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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Sep 13. 2016

명절과 평화에 관하여

민족의 대명절, 구정.

고향에 가지 않은 홍대지엔느들이 모두 스타벅스로 모였다. 전부 노트북을 하나씩 앞에 두고 이어폰을 꽂은 채 앉아 있다. 소설책, 잡지, 토익책, 연습장들이 커피잔 곁에 가득 쌓여 있다. 바글바글한데 조용하고, 바쁜 것 같으면서도 마음은 편안해 보인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고향에 가지 않았다. 혼자 전기장판 위를 고양이마냥 굴러다니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궁금해져 카카오스토리를 깔았다. 목록에 뜬 이 사람 저 사람의 일상을 구경하다가 큰 외숙모의 카스에 들어가 봤다. 음, 가족들이랑 유럽여행을 다녀오셨군. 여전히 아기자기한 찻잔 같은 것을 좋아하시는군. 너무 호들갑스럽지 않게, 적당히 귀염성 있는 정도로 자식 자랑도 해놓으셨군. 그러다가 숙모가 누군가와 댓글로 대화를 나눈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넌 큰며느리는 아니겠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아프시면서 전처럼 여섯 남매와 그 식구들이 한 집에 들어앉아 명절 밥을 먹는 일은 없어졌는데도 숙모는 본인이 '큰며느리'라는 게 여전히 그토록 원통한가 보다. 명절 시작도 전에 이미 열이 받아 있는 숙모가 손 끝에 화를 담아 바락바락 음식을 장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작은 체구 안에 원망과 진절머리를 가득 채워 마치 그 힘을 원동력으로 온갖 먹을 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혼자 일찍 숙모 댁에 가서 음식 하는 것을 도울 때면 숙모는 "그래도 너 밖에 없다"는 말을 묘하게 기분 나쁜 뉘앙스로 내뱉곤 했다. 싫은 사람들 주둥이에 들어갈 음식을 수십 년 간 만들어낸 숙모의 노고는 특유의 속물 근성과 무리한 싸움의 방식 때문에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외면 당했다. 묵은 설거지처럼 쌓이던 원한은 결국 숙모의 몸을 뚫고 병의 형태로 나타났다. 우리 가족은 더 이상 명절 때 얼굴을 보지도, 안부를 묻지도 않는다. 


나랑 동갑인 그 집 아들은 다 된 갈비찜이나 집어먹을 줄 알지 1도 도움이 안 됐다.


내가 '숙모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냐'라고 말하면 본인도 한 때는 며느리였을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심술 맞은 시누이의 얼굴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와.. 엄마랑 나는 정말 맞는 게 하나도 없어..' 뭐 엄마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나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며느리가 받는 스트레스, 특히 명절 때 며느리가 받는 스트레스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고강도 육체적 정신적 노동으로 인한 산업재해" 수준이라고 본다. 직장인 며느리가 심한 몸살을 앓는 와중에도 혼자서 온 친척들이 먹을 음식을 했는데 "네가 더 일찍 일어나 장을 보러 가지 않아 토란 알이 작다!"며 밥 먹다 역정을 낸 시아버지라든가. 그리하여 토란을 그렇게 좋아하던 며느리가 토란 먹다 목이 막혀 일주일은 앓은 사람처럼 다시는 토란을 먹지 않게 되었다는 사연이라든가. 평생 지내는 둥 마는 둥 하던 제사를 며느리 들임과 동시에 안동 종갓집 스타일로 지내보겠다고 해서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시어머니라든가. 명절에는 친정보다 시댁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갓 결혼한 친구라든가. 그래서 생겨나는 갈등과 적의와 식은 전처럼 켜켜이 쌓인 원한과 기름 멀미. 숙모의 "넌 큰며느리는 아니겠지" 한 마디에 극단적인 것 같으면서도 일상적인 주변의 간증이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장윤정이 티비에 나와 시부모님 자랑을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로또 맞았다"라고 코멘트하는 것은 진짜로 그 확률이 로또에 가깝기 때문인가 보다. 


그에 비하면 명절에 스타벅스에 앉아 규격화된 원두 맛을 즐기며 자기 기분과 어울리는 음악을 듣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얼마나 평온한가. 민족의 대명절을 미국산 프랜차이즈 카페 안에서 보내게 된 각자의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카페 안에는 설거지도 며느리도 장시간 운전도 없다. 할머니 댁에 가지 않겠다고 반항한 십 대 아들을 일곱 번이나 찔러 죽여버린 어느 아버지에 관한 기사를,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읽는 시간. 세배를 받기도, 그렇다고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기도 민망한 나이가 되고 보니 그토록 좋기만 하던 구정 풍경이 이렇게 다르게 보인다. 한반도 전체가 뭘 잘 못 먹고 체증이라도 난 것처럼 안성 어디쯤에서 꽉 막혀있을 것을 생각하니 이 절간 같은 평화가 더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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