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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Dec 05.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부 한국전쟁

제8장 채병덕 장군의 최후와 최원팔씨의 기구한 운명

  8월 초에 인민군은 낙동강 안쪽을 제외 한 남한 전역을 점령했다. 맥아터의 명령을 받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을 경계로 강안 쪽에 진을 치고 반격할 준비를 했다. 국군은 대구 북쪽을 맡고 미군은 서쪽을 방어했다. 본국과 일본에서 병력, 화기, 군수물자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유엔군도 속속 도착했다. 


임진왜란 때 호남을 제외한 전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것과 반대로 한국전쟁 초기에는 영남을 제외한 전국이 인민군의 손에 들어갔다. 400여 년 전 일본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공하려고 진주성 공략에 나선 것과 같이 이제는 인민군이 호남에서 영남으로 들어가려고 진주-마산 지역을 공략하고 있었다. 영호남을 가로막고 있는 소백산맥의 남단을 통과하려는 시도이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최후


7.25일, 24사단 29 연대 예하의 3대 대장 Harold W. Mott 중령은 하동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이때 채병덕은 진주 미군부대에 갑자기 나타나서 미군과 같이 싸우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채병덕은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짤막한 대화는 할 수 있었다.  그는 모트 중령 부대에 배속되어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그는 미군과 같이 하동 고개에 도착했다. 앞을 보니 미군복 입은 군인과 인민군 복장을 한 군인들이 약 100 야드 전방에 나타났다. 채병덕은 앞으로 나아 가면서 영어로 “소속이 어디야?” 하고 외쳤다. 대답 대신 총탄이 날아와 그의 머리에 명중했다. 대한민국 군대의 총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참모총장은 이렇게 어이없이 적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된 직후에 맥아터가 수원에 도착했다. 채병덕과 이승만은 그를 마중 나갔다. 셋이 같이 앉은자리에서  맥아터가 채병덕에게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를 물었다. 채병덕은 "이백만 남한 청년을 모조리 징집해서 훈련시켜 막겠다."라고 대답했다. 167 cm 키에 136 kg 체중이었던 그는 별명이 뚱보(fat boy)였다. 첫인상이 좋았을 리가 없었다. 맥아터는 이승만에게 그를 파면 교체할 것을 종용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한국군 패퇴의 책임을 물어 채병덕을 파면하고 정일권이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부산에서 보급과 징병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통솔하는 부하는 고작 100명이었다. 7월 23일 채병덕은 국방장관 신성모로부터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하여 적을 격퇴 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패잔병을 모아 인민군을 격퇴하라는 뜻이었다.  7월 24일 채병덕은 부하들을 진주로 보낸 후 송도에 있던 자택으로 가서 부인 백경화에게 갓난아이 이름을 영웅의 영자와 북진의 진자를 따서 영진이라고 하라고 당부하고 진주 미군부대로 향했다. 그리고 하동에서 인민군 총에 맞아 전사했다. 


대한민국 군군 최고 지휘관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죽음은 임진왜란 때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던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여 달천에 투신자살한 것을 연상케 한다. 힘없는 나라의 훈련되지 않은 무능한 군대의 면모는 400여 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채병덕은 191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항상 우등생이었던 그는 평양 제일증 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던 그를 일본 교관이 적극 추천하여 당시에 제일 들어가기 힘든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일본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중위 시절에 일본 육사 29기 인 백홍석의 딸 백경화와 결혼했다. 1943년에 소좌로 진급하여 부평 조병창 3 공장장으로 부임했다. 해방 후 군사영어 학교 1기 졸업생이 되면서 국군 경력이 시작되었다. 


채병덕의 경력은 대부분의 국군 장성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소련군은 직접 38 이북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북한에 진주했기 때문에  일본군 장병이었던 조선사람들은 분명한 적군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해방된 조국에서는 적과 내통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미군정과 남한 정부는 이들을 중용했다. 이외에도 일제 강점기에 이북에 있던 경찰, 공무원, 사업가, 지주 등 기득권 층은 거의 대부분이 남한으로 피신해야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일인독재) 타도로 인민의 인기를 모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 해왔다. 인공이 친일파를 용납하지 않은 다른 이유이다.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장성들과 일본군 출신의 장성들의 싸움은 우선 전자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게 쫓겨 다니던 무장 독립군의 설욕이었을 까? 그러나 그들의 상대는 국군이 아니고 미군이었다. 


