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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Nov 18.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부 한국전쟁

제5장 국군과 미군의 오판

1950년 6월 24일, 국군과 미군의 오판


6.25 전날 6월 24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식 파티가 있었다. 전방부대 사단장들이 초청되어 밤새껏 술을 마셨다. 채병덕 참모총장도 이 파티에 참석했다. 주말이어서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중요한 화제는 모내기와 날씨였다. 채병덕은 한 달 후 7월에 하동 근처에서 인민군 총에 맞아 전사했다.


KMAG(한국군 미군 고문관) 장교들은 미 대사관에서 매주 토요일 밤마다 열리는 칵테일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내 들은 혼혈아 입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군에 속해 있지 않고 민간인 정부 기관인 국무부 소속이었다. 물론 극동사령관 맥 아터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일본 고쿠라에 있는 미 24사단 본부에서는 카 스튬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Robert F. Dean 소장은 이 파티의 주빈이었다. 그는 한국 양반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 쳤다. 그의 부인은 예쁜 한복을 입었다. 장병들은 박장대소했다. 24사단은 미군정 시기 3년 동안 남한을 통치했던 하지 중장 예하 부대이다. 사변이 터지자 제일 먼저 남한에 들어온 미군 부대였다.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된다. 


중국에서 장개석을 원조하여 실패한 미국은 국군의 빨치산 토벌 능력을 눈여겨보았다. 북조선은 빨치산의 반란으로 적화통일을 이루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빨치산이 국군에게 와해될 때마다 지원군을 보내서 저항했다. 그러나 1950년 봄에 국군이 빨치산을 철저히 소탕한 이후로는 그들의 활동이 거의 눈에 띠지 않았다. 북조선이 원군을 일부러 보내지 않았는지 남한 내 반란을 포기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군의 눈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기특했다.  미군은 국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시작했다.  


KMAG 지휘관이었던 William A. Roberts 준장은  임기를 마치고 6월 24일 날 본국으로 가는 배에 타고 있었다. 3주 전에 타임지는 KMAG에 관한 특집에서 그와의 인터뷰를 기제 했다. 그는 “남한은 미국밖에 있는 군대 중에서 가장 훌륭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군대가 미군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뜻이었다. 아무튼 그는 재수 좋게 전쟁 직전에 배를 탔다. 


1950년 2월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 국무부 내의 공산주 주의자 명단을 발표했다. 매카시즘의 시작이었다. 

정적에게 빨갱이 프래임을 씨워서 재거하는 “red scare”의 효시였다. 매카시즘은 전염병처럼 퍼졌다. 남한은 매카시즘의 실습 현장이었다. 곧 한국 보수의 효과적인 무기로 정착했다.


1950년 4월 12일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각각 1,2,3위를 차지했다. 


1950년 5월 30일 2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총 216석 중 무소속이 126명이었다. 여당 대한국민당과 기타 이승만 지지 세력은 59석을 차지했다. 신익희가 이끄는 보수 야당 민주국민당은 24석이었다. 이승만과 여당의 패배였다. 불안한 정국이었다. 


1950년 6월 17일 북조선은 남한에게  총선거 실시를 위한  남북회담을 제안했다. 


1950년 6월 19일 John Foster Dulles 가 한국을 방문했다. 38선 전방을 시찰하고 국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한국이 거대한 자유세계를 만드는 데 가치 있는 역할을 하는 한, 미국은 한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공화당이었던 그는 민주당 정부가 6월 12일 발표한 아치슨 방어선으로 인한 남한의 불신을 얼마간 씻어 주었다. 달라스는 1953년 집권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을 지냈다. 


1950년 6월 24일 브라질에서 FIFA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다. 


1949년 말, 육군 정보국은 1950년 봄에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에 맞추어 육군 본부는 방어계획을 수립하여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 매일 들어오는 적정 보고서에는 인민군의 병력 이동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병력 집결이 완료되면 전면 남침이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 자료까지 보고 되었다.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에게도 보고 되었다. 미 극동사령부 에도 보고 하여 한국군 병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군 고문관단 (KMAG)은 미정부 국무부 소속이지 맥아더 사령관 지휘하의 극동사령부와는 무관 했다.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후 한국군 장성들 중에는 북침을 주장하는 호전적인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군 출신들이었고 일본제국 군인과 비슷한 색깔을 보였다. 미군 고문관들은 이들이 섣불리 인민군을 공격하여 북한에게 남침의 꼬투리를 줄까 봐 전전긍긍했다.  트루먼 정부는 전쟁을 원치 않았다. 미군 고문관단은 미국 정부의 정책에 충실했다. 그러나 김일성 못지않게 무력 통일을 원하고 있던 이승만은 호전적인 장군들을 감싸고돌았다. 미 고문관단은 호전적인 인물을 요직에서 배제하도록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 했다. 


국방장관 신성모가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북침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하자, 미군은 국군의 탱크, 전투기를 전부,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 이후 신성모는 1950년 6월에 정보국이 수없이 보내는 남침에 대한 정보를 모두 무시했다. 1950년 6월 23일 육군 정보국은 마지막 남침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으나 신성모는 채병덕으로 하여금 전군 비상 경계령을 모두 해제하게 했다. 그리고 6월 24일 토요일 국군에게 평상시와 같이 주말 외출과 휴가를 허락했다. 병력이 반만 남아 있었다. 전쟁 준비가  완료된 북한 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쟁 발발 6일 전에 작성한 미국 CIA 보고서는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대통령의 정책에 부합되는 정보 분석이었다. 


전쟁 발발 2주 전에 한국군은 대부분의 지휘관을 교체했다. 일주 전에 대부분의 전방 부대 위치를 변경하고 중화기와 차량 60%를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일본 육사 채병덕의 후배인 이형근은 그의 저서 “군번 1번 외길”에서 한국 정부와 군 수뇌부에 거물급 간첩이 활동하고 있었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다. 


 38선 이남에 침투한 수백 명에 달하는 간첩은 인민군에게 한국군의 위치를 시시각각 알려 주고 있었다. 인민군은 6월 24일까지 국군의 위치를 완전히 파악하고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공격을 감행했다. 장교클럽 낙성식 파티에서 만취되어 잠들었던 장교들에게 다음날 아침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사를 건 사투였다.  북침 하여 통일된 나라를 만들 꿈을 꾸던 그들은 자신의 생존과 남한의 존립을 위해서 싸워야 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 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 본능이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정보도 가려서 듣는다.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무시했다. 남한이 무력으로 북한을 침공하여 통일하려고,  일부러 가짜 정보를 미국에 알려서 국방력을 강화하려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군 군사 고문단이 민간 기관인 국무부에 속해 있어서 군이 주는 정보를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점도 남침에 대비하지 않은 원인 중에 하나이다.   


소련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남한 방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했고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적화통일을 완수하겠다고 장담했다. 남침 시에 남한 국민이 반란을 일으 켜 호응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오판이었다. 


남한 정부와 미국은 남침에 대한 정보가 부지기수로 들어오는 데도 모두 무시했다. 6.24일 밤 까지도 그들은 인민군의 남침은 꿈에나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총알 한 발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간다. 그러나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장군의 펜대는 수백만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민족 최대의 비극은 이렇게 적군과 아군의 오판에서 시작되었다. 


*참고: 위키 백과

            This Kind of War, T.R. Fehren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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