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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Dec 01.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제3부 한국전쟁

제7장 인민군의 압도적인 우세와 미군의 패퇴 


한겨레 21


인민군 서울 점령, 유엔군 파병 결정

6월 28일 한강교가 폭파되고 서울이 인민군 손에 넘어갔다. 우왕 좌왕 어쩔 줄 모르며 퇴각하는 국군 중에는 인민군에게 투항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인민군에게 협조한다는 보고를 받고 가입자 명단에 있는 사람들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상범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남침 보고를 받은 미 국무성은 한국시간 6월 26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를 열게 하여 남침이 불법임을 선언했다. 한국시간 6월 28일 안전보장 이사회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소련은 1950년 1월부터 상임위 참석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중공이 상임위 이사국에서 배제되고 대만(중화민국)에게 그 자격이 부여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에 이어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 서해안이 접하고 있는 태평양 방어에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중요하게 되었다. 트루만 정부는 남한을 일본 방어를 위한 대륙 전진기지로 미국이 꼭 확보해야 할 지역으로 판단하여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만약 남한이 공산화된다면 공산국과의 전쟁에서 미군은 배를 남한 연안에 대고 상륙 작전을 펼처야 한다. 또한 미국은 미국이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확산 전쟁을 방관할 경우에 소련이 유럽에서 더 적극적으로 세력 확산 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처음에 공군과 해군만 지원하고 지상군 파병을 보류했었다. 미 육군이 직접 남한에 들어가면 소련군이 들어와서 세계대전으로 확전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미 국무부 소관이었던 미 군사고문단은 극동사령관 맥아터 지휘 하에 들어갔다. 그동안 민간인 무치오 대사에게 보고 했던 군인 장교들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맥 아터는 즉시 공군기를 동원하여 폭격을 시작했다. 인민군이 가지고 있던 소련제 야크기는 프로펠러를 단 전투기였다. 미공군이 가지고 있는 제트기의 상대가 되지  안 되었다. 야크기는 미군 제트기와 만나는 쪽쪽 격추되었다. 그러나 미공군은 공중에서 인민군과 국군을 구별하지 못했다. 사단 병력의 반을 잃고 퇴각하던 백선엽의 제1사단은 미공군의 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백선엽은 장병들과 함께 미군이 우리를 돕고 있다고 환호했다.


6월 29일 맥아터는 전쟁터를 직접 보고 지원 규모를 결정하기 위해서 수원에 도착했다. 무치오 대사와 이승만이 그를 마중했다. 그는 보좌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강 이남 가까이 까지 가서 전쟁 상황을 시찰했다. 그는 흰옷 입은 피난민들 사이에 국군 패잔병들이 수없이 끼어서 퇴각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지상군이 전면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인민군을 방어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 아터는 즉시 본국에 지상군 파병 없이 해, 공군 만으로는 인민군을 몰아내고 남한 영토를 회복할 수 없다는 전문을 본국에 발송했다. 그리고 우선 연대 규모의 지상군을 보내고 2개 사단 병력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보고 했다. 약 30분 만에 트루만은 맥아터의 요구를 허락했다.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나 사흘 동안 한강 이남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인민군의 커다란 실책이었고 국군과 미군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기 전에 국군을 섬멸할 수 있는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일본에 망명정부를 계획했고 미군은 제주도에 기지를 마련할 계획을 고려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6월 28일 11시 30분, 김일성은 서울 점령식을 거행했다. 중앙청에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인공은 조선인민민 주주의 공화국의 줄인 말이다. 인공은 남한과 북한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남한은 북조선, 남조선이라고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쪽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남한의 줄인 공식 명은 한국이고 북한의 상대적인 명칭은 인공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경무대를 차지한 인민군 정성들과 고위층 관리들은 사흘 동안 축하 파티를 계속했다. 아마 미 대사관이 버리고 간 음식과 양주가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그들은 남한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다렸다. 남로당 당수였던 부수상 박헌영은 인민군이 남한에 들어가면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남한 정부가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너무나 조용했다. 박헌영은 1. 폭동, 2. 폭동, 3. 폭동이라는 메시지로 남한 국민을 독려했다. 믿었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인민군 장교들은 서울시내 구경에 나섰다. 그들은 인공 돈과 남한 돈의 환율을 1:8로 만들었다. 인민군 장교들의 봉급은 앉아서 3,4배로 오른 꼴이 되었다. 그들은 남한 물건을 정신없이 사들였다. 