지상군이 전열을 다듬는 동안 미 해군은 해안을 봉쇄하고 공군은 도로, 철도, 북한군 군수 물자 생산기지를 철저히 폭격했다. 인공의 보급물자와 인력을 실어 나르는 차량과 열차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만 다녔다. 적화통일이 목전에 달 했지만 인민군은 극심한 보급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사상자가 발생하면 보충병을 신속히 조달해야 하는 데 열차와 차량 움직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중학교 학생부터 50세 남자들을 강제 징집했다.  이들은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어 국군과 싸웠다.  많은 탈영병이 발생했다.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전장에 투입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9월에는 이들을 전투 병력에서 제외시켜 식사병이나 노동일을 하게 했다. 물론 국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된 사람, 인민군이 퇴각할 때 북으로 간 사람, 탈영하여 국군이 된사람 등 기구한 운명의 연속이었다. 의용군으로 징집된 사람들의 숫자는 분명하지 않다. 서울에서 만 약 5만 명이 인민군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원팔씨가 현충일인 6일 왜관 낙동강변에 있는 칠곡군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찾았다. 좌측 상단에 그의 이름(崔源八)이 보인다. 최정동 기자


최원팔 씨의 기구한 운명

최원팔 씨는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1945년 5월, 17세 되던 해에 일본 정부 징용에 걸려 평안도 진남포로 끌려갔다. 해방되기 3개월 전이었다. 6.25 사변이 터지고 인민군이 들어왔다. 그들에게 잡혀서 인민군이 되었다. 도망처 나와 집에 있으니 1950년 11월 13일에 국군에 징집되었다. 대구에서 일주일간 신병 훈련을 받고 7사단에 배속되었다. 1951년 5월 18일 중공군 포로가 되었다. 중공군은 그를 인민군에게 인계했다.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그는 장안사에서 약 두 달 동안 회복될 때까지 지냈다. 따발총을 잘 다루었던 그는 인민군 전투 부대에 배속되었다. 배치 이틀 만에  북한강을 헤엄처 건너 국군에 투항했다. 


인민군에게 소속되었던 사람들은 일단 대구에 있는 낙오자 수용소로 가야 했다. 한 달 동안 가두어 놓고 심문을 했다.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민약 인공이 사용하는 서기로 대답하면 끝장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단기로 대답하여 풀려 나왔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나가 버렸다(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자다가 무서운 환상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어머니와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다.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군에 복귀했다. 


1951년 겨울 그는 국군 7사단에 배속되어 북한강 도하 작전에 참여했다. 엉덩이에 수류탄 파편이 박혀 수술을 받았다. 완치 후 6사단에 배속되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7월 13일 중공군은 대공세를 펼쳤다. 5사단이 지키던 백암산이 준공군에게 점령되었다. 원팔 씨의 6사단이 고지 탈환에 나섰다.  그는 중사 계급장을 단 선임하사였다. 고지를 탈환하고 보니 200명의 부하들은 대부분이 전사하고 겨우 32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5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철수했다. 2주 후에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쟁이 끝났다. 


원팔 씨는 1954년 11월 10일 제대하여 가족에게 돌아왔다. 아들은 다섯 달이 되어 있었다. 그는 경북 왜관에 정착하여 학교 기능직 사원으로 일 했다. 1954년 4월,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화랑무공훈장을 발급했다. 그러나 그에게 훈장이 전달된 것은 2005년이었다. 그나마 훈장을 육군 참모총장이 직접 그에게 달아 준 것이 아니고 택배로 배달되었다. (* 중앙 산데이: "북으로 가자"며 총들이 댄 인민군, 나도 총을 겨누었다; 2011.11.23)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개개인의 인생을 삼켜 버린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전쟁 초기에 참모총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채병덕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인민군에 대항할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훈련이 부족한 국군이었지만 채병덕은 그나마 국군을 최대한으로 독려하여 방어하지 못했다. 

그의 최후는 어리석지만 자신의 실책을 뉘우치는 마음의 표현이었기를 바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육사를 졸업하여 일본군 장교가 된 경력을 손가락 질 하며 친일파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고 잔인 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최원팔 씨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민군이던 국군이던 사람들은 군대에 가기를 싫어한다. 마지못해서 끌려간다. 한국전쟁 당시의 젊은 남자들의 운명이었다. 북쪽이 고향인 사람이 국군의 포로가 되어 남쪽에 남은 사람, 남쪽 사람이 인민군이 되거나 포로가 되어 북으로 간 사람 등등 최원필 씨와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1954년에 사무착오로 최원팔씨에게 훈장을 전달 하지 않은 실무담당 공무원과 2005년에 택배로 이를 보낸 공무원의 무성의가 너무 한탄 스럽다. 그 사람들이 그의 아픔을 느끼기나 했는 지 모르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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