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나의 모순에 관하여
삼십 대가 되고 많은 관심사가 바뀌었다. '지금부터 관리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마치 신호탄처럼 내 관심과 소비습관을 바꾸어 놓았다. 그 중 하나는 머릿결에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난 사람이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볼 때 머릿결과 구두를 봐요"라고 했던 드라마 <안나>의 대사에서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머릿결은 두피건강에서 시작되고, 두피 건강은 좋은 샴푸에서 시작된다는 말에 혹해 '좋은 샴푸'를 찾아 헤매다, 어느 인플루언서의 추천으로 다비네스 샴푸를 알게 되었다. 한 병에 10만원이 넘는 샴푸, 세 병 이상 구매하면 여행용 샴푸도 서비스로 준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주문 버튼을 눌렀다. 내 두피를 위한 투자라며, 자고로 30대라면 이런 것에도 돈을 쓸 줄 알아야지, 혼자 합리화했다.
직접 사용해본 샴푸는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빨간 색상과 젤같은 제형, 생각보다는 거품이 잘 나지 않고 뻑뻑했지만 '좋은 샴푸는 원래 그런가 보다, 엘라스틴이나 미장셴같은 샴푸들 보다는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용했다. 빠르고 드라마틱한 효과보다는 꾸준한 누적을 기대하며 구매했었기 때문에 무난히 잘 사용했던 것 같다. 애초에 내 두피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했던 터라 효과를 느끼는 데에도 한계는 있었다.
그러나 샴푸의 소비기한은 내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샴푸는 평생 쟁여두고 쓰는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여행용 샴푸는 개시도 못한 채 소비기한이 2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어차피 챙겨가야 하는 샴푸, 유럽 여행에서 다 써버리자'라는 결심으로 가방에 넣었다. 친구에게 샴푸를 챙기지 말라는 당부까지 했다.
그런데 웬걸, 여행지에서는 거품이 너무 잘 나는 것이다. 거품이 잘 나다 못해 아주 부드럽고 풍성했다. 향도 좋았다. 유럽의 석회수 때문에 더 뻑뻑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트리트먼트를 깜빡한 날에도 개털이 아닌 사람의 머리칼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집에서는 아껴 쓰느라 충분한 양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로소 제품의 진가를 느꼈지만, 이미 소비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나오는 연진이의 대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게 모시고 살 가방을 왜 사."
우리는 종종 '특별한 날을 위해' 좋은 것들을 아끼곤 한다. 비싼 와인, 고급 향수, 품질 좋은 화장품... 그리고 내 경우엔 다비네스 샴푸까지. 원래 목적은 나를 위한 투자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자체가 '아껴야 할 대상'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싼 샴푸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그것을 '아끼지 않고' 사용했을 때였다. 마음껏 펌핑하여 풍성한 거품을 내고, 오래 사용할 시간이 없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샴푸의 질감과 향을 온전히 즐겼을 때였다.
진정한 가치는 소유가 아닌 경험에서 온다. 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얼마나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껴 쓰느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소비기한만 축내는 '소유물'에 불과하다.
샴푸 한 병으로 깨달은 소비의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 마음 놓고 쓰지도 못할 만큼 비싼 물건을 사지 말 것, 둘째, 좋은 것을 구매했다면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비싼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것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지혜와 여유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무엇이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면서도, 좋은 것을 마음 놓고 경험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