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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an 29. 2021

어느 미군상사의 한국전 참전기

위정자들은 책상에서 전쟁을 계획하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은 시민들이다.

어느 미군상사의 한국전 참전기


Charles B. SChlichter는 18세에 펜실바니아 네이숀날가드로 입대하여 2차대전동안 태평양 전선에서 복부했다. 전후에 2사단 제2의무대대 상사로 근무하던 중 아내 엘리자베트를 만나 결혼했다. 군에 계속해서 근무하고 싶었지만 아내를 위해서 제대하고 퍼니처 세일즈맨으로 일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내가 신문에서 군모집광고를 보고 군입대를 권했다. 상사로 입대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미시간 젠너랄 하스피탈에서 서지칼 테크니션으로 일했다.  어느날 한밤중에 촬스에게 불길한 예감이들었다. “나한테 무슨일이 생길거야, 뭔지는 몰라도 무슨일이 생길 것 같아. 어떤일이 있어도 우리가 헤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꼭 돌아 올 테니 까.” 촬스가 엘리자베트 에게 자신있게 말했으나 두부부는 그날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이틀후에 1950년 7월16일 촬스 상사는 한국전에 차출되었다. 낙동강 전선에 도착한 그는 빠르게 진격하는 미군과 같이 11월 중순 경에 청천강에 도달 했다. 찰스는 엘리자베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은 미국에서 살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청천강 까지 별 저항 없이 진격한 상사의 부대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청천강전투와 장진호 전투의 시작이었다. 중공군의 규모와 전투능력을 크게 과소 평가했던 미군은 참패했다.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촬스상사의 부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군 병력을 태운 트럭 20대가 남쪽에 있는 순천으로 이동 중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 되었다. 180명의 부상병도 트럭에 타고 있었다. 한장교가 “우리는 완전히 포위 되었다. 각자 알아서 도망가라” 고 외쳤다. 트럭에서 뛰어 내려 뛰었으나 어디가 남쪽인지 알길이 없었다. 이미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11월30일 밤이었다. 우왕좌왕하며 가다가 날이 새고 한무리의 미군을 만낫다. 한대령이 15명의 부하와 함께 퇴각하고 있었다. 그들과 합류 해서 행군하다 보니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트럭에 탔던 병사들은 모두 없었으나 180명의 부상병들은 그대로 있었다.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더니 네이팜을 떨어 트렸다. 180명의 부상병이 화염에 쌓이는 것을 뜬눈으로 본 찰스의 얼굴에는 영하의 날씨를 비웃듯 땀이 흘러 내렸다. 그곳에서 얼마가지 않아서 촬스 일행은 북한군에게 포위 되었다. 15명 모두 투항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좁고 길게 파져 있는 트렌치 로 끌고 가서 그 앞에 세워 놓고 기관총을 겨누었다. 찰스는 안 주머니에 간직하고 다니던 성경책을 꺼내다가 땅에 떨어 트렸다. 땅에 떨어진 성경책은 Psalm 23장이 펼쳐져 있었다. “Yea,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thou art with me; thy rod and thy staff they comfort me.”


갑자기 중공군이 나타나서 쏘지말라고 외치자 북한군은 총을 거두었다. 그들은 중공군 포로가 되어 쓸쓸히 북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 순간 찰스에게서 앞일에 대한 걱정이 모두 사라 졌다.   


중공군은 미군포로들을 인솔하여 북쪽으로 행군 했다. 12월초 평안북도는 몹씨추웠고 많은 눈이 내렸다. 세찬 추운바람은 살을 파고 들었다. 미군의 비행기로 부터 폭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낮에는 자고 밤에만 행군 했다. 밤은 더욱 추웠다. 그나마 보통 길로 가지 않고 산길만 골라서 가고 있었다. 부상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의료 품도 없었고 군의관이 포로로 같이 갔으나 행정일만 해서 치료할 능력이 없었다.  급식은 하루 한끼가 전부였다. 그나마 옥수수를 물에 삶아서 canteen cup에 부어 주었다. 포로중에는 황급이 도망가느라고 캔틴 컵을 버린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자에 받던가 두손을 모아  삶은 옥수수를 받아 먹었다. 무려 20일 밤을 산속 언덕길을 뱅뱅돌면서 점차 압록강 쪽으로 올라갔다. 크리스마스 전날밤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길고 높은산을 넘어야 했다. 


그동안 포로는 어느덧 7-800명이 되었다. 무두 지칠대로 지쳤다. 몇사람은 울고 있었다. 한병사가 “Sergent, I can’t go on” 하고 더이상 움직이지를 않았다. 촬스가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았다. 중공군이 다가왔다. 쏘아 죽이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썰매를 가져다 주고 그병사는 썰매에 탔다. 서로 번갈아 가며 썰매를 끌고 행군했다. 해가 뜨자 행군이 멎었다. 썰매에 탄병사의 얼굴에는 서리가 내려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간밤에 얼어 죽었던 것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 죽는 살인적인 추위였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그들은 알루미니움 폐광에 도착했다. 조그만한 막사에 40명씩 들어 갔다. 막사로 걸어들어 가는 동안 개한마리가 뛰어 다니며 낮선사람들에게 다가가 킁킁거리기에 바쁘다. 그날 저녁은 개고기로 잘 먹었다. 막사는 40명이 옆으로 누워야만 전부 잘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너무 지쳐서 그래도 잤다. 그러나 일어나면 엉덩이 대퇴부 근처와 팔꿈치는 감각이 없었다. 하루 한끼 삶은 옥수수 먹고 목마르면 눈을 먹어 가며 거의 한달이 걸려서 이곳 까지 왔다. 대부분의 미군들은 아팠다. 영양부족에 설사 까지 겹쳤다. 상처는 동상이 겹치고 치료받을 길이 없어서 아물지 않았다. 절망 상태였다. 미친사람들도 있었다. 포로들은 이곳을 Death Valley 라고 불렀다. 


