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기철 James Ohn Aug 26. 2021

아프카니스탄; 영국과 러시아

조선도 Great Game의 운동장이었다.

Russian Bear, Afghanistan, British Lion

18세기와 19세기는 제국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이다. 산업혁명으로 근대국가를 건설한 유럽국가들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의 약소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중 가장 힘이 센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지구촌 땅뺏기 시합을 했다. 이를 “Great Game(대경기)”라고 한다. 


섬나라인 영국은 발달된 항해술과 강력한 해군력으로 대서양, 인도양을 휩쓸며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광활한 식민지를 운영했다.  부동항이 없어서 바다로 진출 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고 제대로 된 나라가 없는 동쪽으로 광활한 영토를 한없이 넓혀 갔다.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남쪽을 기웃거리지만 번번히 영국의 방해로 부동항 확보에 실패 했다.   


1853년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크리미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영국에게 패배 했다. 얼마전 푸틴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여 빼앗은 크리미아 반도이다. 간호사들의 전설적인 인물 나이팅게일이 백의의 천사로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전쟁이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뚫고 아라비안 바다로 나가려고 시도 한다.  그러나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방해 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통과해야 한다. 좁은 의미의 중앙아시아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때로는 아프가니스탄도 이지역에 넣기도 한다. 모두 소련에 속했던 나라들이고 종주국 소련이 그어 놓은 국경은 원주민들의 역사, 문화, 종교보다는 러시아와 소련의 국익에 따라서 국경이 그어 졌다. 이로 인해서 요즘에도 민족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파키스탄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1947년에 파키스탄은 인도에서 분리 독립 했다. 1893년 영국령 인디아와 아프카니스탄 왕국은 영국이 설정한 두 나라의 국경선에 합의 했다. 당시의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영국에게 외교권을 넘겨준 영국 보호국이었다. 이를 듀랜드 라인(Durand Line)이라고 한다. 


듀랜드 라인은 파슈툰족이 살고 있는 아프카니스탄 남부 지역을 남과 북 반으로 나누어 통과 한다. 이 선은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외간 회랑 으로 연결되어 중국에 이른다. 외칸 화랑은 손가락처럼 나와 있는 중국과 접한 아프간 영토이다. 불시에 북쪽에 사는 파슈툰족은 아프가니스탄, 남에 사는 사람들은 인도(파키스탄)에 속하게 되었다. 요지음 분쟁의 불씨가 된 연유이다. 한반도의 38선과 비슷하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간을 침공 했다. 전세계의 이슬람교도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으로 소련군에 게릴라전으로 저항 했다. 미국은 군대를 직접 보내지 않고 중앙정보국을 통해 암암리에 무자헤딘을 지원 했다. 전쟁은 무려 10년간 지속 되었다. 1989년 소련군은 막대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 했다.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전쟁 패배는 1991년 소련이 붕괴 되는 데 한 몫 했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 한 다음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으로 혼란에 빠졌다. 많은 아프간 사람들은 근처 파키스탄과 이란등으로 피신 했다. 아프간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올 지도자를 갈망 했다. 1990년대에 듀랜드 라인이 지나가는 파키스탄 북부지역에서 탈레반이 탄생 했다. 탈레반은 파스튠족어로 학생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수니 이슬람이고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활동 했다. 


북쪽에서는 수도 카블의 부패한 기득권층과 마약 밀매를 일삼던 군벌이 날 뛰었다. 이에 비해서 엄격한 이슬람 규율을 앞세운 탈레반은 깨끗한 편이었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탈레반은 빠른 속도로 전국을 장악 했다. 1997년 탈레반은 카불의 무자헤딘 정부를 무너뜨리고 아프간 정권을 장악 했다. 


아프간사람들은 탈레반이 법질서를 확립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도로를 건설하여 평화롭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 해주기를 기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람교의  샤리아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살인자와 간음한자를 공공에서 처형하고  도둑질한자의 손을 자르고 남자는 잘 다듬은 수염을 길러야 하고 여자는 바카로 얼굴을 가려야 외출 할 수 있게 했다. 텔레비존, 음악, 극장을 금지 했고 여자가 10세를 넘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게 했다. 


