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기억의 소환

세 친구 이야기- 1

by James 아저씨

PC에서라면 동영상의 노랠 들으며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https://youtu.be/MezvFK_r-MI

PC에서는 노래를 들으며 글을 읽어주세요


우리 셋은 서울 변두리 강북에서 자랐다.

우이천이 흐르는 동네였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강북구(당시는 성북구였고 그 후 도봉구로 바뀌었다가

다시 분구가 되어 강북구가 되었다) 쌍문동이 내 고향이다.

그리고 한 친구 K는 전라도가 고향인데 아주 어릴 때 서울로 부모님 따라 올라와

살게 된 곳이 그 동네였고

또 한 친구 S는 경상도 어디라고... 하는데 이 친구 역시 어릴 때 부모님이 상경하여

자리 잡은 곳이 바로 그 동네였다.

60년대 그곳은 농사를 짓는 논과 밭이 있었고 개천에선 멱감고 야산으로 돌아다니며

어릴 땐 그야말로- 그 당시 서울변두리 애들은 다 그랬듯- 방목된 양들처럼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놀았다. 몇 학년 때인지... 우린 따로 같은 반이기도 했지만 셋이 같은 반이었던 때는 없었다.

당시엔 국민학교 학생수가 한 반에 8~90명쯤 되는 데다 반도 21반까지 있었던

초 매머드 국민학교였으니 같은 반이 될 확률도 낮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셋은 같은 동네고 하니 같이 자랐고

중학교는 S만 다른 학교로 배정이 되었고 K와 나는 같은 중학교로 배정이 되었다.

그 중학교는 유재석이 졸업했다는 'ㅅ'중학교였다.

나는 그 중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중학교 때는 어릴 때처럼 매일 몰려다니는 일은 없었고

어쩌다 S를 만났고 K와는 가끔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 외에는

예전처럼 몰려다니며 놀지는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S는 공고로, K는 상고로... 나는 인문계학교로 진학하여 길이 나뉘었다.

그렇게 길이 다른 곳으로 따로... 조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S는 국비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졸업을 하면 바로 군대를 가야 했다.

어쨌든 녀석은 장남으로 군에 일찍 들어가 하사관으로 근무하며 결혼도 일찍 하여

21살인가 22살에 결혼을 했다.

당연 아이도 일찍 나아 스물 초반에 첫아들을 낳았다.

너무 신기했다. 내 친구 녀석이 애 아빠가 되었다는 게...

나는 그때 학생이었고 결혼이란 건 어른들이 하는 것인데

그 녀석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 있었다.


K는 상고로 진학하여 보통 3학년 2학기쯤 되면 취업을 하는 애들도 있었고

실습인지 뭔지 기업체에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녀석이 어딘가 실습인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턴사원이었는지 취업을 했다고

술을 사겠노라 했다.

녀석은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으니 고삐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연 스포츠머리에 누가 봐도 고삐리였다.

그런데도 녀석은 나를 데리고 술집엘 데리고 가서 술을 먹였다.

당시 변두리 맥주집엔 칸막이가 있고 이쁜 누나(?)는 아니지만 여하튼,

여자가 있는 술집이었다.

나는 너무 어색하게 술집 여자들이 있는 곳에서 술을 마셨다.

그 술집 여자들이 고삐리 같다고 놀려대는데 내 친구는 나를 방위라고 소개했다.

술 마시기 무슨 게임 같은 걸 했는데 신기하게 나는 게임에서

걸리지 않아 술을 안 마실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어쨌든... 고삐리인 주제에 여자 있는 맥주집에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새가슴이라 취하도록 마시진 못하고 맥주 몇 잔을 먹었다.

상고 출신들은 2학기면 취업을 해서 이미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셋은 각자 다른 길에서 성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70년대 말... 박정희가 총을 맞고 떠났고

이때 세상은 18년간의 어둠에서 나와 밝은 날이 올 것이라고 잠시 믿었지만

그해 겨울은 전두환의 탱크가 세상을 점령했다.

이듬해 80년, 세상은 빛나는 서울의 봄을 꿈꾸다

또 한 번 긴긴 암흑의 세월이 되었다.

남녘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했다.

나는 이불속에서 주먹을 쥐고 분개는 했지만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고

학교 생활은 엉망이었다.

그나마 긴긴 휴교령으로 학교를 나갈 수도 없었고

나는 골방에 틀어 박혀 글자나 파먹는 벌레가 되었다.


그러면서 또 시간이 흐르고 S의 아들이 커가는 걸 신기하게 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둘째 아들을 낳았고... 나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아직도 삶의 책임을 스스로 지지 못하는 인간인데

그는 두 아이의 아빠에 한 여자의 남편으로 너무나 묵직한 길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끔 휴가를 나와 나와 술을 마시면

그 끝은 이내 목소리를 높여 나와는 설전이 벌어지다 끝이 나곤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 군에 입대를 했고 군사정권에서 군인으로 철저하게 물이든,

그야말로 바늘 한치도 들어갈 틈이 없는 완벽한 반공, 열혈 애국지사 되어

당시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싹 잡아다 가둬야 한다고 열을 올리고

'지금 북한이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 있는데 배에 기름 낀 대학생이란 것들이 데모를 하다니...

나라를 망하게 할 놈들'이라 분개를 했다.

군바리 정신 충만한 그는 그야말로 전사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올곶은(?)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아갔다.

그렇게 시간은, 세월은 우리를 각자 다른 곳으로 점점 더 멀게 떼어 놓았다.


한편 K는 드디어 어엿한 직장을 들어갔고 바른생활의 청년으로 직장 생활을 해가며

'나 성실'이란 명찰을 단 듯 너무나 바르게 직장 생활을 했다.

녀석은 S와는 다른 결로 반듯한 길을 갔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세월을 살아가며 세상에 대하여

내 나름의 길을 찾는다며 갈지자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직장을 옮겨 간 곳이 하필 K의 직장이었다.

부서는 다른... 스물 후반에 녀석과 나는 같은 직장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노조가 생겼고 곧 노조 활동을 했다.

그 뜨거웠던 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이 일던 때였다.

그리고 K는 노조를 담당하는 업무를 하는 노무과 직원이 되었다. 하필...

그렇게 셋은 또 점점 다른 길로 더 멀어져 갔다.


세월은 또 흘렀고

일찍 결혼하여 일찍 자리를 잡은 S는 그 후 전역하여

그의 특기병이었던 기술로 공업사를 차려 돈을 벌었고 집도 장만했고 행복한 듯했으나

이혼을 했고 큰 아들은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서른을 얼마나 넘겼을 때인지...

녀석은 그 후 폭음을 했다.

그는 다 가졌다가 다 내놓고 세상을 원망하며 예의 폭음뒤에는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어 슬프다고 했다.

그는 민주화니 뭐니 하며 날뛰는 빨갱이들 때문에 슬프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의 정서가 더 슬펐다.


K는 장남으로 대가족의 무게에 휘청일 듯도 했으나 언제나 반듯했고 그의 속내를 보이진 않았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누구나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야지

모여서 머리띠 두르고 목소리를 높이고 주먹 쥐고 큰 소리 내는 게 못마땅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정말 악착같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졸출신 사원이지만

주어진 일은 다 해낸다는 생각인 듯, 이 부서 저 부서를 옮겨 다녀도

어떤 한직으로 발령이 나도 다 수행해 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기 동기들은 승진도 하고... 위로 올라갔지만

그는 낮은 보직에 내내 한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중엔 서울에 집도 장만하고...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노력으로 작은 것들을 일구어 나간다고 했다.

나는 그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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