청천강 전투 와 장진호 전투에서 패퇴한 미군은 1951년1월4일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주고 수원-원주-삼척 라인에서 반격 했다. 맥아터가 본국으로 소환되고 리지웨이 장군 지휘하에 

중공군을 무찌르고 3월14일에 서울을 탈환 했다. 6월에는 38이남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전쟁 일년만에 제자리로 돌아 온 셈이다.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양측에게 더이상의 영토 점령이 없는 답보상태가 되었다. 


1951년3월17일, Schlichter 상사는 평북 벽동 수용소로 옮겼다. 이곳에는 유엔군 포로 320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10월이 되자 거의 반이 사망했다. 미군군의관이 횐자를 돌보게 했으나 약과 의료기구는 전혀 없었다. 옥수수, 조, 메주콩이 급식의 전부였다. 미군들은 콩을 요리할줄 몰랐다. 설익은 콩을 먹고 설사하기가 일 수 였다. 육식에 익숙한 미군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음식들이 었다. 하루에 무려 25명씩 죽어 나갔다. 

한국군과 터기군포로는 잘견디는 데 미군포로들은 명령체계도 서지  않고 열악한 음식과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중공군은 포로들을 공산주의자로 전향 시키기 위한 세뇌 교육을 시켰다. 하루 6시간동안 앉아서 들어야 했다. 화장실을 가지 못하게 해서 설사난 병사들은 앉은 체로 일을 봐야 했다. 신부나 목사가 포로가 되면 한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공산주의 만이 그들이 인정하는 종교였다. 


1951년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중국은 원래의 영토회복이 목표였고 이미 양측이 만족할만한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내에서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장병들을 한국에서 철수시키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중국인민공화국을 선포한지 겨우 이년째 되는 중국은 전쟁물자를 보급할 능력이 없었다. 자국국민도 식량이 크게 부족한 마당에 한국에 나가있는 중공군에게 식량보급을 충분히 할 수 없어서 굶어 죽는 중공군이 속출했다. 휴전협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되었고 서로 크게 얻는 것 없이 사상자만 늘어 났다.


1951년10월3일 Schlichter 상사가 폐렴에 걸려 입원했다가 나와보니 수용소 분위기 크게 달라져서 사망자가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미군군의관에게 치료임무를 주지않고 공산당 녹십자가 치료를 담당했다. Schlichter 상사는 위생장교로 임명되었다. 수용소 대청소가 이루어 졌다. 


파리 200마리를 잡아오면 담배 한갑을 주었다. 쥐한마리면 3갑이었다. 영악한 터키군 포로는 임신한 쥐를 잡아 21갑을 받기도 했다. 도서관을 만들어서 존 스타인백의 분노는 포도처럼, 디킨슨의 크리스마스 캐롤등의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52년8월12일 Schlichter 상사는 반동분자로 분류되어 Wewan으로 옮겨 수감되었다.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휴전협상 장소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 졌다. 협상이 포로교환 문제가 타결이 안 되어 무려 2년이 넘게 지연되었다. 포로들은 남한과 북한, 중공과 대만을 선택해야 만 했다. 북한과 중공은 무조건 본국으로 유엔군과 남한은 포로의 선택권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Neutral Repatriation Commission을 만들어 모든 포로를 코미숀에 보내 그곳에서 재 심사하여 송환하기로 합의를 보고 휴전협정이 이루어 졌다.  코미숀은 중립국으로 구성되었고 위원장은 인도 장군 티마야였다. 반전분위기에 힘입어 공화당 후보 어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스탈린이 1953년3월5일 사망했다. 


웨완으로 옮긴 Schlichter 상사는 군의관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찰스는 밖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전혀 몰랐다. 급식도 점점 좋아졌다. 깡마른 미군을 온 세상에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였다. 아무튼 포로들은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아내 엘리자베트를 어느날 한 장교가 찾아왔다. 생명보험 가입을 권했다. 찰스는  2년 넘게 전투중 행방불명(MIA)로 분류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울면서 거절했다. 


1953년9월6일 이른 아침이었다. 모두 트럭에 타라고 한다. 트럭은 오전 11시 쯤 판문점에 도착 했다. 덩치 큰 수염이 덥수룩한 주임상사가 트럭으로 닥아와서 “I will call out your last name. You will answer with your first name, middle initial, and your serial number.” 하고 외쳤다.

촬스는 자기이름을 부르자 크게 대답하고 트럭에서 뒤어 내렸다. 주임상사가, “Sergeant, glad to have you home.” 하고 반갑게 맞이 했다. “ Schlichter는, “Fella, you don’t know how glad I am.” 하고 대답했다. 트럭에서 내린 160명의 포로들은 모두 신에게 감사했다. 어떤이는 무릎을 꿇고

어떤이는 그냥서서 신에게 한 없이 감사 했다. 촬스는 포로가 된지 천십일만에 석방되었다. 


1953년9월23일, 찰스가 탄 배는  안개 짙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부둣가는 마중객들로 분볐다.  “Gentlemen, If you look forward, you will see something you never thought to see again” 하는 선장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서 울려 퍼졌다. 안개가 거치면서 골든게이트 브리지 가 보였다. 그리고 공군군악대가 연주하는 “God Bless America”가 들려 오자 모든 병사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커다란 밴드 소리 수 많은 마중객들로 혼잡 했으나, 찰스는 마중나온 엘리자베트를 놓치지 않았다. 무려 3년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행운이었다. 

https://youtu.be/oB2_j7c0d70

Reference; This Kind of War, 50th Anniversary Edition, The Classic Korean War History by T, R, Fehren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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