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서 동료로, 다시 친구로.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관계의 경계선
'ㅇㅇ씨는 잘 지내요?'
가장 친한 친구가 우리 회사, 우리 팀으로 입사했다가 퇴사한지 1년이 지난 요즘도 종종 듣는 말이다. 남 일에 무슨 관심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진짜 관심이라기 보다는 인사치레이겠지. 연예인들의 '영고짤(영원히 고통받는 짤)'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장 친한 친구를 회사에 들인 죄로 친구의 퇴사를 1년 동안 수시로 강제 회고하고 있다.
그 친구는 프로젝트로 여러 차례 같이 일했던 적이 있었고, 꽤 잘 맞았다. 나름 높은 내 기준에 일도 잘 했다. 일을 못 한다 생각했으면,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회사 초창기에도 정식으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던 적도 있다. 이번에도 삼고초려였다. 그 정도로 같이 일하고 싶었다. 나에겐 일을 잘 하고 믿을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다 좋았다. 새롭게 직무전환을 한 친구가 조금 미숙한 일들이 있어도 나에게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웃지 못할 치명적인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친구의 잘못은 아니었다. 운이 나빴던 것 뿐. 우린 퇴근하고 자주 저녁이나 술을 같이 먹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그저 즐거웠다. 어딜가든 가장 믿을만한 직원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 소개했다. 사소한 것들부터 회사와 팀에 대한 고민까지, 많은 부분에서 이야기를 털어놓고 의견을 물었다. 그렇다고 모두 그 친구의 의견대로 결정한 건 아니지만, 나와 다른 경험을 쌓아온 친구의 솔직한 의견이 나에게 필요했고, 그걸 존중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느 스타트업이 그렇듯이 우리 회사는 많은 변화 속에서 방향 뿐 아니라 속도와 성과가 중요했다. 충분히 여유있게 일을 배우고 가르쳐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서로 실망하는 일들이 생기고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어느 누가 잘못한 것이라 하기 어려울테지만, 확실한 건 아무래도 상사인 나보다 그 친구가 10배 이상은 더 참았으리라는 거다. 충분히 날 배려하려고 노력했을거다. 그런 아이니까. 하지만 그에 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팀과 회사를 이끌어야했고, 회사에서 팀원들에게 일반적으로 하는 것 보다 그 친구의 마음을 더 신경써 줄 여유는 없었다. 그게 맞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언젠가 친구는 나에게 '사적으로 밥 먹지 않기'를 선포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해했다. 높은 확률로 회사나 일 이야기가 이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친구가 나와의 관계를 불편해한다고 느끼자 모든 것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모든 피드백이 조심스러워졌고, 대화하기 두려워 피드백을 포기하기도 했다. 대신 내 미간은 갈수록 좁아지고 한숨은 늘었다. 친구와의 대화 대신 일기장을 선택했다. 아마 이때부터 악순환이 시작된 것 같다. 그 뒤로 친구가 퇴사할 때 까지, 나는 단 한번도 친구에게 밥을 먹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처음엔 분명 배려였지만, 끝은 내 오기였다. 내가 언젠가 한 번, 모르는 척 '술 한 잔 하자' 얘기했다면, 아직 함께 잘 일하고 있을까?
친구는 2년 정도 회사를 다니고 퇴사했다. 사실 좀 걱정이 되었다. 나를 믿고 새로운 일에 발을 들였을 그 친구에게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꼈다. 물론 다시 예전에 하던 직무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친구의 선택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괜히 들쑤시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럭저럭 예전 회사에서 나름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고 있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게 꼰대 마인드인가 싶지만서도 감히 조언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같은 전공에 같은 직무전환을 겪었던 사람이기도 하고, 그 친구를 개인적으로도 일적으로도 가장 잘 알고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대단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는 심지어 거의 반 강제로 격렬히 직무전환을 겪었던 사람이라, 사소한 고민상담이나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정도의 도움은 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만약 나였으면 나에게 무엇이든 물어봤을텐데, 혼자 끙끙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면서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는 친구가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아직 일적으로 서운한 마음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히 찔리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마음에, 언제나 조심스럽게 생각만 할 뿐이었다.
얼마전 이런 내 마음을 다른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어쩌면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는 내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너는 ㅇㅇ가 어디까지 내려가길 바라는 거냐'며,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정말 멋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너한테 물어보느니, 취업을 안하고 말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별로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멋이 없다'는 이야기에 꽂혔다. 내가 멋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원래 멋이 있었던 적이 없다ㅠㅠ), '이게 그렇게 잘못된 생각인가?' 하는 물음표가 그날 밤 내 머릿속을 밤새 맴돌았다. 나한테 물어보는 게, 차라리 취업을 포기할 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가? 정말 그렇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암담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은 꼬리를 물고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 존재가 그 친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정말 나한테 그런 걸 느꼈을까? 아니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같이 일 할 때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도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러다 다른 말들이 같이 떠올랐다. '어디까지 내려가길 바라는 거냐'. 어디까지? 내려간다? 취업 준비중이면 내려가고 있는 건가? 나는 친구가 내려갔거나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진심으로. 그 친구는 나 때문에 스스로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혹은 주변에서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가 그렇게 만든 걸까? 한참동안 괴로웠다.
관계란 결국 서로 다른 시선과 감정의 교차점이다. 나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내 경험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친구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 들여질 수 있다. 진심 어린 걱정과 응원이었을지라도, 오히려 친구에게는 무언가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혹은 '내가 더 잘 안다'는 오만함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관계는 다른 차원의 복잡함을 가져온다. 서로 다른 위치와 책임감, 그리고 회사라는 환경이 만드는 압박감이 우리의 관계를 조금씩 흔들어놓았다. '친한 친구와 함께 일하는 즐거움'은 현실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감과 친구의 기대 사이에서 점차 희미해졌다. 결국 그 모호함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길을 택했다. 우리가 함께한 2년은 서로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을 테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우리 관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관계의 진실은, 이 모든 일을 함께 겪은 나와 그 친구 둘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빌어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너와 일했던 2년, 모든 것이 좋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너는 나에게 가장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팀원이었다는 거야. 너가 선택한 도전이 나에게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대단해. 내가 절대 못 할 선택이거든.
우리 관계의 변화가 반드시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 지금 당장은 그 2년이 우리 사이에 장벽이 되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우리 우정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지 않을까. 모든 관계는 시간과 함께 변하고, 때로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진정한 우정은 그런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해지는 것일 테니.
예전처럼 너에게 내가 언제든, 무슨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친구였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렵더라도, 꼭 다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