사학자들은 인민군이 즉각 국군을 추격하지 않고 양주와 양식 그리고 샵핑에 사흘을 허비 한 이유에 3가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1. 한강 도하 장비가 부족하여 도하 준비에 사흘이 필요했다. 2. 춘천전투에서 인민군이 국군 방어망을 뚫지 못해서 서부전선 병력과 합쳐서 국군을 포위 공격하려는 작전이 지연되었다. 춘천 방면 인민군은 7월 5일에야 이천-용인에서 서부전선 병력과 합류했다. 3. 봉기 기다림


60명의 국회의원들은 서울에 남아서 인민군을 환영했다. 김일성이 서울을 점령한 후 남한 정부와 협의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을 하려고 했다는 설 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선거는 100%에 가까운 찬성표가 나오는 불법 선거였을 것이다. 


미국은 만약 중공이 대만을 침공하면 관여하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동안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4대 연합국으로 격상시키고 적극적으로 원조해 왔지만 1945년 일본이 항복한 이후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국민의 신임을 잃고 모택통의 공산군에게 지고 있었다. 그 원인이 국민당군과 정부의 부패에 있었다. 국공내전 말기에는 미국은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장개석을 포기한 상태였다. 


모택통은 타이완을 공격할 준비를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해왔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약 20만 명의 군대가 중국 남부 해안에 집결하여 명령만 내리면 타이완에 상륙할 태세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만은 제7함대를 타이완 해엽에 파견하여 미국이 타이완을 방어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모택통은 타이완 침공에 쓰일 병력을 인공과 중공 국경에 집결시켰다. 5개월 후에 이 병력은 압록강을 건넌다.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장개석의 중화민국(타이완)은 존재하지 않았을 는지도 모른다. 


장개석은 한국전쟁이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본토 수복 전쟁을 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남한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건의했으나 트루만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중공과의 전쟁이 불가피하고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Task Force Smith, 오산전투 

미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24사단 병력을 남한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 사단 병력을 한꺼번에 수송할 배가 없었다. 우선 Charles Brad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400명가량의 1개 대대 병력과 작은 포병 부대를 부산에 보냈다. 


그들은 인민군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병력의 규모나 소련제 탱크의 위력도 몰랐다. 탱크를 파괴할 무기, 포탄과 실탄 모두 부족했다. 전쟁에서 이겨 일본을 점령한 그들은 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구두닦이 가 있었다. 장교들은 개인 가정부를 두었다. 미군 중위 월급이 일본 장관 월급과 같았다. 전투 훈련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건방지고 무능한 군대였다. 


장교와 병사들은 인민군이 자신들을 보면 겁이 나서 도망갈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인민군을 얕잡아 보았다. 한편 부산 시민들은 그들이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할 것이라고 믿고 대환영했다.  


7월 5일, 수원과 오산을 잇는 도로변에 잠복했다.  수많은 T34 소련제 탱크가 나타나자 호비츠 포와 기관총을 쏘아 댔으나  아랑 곳 없이 저지선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진격했다. 탱크 뒤에는 수천 명의 인민군이 나타나서 맹렬히 공격해 왔다. 미군은 혼비백산하여 무기, 철모, 군화, 셔츠까지 버리고 도주했다. 반이 전사했다. 어떤 병사는 서해안으로 도주하여 조각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기도 했다. 



조선일보

딘 소장 평택-안성 라인에 진 치다.

오산에서 패퇴한 후 딘 소장이 지휘하는 24사단 병력이 모두 도착하여 평택-안성 라인에 방어선을 쳤다. 때는 7월 장마철이었다. 참호 속에 물이 차 올랐다. 장병들은 전투하러 온 것이 아니고 경찰 노릇 하러 왔다고 믿었다. 인민군은 자신들을 보기만 하면 도망갈 것이라고 믿었다. 전투는 뒷전이었다. 주말 이면 일본으로 가서 걸프랜드와 즐길 것 만 생각하고 있었다. 


