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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Nov 26.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부 한국전쟁

제6장 1950.6.25. 남침 개시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순간.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오른쪽의 이미 폭파된 다리는 한강인도교이다. 미군은 종전 때까지 우세한 공군력으로 북한군에 타격을 입혔다.(월간 조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인민군은 총공격을 시작했다. 황해도 옹진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번졌다.  안악, 동두천, 춘천이 한 시간 만에 공격당했다. 동해안에 있는 삼척과 임원진에는 인민군이 상륙하여 남쪽으로 진격했다. 국군의 위치와 병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인민군은 너무나 쉽게 국군을 격파했다. 더구나 국군의 반이 외출과 휴가로 영내에 없었고 가지고 있는 무기도 인민군보다 훨씬 못했고 병력의 훈련과 전투 경험도 인민군과는 비교도 안되었기 때문에 예상했던 결과였다.  


옹진반도는 황해도의 일부이지만 38선 이남에 달랑 달려 있는 반도이다. 분단 이후 인민군은 웅진반도를 점령하려고 자주 38선 너머로 공격해 왔다. 벡 인엽 대령이 그동안 잘 방어해 왔다. 그러나 마음먹고 쳐들어온 인민군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백인엽 대령의 17 연대는 LST를 타고 인천으로 후퇴했다. 


개성을 방어하고 있던 백선엽도 대부분 병력을 잃고 임진강을 건너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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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국군의 방어선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동안 국군 6사단 7 연대는 춘천에서 인민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이었다. 6 사단 장은 김종오 대령이었고 7 연대장은 임부택 중령이었다. 사단본부는 원주, 연대 본부는 춘천에 있었다. 예속 대대는 춘천 북쪽의 산악지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연대장은 병사들의 훈련과 장교들의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당시 장교들이 교육 차출을 기피하는 풍조와는 전혀 디른 행보였다. 그는 자신의 부대가 춘천시와 가까운 지점에 주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진지공사를 서둘렀다. 공사 중 육군본부에서 예산지원을 중단하자 사단 공병대 그리고 춘천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뚜껑이 있는 콩 크리토 호와 통 나무 호를 팠다. 호와 호는  통로로 연결 되게 헸다. 진 앞에는 지붕형 철조망을 두줄로 쳤다.  그 중간에는 대인지뢰를 묻었다. 


김종오 사단장은 수 없이 들어오는 북한군 남침 징후에 대한 정보를 무시하지 않고 예의 주시했다. 6월 19일 인민군 제2군단 소속 전차병 한 명이 7 연대에 귀순했다. 그는 6월 23일에 38선 접경에서 야외훈련을 하기 위해서 일주일간 야간 행군을 하여 전차 40대와 함께 화천에 도착했다고 했다. 화천에는 많은 병력과 포가 집결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남침 시 북한 당국은 인민군에게는 대규모 훈련하러 간다고 하고 남침 사실을 숨겼다).


연대장의 보고를 받은 김종오 사단장은 일개 졸병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으니 확인해 보라고 했다. 윤수용 소위를 장으로 39명의 수색대를 파견해서 알아본 결과 화천에 차량 400대, 양구에 300대가 춘천으로 향할 준비를 마치고 있고 그 주위에는 대량의 병력이 숙영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임부택 연대장은 6월 23일 오전 8시에 참모들을 대동하고 관측소에 올라가 적 병력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국군 유일하게 김종오 사단장은 정보에 입각하여 전 병력의 주말 외출을 허가하지 않았다. 인민군은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한 시간 동안 대포를 쏘아 대더니 비와 안개를 뚫고 추전리-청평-고탄리-인남리-지암리의 도로를 따라 노도와 같이 쳐들어왔다. 


인민군은 고지에 진을 치고 적군의 이동을 보고 있는 국군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어리석은 수작이었다. 인민군이 200 미터 앞까지 다가 오기을 기다렸다가 일제히 사격을 감행했다. 인민군은 우회 공격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면돌파를 시도하다가 인민군 제2사단 병력이 와해되고 7사단 병력으로 교체해야 했다. 


국군은 5일 동안 인민군의 총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패퇴하여 서울을 내주고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가야 했다. 전쟁 초기의 국군의 참패는 국군의 무장이 인민군에 비해서 모자랐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휘관들이 수없이 들어오는 정보를 무시하지 않고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면 미군과 유엔군이 들어올 때까지 부산 주변만 남기고 남한 전역을 내주는 추태는 벌리지 않았을 것이다. 인민군 2사단과 7 사단장은 춘천전투에서의 패배로 면책 당 했다. 