무지헤딘이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동안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서 무자헤딘을 도왔다. 무자헤딘중에는 후에 알쿠에다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미국, 파키스탄, 사우디의 도움을 받아 소련군과 싸웠다. 오사마 빈 라든도 이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88년에 알쿠에다를 창설 하고 전세계에 반미 테러를 시작 했다. 탈레반은 아프간을 장악한 후에 알쿠에다를 비호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2001년 9.11 테러의 주범이 되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큐에다를 발본색원 하겠다고 아프간을 침공 했다. 미국은 탈레반 에게 정권을 빼았겠던 북부세력과 손을 잡았다. 패배한 탈레반 정권은 다시 자기들의 근거지인 파스튠 지역으로 돌아가서 게릴라 전을 시작 했다. 10년 동안 뭉게다가 떠난 소련 대신 미국을 상대해야 했다. 북부세력 중심으로 친미정권이 만들어 졌다. 소련군이 나간 후 탈레반에게 쫒겨난 부패 세력이 부활한 셈이다. 아프칸 사람들은 다시 탈레반이냐 부패 세력이냐 둘중에 하나를 놓고 선택 해야 했다. 아프칸 사람들은 또한 번 탈레반에게 기회를 주었다.  부패세력을 선택한 미국은 20년을 헛일을 하고 나가야 했다. 소련이 10년 미국이 20년 헛탕을 쳤다. 


강대국이 들랑날랑하며 전쟁을 하는 동안 아프간 사람들은 죽을 고생을 한다. 사는 곳에 적군이 쳐들어 오면 도망가야 한다. 그들은 아프간 안에서 타향으로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아예 외국으로 피난 한다.  소련이 침공하던 1979년 부터 2021년 까지 지난 40여년동안 전세계에 아프간 피난민이 퍼져 나갔다. 제일 가까운 파키스탄과 이란에는 아프칸 피난민이 수백만명에 달한다. 시리아 다음으로 국제 피난민이 많은 나라이다. 날라오는 포탄과 공중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사는 집을 파괴하고 죄없는 사람들이 죽거 나 다치게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시리아보다 더 살기 어려운 나라라고 한다. 강대국의 놀이터, 대경기의 운동장은 이렇게 폐허가 되어 간다. 요지음 카불 비행장의 혼란은 이미 진행되던 지옥 탈출의 한장면일 뿐이다. 


<조선에서의 대경기(Great Game)>



프레시안 거문도 위치

1885년3월30일, 러시아 군대는 아프가니스탄 왕국 군대를 공격했다. 편제(Panjdeh)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이 외교권을 가지고 있는 허수아비 왕국 이었다.  왕국의 군대는 영국군이 훈련시켰다.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에게 전멸 당했고 편제는 러시아가 점령 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가 위험해 졌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 점령을 완료 했던 시기 였다. 영국의 여론이 들끓었다. 영국은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준비에 들어 갔다. 


영국은 블라디보스토크 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 거문도를 점령하고 이곳에 해군기지를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Panjdeh Incident가 일어난지 15일 후인 1885년4월15일  일본 나가사끼에 주둔하고 있던 윌리암 다울 해군중장은 군함 3척을 이끌고 거문도를 점령 했다. 영국 해군은 2년동안 거문도에 머물 었다. 그 동안에 영국은 거문도와  홍콩, 상하이를 연결하는 케이블을 묻었다. 러시아가 향후 10년동안 대한해협을 위협하지 않겠다고 영국에게 약속하고 영국해군은 거문도에서 떠났다. 당시의 조선은 아프가니스탄과 신세가 비슷 했다. 1882년 임오군란때 대원군을 축출하고 고종과 민비를 구해준 청나라는 조선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 했다. 2년후인 1884년 개화파와 일본이 작당하여 구테타(갑신정변)를 일으키자 청나라가 나서서 쿠데타 세력으로 부터 민비와 고종을 구출 했다. 향후 10년 동안 조선은 사실상 청나라의 식민지였다. 1885년은 아프가니스탄은 외교권을 영국에게 조선은 청나라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조선조정은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점령 했다는 보고를 청나라 주제 영국 대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한달 후에 받게 된다. 이문제에 대한 협상도 청나라와 영국간에 이루어 졌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은 청나라로 부터 독립했지만 홀로 서야 했다. 일본은 조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만, 유쿠열도와 요동반도도 청나라로 부터 양도 받았다. 그러나 일주일 후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 시켜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할 것을 주장 했다(삼국간섭). 일본은 도저히 당시의 초강대국인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이길 수가 없었다. 두고보자며 이를 악물고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 주었다. 청나라의 이홍장은 일본에게 배상금을 주어야 했다. 러시아는 막대한 자금을 청나라에게 융자해 주고 만주 철도 부설권과 포트 아터(요동반도 항구)조차권을 차지하게 된다. 러시아는 철도 부설 보호 명목으로 무려 15만명의 군대를 만주에 파견 했다. 만주는 사실상 러시아 땅이 되었다. 러시아는 꿈에 그리던 부동항을 마련 했다. 


