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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자크린느 뒤 프레

-천재적 재능이 파멸시킨 불행한 여자

by James 아저씨

이 이야기 들에 나오는 분들은 내게 문화적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내 코드가 맞는 사람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내 영혼의 팬?

그냥 쉽게...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들은 나의 십 대 말부터 지금까지 내 감성의 심연에 들어온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음악, 미술, 문학, 혁명가, 대중예술, 스포츠, 건축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글들입니다

그래서 깊이 없는 그저 내 감정, 내 마음대로 쓴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둡니다.


20번째: 자크린느 뒤 프레

1.jpg 1945~1987

한때는 클래식 음악을 꽤 들었고 연주회장도 제법 드나들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조예가 깊다거나 음악적 깊이가 깊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그저 그때 클래식 음악에 막 빠져들었고 마구잡이지만 음악을 듣는 게 좋았던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니 내 음악적 선호의 양상을 보니 10대 때는 팦송에 빠져들고 가요에서는 folk음악을 듣고... 20대 때는 딱히 음악적 취향이 없이 그냥 듣다가 클래식 음악을 접하다 보니 그 맛(?)을 알고 30대쯤엔 정말 좋아했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40대엔 재즈에 좀 기울이다 중년 이후엔(김광석의 죽음 이후)

가요도 팦송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니 자연 클래식 음악과 국악으로 다시 회귀가 되었다. 그랬던 때 한창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잡식성으로 이것저것 듣고 그저 좋구나... 나 연발했다가 점점 귀가 트이는 것 같은... 일테면 같은 곡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지휘자에 따라 다른 느낌이고 어떤 악단이냐가 다르고... 그렇게 귀가 열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신기했다. 클래식은 그냥 똑같다는 내 싸구려 귀가 뭔가를 구별해 낸 것이다. 그 무렵 후배 하나가 내게 음반을 소개해주었는데 바로 이 '자크린느 뒤 프레'였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였는데.... 뭔가 정말 다른... 그 곡을 분명 그전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들었을 때와 다른데... 그게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기존의 들었던 과는 정말 다른 느낌으로 좋아진 것이다. 그리고 '자크린느 뒤 프레' 대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더 이상 그녀의 실제 연주를 직접 볼 수 없다.


나는 처음엔 뒤 프레(Du Pré)라는 성 때문에 프랑스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 둘 다 순수한 영국인이다. 1945년 영국군 장교인 아버지와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부터 어머니께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엔 동요로 시작했지만 그녀의 천재성 때문에(음악적 천재들은 대개 5세 이전에 뭔가가 발현이 되는 건지...) 어려운 악보를 어머니가 따로 그려 교육을 시켰다고... 그러다 11세에 영재발굴을 위한 오디션에서 발굴이 돼 우수한 성적으로 길드홀 음악원에 입학했고 16세인 1961년 데뷔 리사이틀을 열었다. 16살의 나이에 샛별처럼 등장하여 탁월한 재능의 연주력으로 음악계를 장악한 그녀는 혜성 같은 첼리스트로 주목을 받았다. 바로 그때 1962년 BBC 심포니와 엘가의 '첼로협주곡 e단조'를 협연한 연주에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고 하고... 이 음반은 그 후 명반으로 꼽히게 되었다. 10대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언론에서는 '천재가 태어났다'라고 극찬을 하고 1965년 스무 살에는 뉴욕으로 진출하여 미국 청중까지 휘어잡으며 최고 연주자로서의 자리를 확인했다. 그야말로 날개를 단 듯 날던 그녀는 순회공연을 시작했고 1966년엔 운명의 상대... 지휘자겸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고 이들은 열열한 연애 끝에 이듬해 결혼식을 올려 마치 '슈만과 클라라'에 비교가 되며 최고의 음악가 부부의 탄생을 알리는 듯했다. 그처럼 이들은 음악적으로 최고의 파트너였고 여러 작품을 함께 연주하고 음반으로 남겼다. 이 둘의 연주한 곡은 연주 때마다 명연주라고 평가를 받았고 음악적으로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창 최고 연주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1971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갑자기 전신 통증과 이상을 보이자 병원에선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연주자로서는 사형선고였다. 결국 1973년엔 '주빈메타의 뉴필하모니'와 협연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며칠 후엔 '레너드 번스타인의 뉴욕 필하모니'와 '브람스의 2 중주곡'을 연주하며 모든 활동을 끝냈다. 그리고 1975년 마침내 전신 마비가 되었고 이후 침상에서 자신의 전기를 쓰고 자신의 연주 음악을 들으며 말년을 보내다 마침내 말도 못 하게 되고 눈도 볼 수 없는 전신 마비 상태에서 1987년 영원히 눈을 감았다.


