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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Nov 08. 2020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
3부 한국전쟁

제4장 전쟁의 원인은 김일성의 오판이었다.


딘 아치슨

미국 트루만 정권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국가 신문 클럽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연설을 했다. 태평양 상에 알류샨 열도, 일본, 류큐, 필립핀을 포함하는 방어선을 발표했다. 남한과 대만은 방어선 밖에 있었다. 미국이 아시아 대륙 영토를 직접적으로 방어할 의도가 없다는 뜻이었다. 남한 정부는 이를 크게 우려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아치슨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26일 상호 방위 원조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부터 약 6개월 후에 북조선이 남한을 침공했다.  이후로 미국이 남한의 방어를 포기했기 때문에 소련과 북조선이 남침을 감행했다는 비난이 비등했다. 어떤 이 들은 미국이 전쟁을 유도한 것이라고 까지 말하기도 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지금 까지도 아치슨을 같은 민족이 서로 죽이는 전쟁의 원흉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사람들이 미국을 배반자라고 하는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다. 첫째는 티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타프트-캇추라 합의를 인정한 것, 들째는 이차대전이 끝날 무렵 투루만 대통령이 한반도의 분단 점령을 결정한 것. 셋째는 아치 슨 방어선이다. 타프트-캇추라 합의는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고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이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양국의 외상은 한국과 필립핀을 서로 나누 어 먹기로 합의 한 셈이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북조선 건국 이후 후 스탈린의 남침 허락을 받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50년 4월까지 허락해 주지 않았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할 경우 소련이 피할 수 없는 확전에 휘말려 드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비밀문서에서 아치 슨 방어선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는 데 거의 영향을 미치 않았다는 증거가 밝혀졌다.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남침 직전까지 우려했고, 더구나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 북한이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할까 두려워했다. 


아치슨의 언론 협회 연설의 골자는 대만 포기와 남한 보호였다. 중국 내전이 모택통과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이 도왔던 장개석이 패전하여 타이완으로 피난하게 되자 트루만 정권은 중국 정책 실패의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공화당은 트루만이 중국을 소련에게 바쳤다고 비난했다. 아치슨과 트루만은 중공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미국은 대만을 포기하고 중공과 친하게 지내는 정책으로 전환한다. 1950년 1월 5일, 트루만은 중국 내전에 미국이 간여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미국은 대만에 경제원조는 계속했으나  군사원조는 전부 중단했다. 미국이 중공과 잘 지내면 공화당이 민주당에게 중국 정책 실패를 따지고 들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치슨이 대만을 방어선에서 제외한 이유는 민주당 정권이 중국 정책에 실패했다는 비난을 물타기 하기 위해서였다. 


아치슨은 남한이 당면한 위기는 내부 반란에 의한 공산화였다.  국민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따를 가능 성은 경제가 피폐할 수 록 높았다. 미국은 1947년 후반부터 군사원조보다는 경제원조에 강점을 두었다. 경제원조로 민주국가를 만들면 자력으로 공산주의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 장개석을 원조하여 실패했지만 한국에서는 성공할 확률이 많다고 판단했다. 트루만 정부는 3년 동안의 대한 경제 원조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이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행정명령으로 원조를 계속했다.


미국은 북한이 무력으로 침략할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승만이 무력 통일의 의지를 자주 보였기 때문에 군사원조를 꺼렸다. 애치슨은 같은 연설에서 방어선 밖의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유엔에 호소하여 여러 나라가 힘을 모아 침략자를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아치 슨 방어선은 종래의 믿음처럼 결코 미국이 남한을 방어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경제원조로 경제가 좋아지면 내부의 공산주의 책동이 진정될 것으로 믿었다. 자국의 힘으로 외부의 침략을 막게 하고 만약 불리해지면 유엔에 호소하여 미국 단독이 아닌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서 방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꺼려했지만 북한을 포기할 의사는 없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남한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했고 북한이 남한에게 점령당할 것을 염려했다. 그러던 중 마침 중국이 공산화되었다. 만약 필요하면 소련이 나서지 않아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하면 되었다. 그리고 원폭 실험에 성공하여 소련은 미국이 함부로 소련과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스탈린은 남한이 북한을 제압하기 전에 먼저 처서,  한반도의 소련 영향혁을 확고히 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한편 김일성은 국공내전 동안에 김책을 대장으로 하는 무려 3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군수물자를 적극 지원하였다. 마우체둥은 이를 지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우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공을 선언 하자 김일성은 

소련 외에 또 하나의 우방을 확보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중공에 접근하면서 만약 소련이 허락하지 않으면 중공의 원조 만으로 남침하겠다는 신호를 스탈린에게 보내어 그의 허락을 재촉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넘어올 경우 중국이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부쳤다. 마우는 김일성에게 파병을 약속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약속받고 소련 장군들과 남침계획을 수립했다. 


각각 남과 북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무력으로 통일해 보려는 욕망은 남의 이승만이나 북의 김일성에게 모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북은 소련 남은 미국이 지원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이차 대전이 끝난 지 겨우 5년이 지난 상황에서 소련과 미국은 전쟁을 원치 않았다. 더구나 한반도에 한나라를 만드는 데 전쟁까지 할 의욕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침략을 당할 경우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를 포기할 의향도 없었다.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남한을 정복할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장담했다. 스탈린과 마오는 북한의 기존 영토 보호를 위해서 김일성에게 원조를 약속했지 그가 원하는 적화 통일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은 그가 해야 할 몫이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북한군이 쳐들어 가면 남한 전역에 민중 봉기가 일어나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남한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김일성은 그의 말을 믿었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김일성의 적화통일 의욕과 그의 오산이었다. 만약 김일성이 올바른 판단을 하여 전쟁을 계획하지 않고 소련과 중공에게 원조를 청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 가고 전 국토를 초토화했지만 양쪽이 아무런 소득이 없이 끝난다. 외세는 민족이 원하는 통일에는 괸심이 없었다. 외세에 의존하여 통일해 보려는 노력이 허무 함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통일의 첫 단계는 강한 나라이다. 다음은 힘을 바탕으로 한 민족끼리의 소통이다. 그러면 외세는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ference:

https://journals.lib.unb.ca/index.php/jcs/article/view/366/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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