민비는 일본이 러시아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에게 기대기 시작 했다. 친러파가 집권하고 러시아는 조선에서 많은 이권을 차지 했다. 일본은 민비의 정적 대원군과 개화파를 끌어 들여 민비를 제거 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더욱 러시아에게 의존 했다. 러시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서 한구 조차등 많은 이권을 차지 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문제에 대해서 서로 협상을 하며 공존 했다. 38선, 39도선에서 나누어 먹기등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 왔다. 일본은 그동안에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를 했다. 미국과 영국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모으고 스파이를 파견하여 러시아 정국을 염탐 했다. 


영국은 포트 아터와 조선을 통해서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있는 러시아를 견제해야 했다. 그레이트 게임은 드디어 동쪽 육지의 끝 조선에서도 벌어지기 시작 했다. 영국은 직접 러시아와 멀고 먼 동쪽 끝에서 러시아와 대결하는 대신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로 결정 했다. 1902년 일본과 영국은 동맹을 맺었다. 전일본은 축제 분위기 였다. 동양의 섬나라가 세계 최강국 대영제국의 동맹국이 되다니, 꿈같은 이야기 였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를 공격 했다. 전쟁터는 한반도, 만주 그리고 서해 였다. 한반도는 대경기의 운동장이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굴복 시키고 한반도를 차지 했다.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를 일본에게 내주고 동북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일본이 영국의 도움 없이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영국은 일제강점의 협조자 였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공산대국 소련이 등장 했다. 이차대전 말기에 소련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를  침공 했다. 이차대전으로 쇠잔해진 영국의 세계 경영을 미국이 떠 맏기 시작 했다.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 했듯이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38선을 그어 서울을 포함한 남한을 소련의 침공으로 부터 보호 했다. 


그 후 미국과 소련은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이 벌렸던 대경기의 전통을 이어 받아 냉전(Cold War)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대결 했다.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이념에 맞은 나라를 세계 곳곳에 만들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이 만들고 대한민국은 미국이 만들었다. 이런일을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이라고 한다. 미국이 국가 건설을 해서 성공한 나라는 한국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사람들의 자질이 뛰어나고 반공정신이 투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한다. 


한국이 미국의 국가건설 사업의 가장 훌륭한 성공 사례라면 아프가니스탄은 폐작이다. 복잡한 내부사정 때문에 애초 부터 미국의 이상을 구현하기 힘든 나라 였다. 그러나 두나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강대국에게 휘둘림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800에서 1953년 까지 150여년동안 한민족은 망해가는 나라 그리고  망한 나라에서 살다가 새나라를 만들겠다고 전쟁 까지 하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룩 했다. 이프간 처럼 한민족도 만주, 연해주, 일본등  살기 힘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전쟁 통에는 이쪽을 도와 주면 저쪽에서 저쪽을 도와 주면 이쪽에서 도륙을 했다. 남과 북에서 실향민들이 속출 했다. 오늘날 잘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다 옛날이야기이다. 


한국사람들과 같이 일했던 아프간 사람들 371명이 수송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이들은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에 정착 할 준비에 여념이 없다는 소식이다. 아프칸과 한민족은 러시아와 영국이 벌였던 그레이트 개임의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약소민족의 비극은 무엇보다도 나라가 힘이 없는 데서 비롯 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국민은 국가를 떠나는 수 밖에 없다. 국가가 제 구실을 하려면 부국강병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작가의 이전글 미군철수; 아프카니스탄과 한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