수십대의 탱크를 앞세운 수천 명의 인민군이 나타나자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총을 쏘지 않는 병사들이 많았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무거운 무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줄 행랑을 쳤다. 상관이 정지 명령을 내려도 한 없이 도망갔다. 


전투기 끝나고 한 상사가 부하에게 왜 총을 쏘지 않았나 나고 물으니 총이 발사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총이 먼지로 잼 됐거나 잘못 아샘블 되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총기 소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분해 후 다시 짜 맞출 줄도 몰랐다. 


비가 멎고 여름 더운 날씨가 되니 병사들은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물병까지 버리고 도망간 병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더러운 물을 먹어 야 했다. 미군은 천안으로 후퇴했다. 


미 8군 사령관 Walton Walker 낙동강 방어선 결심

천안-금강 라인이 무너지자 미군은 북한 전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시인했다. 24사단 딘 소장은 대전에 본부를 설치했다. 8군 사령관 워커는 낙동강 방어선을 결심하고, 7월 19일 그는 대전으로 가서 딘 소장에게 대전에서 이틀 동안만 인민군 진격을 막아 달라고 주문했다. 본국에서 전투 병력, 무기와 물자가 도착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인민군이 사흘 동안 서울에서 양식을 안주삼아 양주 마시고 샵핑으로 미적거리고 있던 시간이었다. 


인민군은 앞에서 공격하면서 일부는 옆으로 돌아 적의 후방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잘 썼다. 한편 미군은 통신 장비가 부족하여 전방의 전황을 사람이 직접 가지 않고는 알 길이 없었다. 딘은 인민군이 자신의 퇴로를 차단한 것도 모르고  그들이 대전에 쳐들어 왔는 데도 후퇴하지 않았다. 부대원 모두를 후퇴시킨 후 바주카 병을 데리고 탱크를 파괴하러 본부를 나갔다. 워커에게 약속한 이틀 동안 대전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틀 후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지프차를 몰아 대전을 탈출했다. 차는 총에 맞아 망가지고 그는 홀로 되어 대구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방향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인 한모와 최 모씨를 만 났다. 그들에게 100원 줄 테니 길 안내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은 딘 장군을 인민군에게 넘기고 인민군으로부터 3만 원을 받았다. 옷까지 벗어던지고 말도 안 통하는 외국 땅에서 헤맨 지 35일 만에 인민군에게 붙잡혀 평북 강계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1953년 휴전 후에 석방되었다. 딘 장군의 대전 지역 작전 덕분에 워커는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여 유엔군이 반격할 수 있었다. 딘 장군을 인민군에 팔아넘긴 한모와 최모는 휴전 후 사형되었다. 



개토제, 한겨레

대전 학살

지난 추석 일 주 전 2020년 9월 20일 대전시 동구 남 월동(골령골) 산골에서는 시체 발굴작업이 한창이었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인들과 보도 연맹가입자들이 학살되어 묻혀 있는 장소였다. 길게 구덩이를 파고 그 앞에 앉혀 놓고 집단 총살을 한 후 묻어 버린 장소이다. 세차레에 걸쳐 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학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대략 4000명가량으로 추산된다. 희생자 가족들은 공산주의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아무에게도 억을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가진 불이익을 당하며 일생을 보내야 했다. 해방 후 빨갱이 딱지에 얽힌 사건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건이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에 대한 학살은 전쟁 동안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모두 무려 20만 명가량이 죽었다. 보수정권은 보안법을 이용하여 이들 가족들에게 함구를 강요했다. 그러나 진보정권은 진상을 세상에 알리 려고 노력했다. 보수정권의 Red scare(빨갱이 프래임) 정략은 광주 항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7월초에 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에게 넘어 갔다. 한국전쟁은 미군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미군이 가지고 있는 전시 작전권은 아직도 국군에게 넘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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