전쟁이 터지던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으로 괴리 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들은 국군이 북진하여 괴뢰군을 무찌르고 통일할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트럭을 타고 속속 북으로 올라가는 국군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독려했다. 그러나 소련제 야크 기는 오전 9시경에 김포와 서울을 폭격하고 있었다. 


6월 25일 오후 2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참모총장 채병덕은 인민군의 전면 공격을 부인했다. 다음날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남침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서울을 사수하는 것은 물론,  명령만 내리면 평양을 나흘 만에 점령하겠다고 호언장담 했다. 


인민군은 의정부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의정부가 뚫리면 서울이 인민군 손에 넘어가게 된다. 6월 26일 오후 참모총장 채병덕은 7 사단장 유재형에게 동두천 방면에서 인민군을 방어하라고 명령 함과 동시에 2사단 장 이형 군에게는 포천 방면에서 인민군을 맞아 싸우라고 명령했다. 7사단 병력은 명령대로  동두천 도로가에 진을 치고 인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2사단 병력은 대전에 있다가 새벽에 전쟁이 터지자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아직 전병력이 도착하지도 않았고 도착한 병력도 오랜 행군으로 지처 있는 상태에서 도저히 전투에 임할 수가 없었다. 이형군은 채병덕에게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다음날 포천에서 내려오는 인민군과 교전을 하지 않았다. 겨우 2개 대대를 포천 도로 가에 매복시켰으나 인민군 탱크가 짓밟고 지나가 버렸다. 7사단은 그런대로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옆구리를 방어하고 있던 2사단이 무너 저서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7사단도 남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 중에 7사단도 괴멸되었다. 인민군 동투 천 방면 3사단과 포천 벙면 4사단은 의정부에서 서로 합 처서 서울로 진격했다. 


주한 미국대사 무치오는 6월 25일 오전 11시에 미 국무부에 남침을 보고 했다. 6월 26일 밤 10시에 이승만은 극동사령관 맥 아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6월 27일 새벽 2시에 대전으로 피신했다. 인민군의 빠른 남진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7월 1일에 이리(익산)로 다음날 목포로,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7월 9일에는 대구에 도착했다. 


의정부 방면에서 패퇴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장병들과 총성이 가까워 지자 6월 27일부터 서울 시민들도 남쪽으로 피난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수많은 공산 주의자들은 길가로 나와 인민군을 맞지 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북한 편인 사람들과 대한민국 편인 사람들끼리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아우성쳤다. 그야말로 아수라 장이었다.


시민들이 한강 인도교 북쪽에 구름 떼 같이 몰려들었다. 한강은 북과 남이 3개의 철교와 한 개의 인도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피난민, 퇴각하는 군인들, 군대 차량들이 다리 위를 매우고 있었다. 6월 28일 오전 2시 14분, 굉음과 함께 남쪽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폭파되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보면 6-8시간 먼저 폭파한 것으로 판단되어 후에 많은 지탄을 받았다. 이로 인한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시민들은 3개월 동안 공산치하에서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민군의 손에 처형되었다. 많은 국군들이 장비를 버리고 퇴각해야 했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국군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비난이 빗발 치자 이승만 정권은 폭파의 실무를 담당했던 최창식 공병대장을 폭파 명령자로 지목하여 사형시켰다. 그러나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그의 부인의 재심을 받아들여 그를 사면 했다. 실제 명령자는 채병덕이었고 채병덕의 고문관이었던 James Hausman 대위가 채병덕에게 폭파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유재형 장군의 7사단이 한강 이남에 도달했을 때는 겨우 1200명과 기관총 4대가 남아 있었다. 백선엽 대령의 1사단이 김포에서 한강을 건넜을 때는 겨우 5000명이 남아 있었고 대포는 모두 버려야 했다. 6월 28일, 남침 사흘 만에 98,000명의 국군은 22,000명으로 줄 었다. 무기 손실을 고려하면 국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6월 26일 자정이 조금 지난 6월 27일 이른 아침에 주한 미국대사 무치오는 미 국무부로부터 서울을 떠나라는 전문을 받았다. 27일 오전 9시에 대사관 직원과 미고문단원은 수원에 모여서 군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1500대의 차량, 2000 갤론의 가솔린은 모두 그대로 두었다. 10만 불어치의 음식과 4만 불어치의 양주도 버려둔 채로 떠났다. 물론 모두 인민군 손에 넘어갔다. 서류는 모두 소각시켰지만 미 대사괸에서 일 했던 남한 사람들의 명단이 그대로 남아서 인민군은 점령 후 이 명단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총살시켰다. 남한에 살던 미대사관 직원과 미군 고문단 가족들은 비료를 운반하는 노르웨이 회물선을 타고 일본으로 피신 했다. 


참고: This Kind of War by Fehren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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