라의 사망진단서의 병명은 "부패"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부국강병의 최대의 적은 위정자들의 부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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