문제는, 남편 '바렌보임'과의 결혼 생활이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었는지 몰라도 부부관계에서는 행복하지 않았는데 남편 '바렌보임'은 투병 중이던 그녀를 버리고 다른 피아니스트와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그녀 또한 다른 남자들과도 바람을 피웠는데 '바렌보임'의 제자, '바렌보임'의 지인등과 바람을 피워 소위 콩가루 집안이 되었는데 이에 '바렌보임'은 그녀가 죽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혼을 했고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결혼 생활 중 '바렌보임'의 완벽주의와 좋지 못한 인성으로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고 투병으로 연습에서 실수가 잦아 지자 불같이 화를 내며 닦달하기도 하고 아픈 그녀의 상태에도 완벽함을 강요하고 그녀를 감싸주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바렌보임'이야말로 천재로서 모든 연주를 악보 없이 연주했으며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는 등 삶도 연주도 완벽으로 살아왔기에 그는 그녀의 풀어지는 일상이 못 견뎌했다고 한다. 이에 숨 막히는 그와 삶 속에서 그녀는 우울증으로 약물에 의존했고 알코올중독이 되기도 했으며 남편의 강압에 맨발로 도망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 제 발로 남편에게 돌아가기도 하며 둘만의 중독된 사랑인지 불행한 삶을 지속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를 음악계의 '프리다 칼로'로 비견하기도 했다. 그녀들의 천재성이, 한 남자와의 지독한 사랑이... 비슷해서 그런가 보았다. 그래선지 금년 5월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프리다 칼로, 자클린느 뒤 프레를 만나다"라는 기획공연이 열렸었다.


그녀의 대표 연주는 물론 '엘가의 첼로 협주곡 2번 e단조'이지만 그녀의 연주 목록 중 끝판왕은 아마도 피아노에 남편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 비올리스트 '핀커스 주커만', 첼로는 그녀 자신... 그리고 콘트라베이스는 지휘자로 활동하는 '주빈 메타' 등이 함께 연주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 일 것이다. 이 조합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구성하지 못할 전무후무한 연주자 조합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합? 어떤 공통점이 있어 보이지 않나? 바로 이들은 유태인으로 세계적 음악가중 이 유대패밀리들이 모여 연주를 한 것이다. '자크린느 뒤 프레'만 유대인이 아니었다.

https://youtu.be/CwFeshwZPUA? t=16 <--요길 눌러서 재생시키세요

피아노 5중주 <송어> 실황

또 그녀에 대해 유명한 에피소드는 그녀의 연주 때 보잉은 너무나 활력이 넘쳐 1968년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 때 드보르작 첼로협주곡 연주 시 그녀의 첼로 스트링이 그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나 줄이 끊어지는 장면이 BBC실황 중계에 그대로 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현을 바꾸게 2분만 기다려 주세요"라 하고 현을 바꾸어 연주를 계속했다고 한다. 이 장면도 영상으로 남아 있다.

https://youtu.be/U_yxtaeFuEQ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실황 3악장- 초반(본 영상의 29분 38초)에서 1번 현이 끊어진다.

그녀의 삶은 언니 '힐러리'가 전기를 남겼고 그 전기에 의하면 지금 내가 여기에 축약하여 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천재성과 불행이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렌보임'과는 사후에도 교류가 계속되었다고 전기에는 나오며 그녀의 언니인 '힐러리'는 '바렌보임'은 그만의 방식으로 동생 재키를 사랑했다...라는 걸로 그 사랑을 덮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렸을 때 자신 보다 3살 많은 당시 12살인 언니에게 자기는 어른이 되면 전신마비가 되어 걷지 못할 것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말은 그 후 현실이 되어 15년간 투병을 하다 온몸이 마비가 된 채 그녀는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를 유난히 좋아했다는데 마침 그해 가을, 때 아닌 강풍과

이른 눈발이 영국전역을 뒤덮던 1987년 10월 19일 저녁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묘비명에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사랑했던 아내'라는 묘비명이 적혀 있다고...


#자크린느 뒤 프레 #다니엘 바렌보임 #엘가 첼로 협주곡 2번 e단조 #다발성 경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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