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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ug 20. 2021

미군철수; 아프카니스탄과 한국

남한에서도 요지음 아프칸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프카이스탄 군대

아프칸에서 미군철수가 시작되자 탈리반이 무서운 속도로 아프카니스탄 전역을 장악 했다. 미군이 훈련시킨 삼십만 아프칸 군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 쳤다. 미군이 도와서 생긴 정부의 대통령은 4대의 차에 돈을 싫고 도주 했다. 한국 사람들은 남의 일 처럼 처다보고 있지만 사실은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 진 적이 있다.그러면서도 일부 한국사람들은 만약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 하면 남한도 아프칸 꼴이 될 것이라고 우려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1949년6월 말, 남한에 있던 미군이 500명의 고문단만 남기고 모두 철수 했다. 1948년8월15일에 건국한 신생국 대한민국(한국)은 국군10만명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한중이 무력통일을 하기위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공)과 전쟁을 시작할 까 봐 한국군을 완벽한 군대로 무장시키지 않았다. 소총하나씩 가진 경찰자위대 정도로 만들어 놓고 떠났다. 


1948년 9월9일 인공이 탄생 했다. 쏘련은 인공의 군대 인민군을 완벽하게 무장시켰다. 쏘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두번째로 핵보유국이 되고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 하자 김일성이 원하던 남한 침공을 허락 했다. 


1950년6월25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처들어 왔다. 인민군은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 했다. 10만명의 국군은 며칠 가지못하고 완전히 괴멸 되었다. 미국이 만들어 준 대한민국 정부는 남으로 피난 하기 시작 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국군이 서울을 방어할 것이라고 라디오를 통해서 방송하고 자신은 한강을 건너 남으로 도망치면서 한강다리를 폭파 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카니스탄 대통령 처럼 제3국으로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대동소이 하다. 물론 이승만도 일본 망명을 고려 했다. 


반도 호텔에 있던 미국 대사관 사람들은 서류를 불 태우고 항공기 편으로 한국을 떠났다.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은 대사관에서 일 했던 한국사람들 명단을 발견 했다. 이 명단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총살 되었다. 인민군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석방하여 치안유지 요원 으로 임명하여 완장을 채워 주었다. 미국과 새정부에 협조 했던 시람들은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거의 대부분이 사살 되었다. 부산 낙동강 유역을 제외한 한국 전역을 점령한 인민군은 전국에서 친미 친정부 인사 총살을 서슴치 않았다. 지금 탈리반이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조금 지나면 친미 친정부 인사를 총살 하는 등 종래의 잔인 함을 들어 낼 것 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만약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한국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면 아프칸이 탈리반 손에 넘어 가듯이 한국도 끝장이 나고 한반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전쟁을 도맡아서 주도 했다. 일년전에 한국을 버리고 떠났던 미군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었다. 


1945년-1948년을 미군정기라고 한다. 미군이 남한(38선 이남, South Korea)을 점령하고 미국이 통치하던 시절이다. 이때는 대한민국이 없었다. 미국은 남한은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으면서 대륙을 휩쓸고 있는 공산주의에 노출 된 지역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한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신탁통치 외에는 향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 한 계획이 없었다. 


1949년10월1일 머우쩨뚱(모택동)은 중공(Republic of China)을 선포 했다. 4년동안의 중국내전에서 미국이 지원하던 장가이석의 국민당이 쏘련이 도와준 머우쩨뚱의 공산당에게 패하고 중국이 공산국가가 되었다. 


미국은 쏘련과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미국 서해안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일본을 최 전방 방위 선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이 일본방어를 위한 육지의 전진 기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트루만 행정부는 한국을 일본방어에 없어서는 안될 지역으로 인지하고 한국 방어에 나섰다. 궁극적으로 미국안보를 위한 전쟁 개입이었다. 물론 냉전시대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다는 이념적인 정당성도 있었다.


변변한 군대도 없는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미군은 전쟁을 도맡아서 진행 했다. 미군은 한달 반만에 전쟁전 한국영토를 회복 했다. 인민군은 완전히 괴멸 되었다. 전쟁 초기의 국군 꼴이 되었다. 미군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 했다. 10월 말에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인공 전지역이 미군 손에 넘어 갔다. 김일성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제 인공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중공군이 처들어 왔다. 저우 엔라이(주을레)는 인공은 중국 방어에 없어서는 안될 지역이라고 했다. 전쟁은 중공과 미국의 싸움이 되었다. 


미군은 중공군에게 밀려 38선 이북의 땅을 내주고 남으로 후퇴 했다. 그리고 중공과 미국은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을 맺었다. 싸움을 잠시 멈춘다는 약속이었다. 두 나라는 인공과 한국에 있는 모든 외국군대는 철수 하기로 약속 했다. 중공군은 인공에서 철수 했지만 미군은 계속해서 오늘날 까지 주둔하고 있다. 



인싸이트 세계최대 규모의 평택미군기지

중국과 미국이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맺어지고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국제사회에 참여 하고 쏘련이 붕괴 되면서 한국의 미군에 대한 전략적 가치가 적어 지는 듯 했으나 미국과 중국이 서로 대립괸계에 접어들면서 주한미군은 미국 안보에 세계어느 미군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평택 미군기지가 세계최대 규모인 이유이다. 


주한미군은 한국정부가 원치 않아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국제정세와 미국내의 상황에 따라서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한국이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미군은 한국을 떠날 것이다. 또한 미군 주둔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한국이 미군 철수를 요구 할 수도 있다. 결국은 한국의 안보는 국군의 몫이다. 한국도 핵 무장을 해야 하고 항공모함도 보유 해야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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