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과 연초를 남자친구와 보내기 위해 부산에 가기로 했다.(나는 서울, 남자친구는 부산에 살고 있다.) 언제나처럼 ktx를 예매했는데 언제나처럼 ktx를 예매하다 보니 언제나가 항상 언제나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 월요일 낮, 회사 컴퓨터로 내려가는 표와 올라오는 표를 인터넷 예매함.(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끝나야 함.)
1-1. 그날 저녁 회식을 하다가 남자친구에게 도착시간을 보내주기 위해 코레일 어플에 들어가서 승차권을 확인.
1-2. 웬일인지 승차권 예매내역이 안 보임.
1-3. 날짜 설정을 하지 않아 '금요일'이 아니라 예매한 당일인 '월요일' 5시 30분 열차가 예매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함.
1-4. 내가 예매한 기차는 여기서 회식을 하기도 전에 벌써 부산을 향해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음.
2. 월요일 저녁, 회식 도중 모바일로 기차표를 다시 예매함.(여기서 진짜 끝날 줄 알았음.)
2-1. 예매 일자를 몇 번이나 확인한 뒤 표를 예매하고 나의 멍청함으로 인해 길에다 버린 6만 원을 애도함.
2-2. 기차표 예매 하나 제대로 못하는 지능에 대한 1차 한탄.
3. 금요일 5시, 서울역에 도착해 전광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가 예매한 열차 번호가 보이지 않음.
3-1. 분명 5시 30분 기차를 예매했는데 5시 30분 부산행 기차 따위는 없었음.
3-2.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바일 승차권을 다시 들여다 봄.
3-3. 아무리 봐도 날짜, 시간 다 이상이 없어서 매표소에 문의하러 감.
3-4. 문의하러 가는 도중 5시 30분이라는 시간이 하루에 2번 있다는 사실을 발견.
3-5. 내가 예매한 기차가 오늘 새벽 벌써 부산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울역에 주저앉음.
4. 그래도 부산은 가야겠어서 '승차권 예매' 새로고침을 100번 정도 눌러서 7시 기차를 겨우 예매함.
4-1. 남자친구에게 전화해서 소식을 알림.
4-2. 소식을 알리면서 진양조의 가락으로 나의 뇌세포 죽음에 대해 2차 한탄.
4-3. 길에다가 12만 원을 뿌렸으니 나는 저녁을 먹을 자격이 없다면서 밥도 안 먹고 기차 탑승.
5. 배고프고 우울한 채로 부산 도착.
이 지난한 과정은 내가 더 이상 '차표 예매 정도야 대충대충해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인생의 빠릿한 시절이여, 이렇게 나로부터 떠나갔구나. 표 예매를 두 번이나 실패하자 지나가는 고등학생이라도 붙잡고 '내가 예매한 이 표가 정말 오늘 저녁 7시 부산에 가는 표가 맞는지' 확인받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평생을 깡시골에서만 살다가 아들 만나러 가려고 기차표 끊는 할머니 같지 않은가!) 어른들이 아주 간단한 것을 예약하면서도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던 것은 나를 귀찮게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는 사실을,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서울역 안을 맴맴 돌다가 알게 되었다. 눈가에 주름만 걱정인 게 아니라 뇌 주름의 문제가 나의 일상을 심각하게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이래서 사람이 직접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온전히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 거구나 하는 깨우침이 밀려들었다.
남들 멍청하다고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지.
왜냐면 나도 멍청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