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월 이야기>는 고교시절 좋아하던 선배를 따라 상경한 스무 살 대학생의 도쿄 정착기와 짝사랑 이야기를 담은 67분가량의 짧은 영화다.
벚꽃이 캠퍼스를 덮는 4월. 고교시절 좋아하던 밴드부 선배를 따라 도쿄로 상경한 우즈키. 우즈키는 도쿄 외곽에 있는 '무사시노'라는 한적한 동네에 집을 구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이상한 친구의 권유로 생뚱맞게 낚시 동아리에 들어가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가 성추행을 당할 뻔하고, 이웃집 여자와 이상한 만남을 갖는 등 도쿄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만만치 않다.
(우즈키의 짝사랑이 이루어졌는지는 상상에 맡길 일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배경이 눈에 익어 혹시나 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살았던 쿠니타치 시(国立市)를 배경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쿠니타치 시는 4월이면 벚꽃이 만개해서 동네 전체가 연분홍빛으로 물든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벚꽃길을 따라서 통학했었는데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너무 아름다워 항상 매년 봄이 기다려졌었다.
<4월 이야기>에서 우즈키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던 다리
우즈키가 겪는 에피소드를 보다 보니 나의 스무 살 4월,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낯선 도쿄에 적응하기 바빴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스무 살 도쿄, 나의 4월 이야기
대학에 가면 긴 생머리에 샤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캠퍼스를 거니는 게 내 로망이었다.
동아리에 들어가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잘생긴 남자 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술도 마셔보고 단체 미팅도 해보고 싶었다. 애니메이션 <허니와 클로버>에 나오는 것처럼 오후 수업을 몰래 빼먹고 친구들이랑 삼삼오오 모여 한가롭게 들판에서 네 잎 클로버도 찾아보고 싶었다.
내 캠퍼스 로망을 부풀려준 <허니와 클로버>
하지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짜리가 혼자 낯선 타국에서 정착하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4월 이야기>의 우즈키는 일본인인데도 별 일을 다 겪었는데 하물며 나 같은 외국인은 어땠겠는가.
일본은 관광객에겐 친절하지만 이방인에겐 불친절한 나라다.
스무 살, 나의 4월 이야기는 청춘/로맨스보다는 재난 블록버스터/휴먼 드라마에 좀 더 가까웠다.
1. 처음 겪은 지진
대학 입학을 한 달 앞둔 2011년 3월, 일본에서 동북 대지진이 발생했다.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당시 나는 드디어 수험생활을 벗어났다는 기쁨에 무서울 게 없었다. 3월 말,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밟는데 갑자기 공항 전체가 흔들렸다. 여진이 발생한 것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탔는데 도착하자마자 지진을 겪게 될 줄이야. 난생처음 겪는 지진에 너무 놀라서 순간 일본에 온 걸 후회할 뻔했다. 연이은 여진 때문에 입국 수속이 몇 시간 지연되어 한참을 기다리다가 겨우 도쿄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2. 일본 오자마자 전 재산 날릴 뻔한 썰
일본에 도착한 다음날, 내가 다닐 대학 캠퍼스를 구경하러 갔다가 학교 근처 스타벅스에 들렸다.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대학로 풍경을 감상하다가 시간이 늦어 당시 머물던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가방이 안 보였다. 처음엔 어디 구석 진 곳에 던져 놓아서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한 시간 넘게 게스트하우스를 다 뒤져봐도 가방을 찾을 수 없었다. 못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없는 거였다.
스타벅스에 두고 온 것이다... 당시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그 가방을 그대로 스타벅스에 고이 놓고 와버렸다. 캠퍼스 구경 한 번 잘못 갔다가 졸지에 전 재산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됐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벙쪄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좀 차리고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근데 여권도 지갑도 다 가방에 있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단 다음날 스타벅스 문이 열자마자 가보기로 했다. 제발 그 자리에 가방이 그대로 있길 간절히 기도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스타벅스 오픈 시간에 맞춰서 바로 달려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직원분께 어제 저녁에 가방을 분실했는데 혹시 못 보셨냐고 여쭤봤다. 직원분이 분실물 중에 가방이 있었던 것 같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더니 잠시 후 직원분이 가방 하나를 들고 오셨다. 내 가방이... 다!!
순간 직원분이 천사로 보였다. 무방비 상태로 놓여져 있었을 가방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역시 일본은 치안이 좋구나.. 일본에 유학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3. 미션! 학생 비자 발급받기
학생비자 취득을 위해 입학증명서랑 여권 등 필요서류를 가지고 입국관리국으로 갔다. 외진 곳에 위치한 입국관리국의 건물 외관은 교도소같이 삭막했다. 대지진의 여파로 일본을 떠나려는 외국인이 많은 탓인지
입국관리국은 완전 혼돈의 카오스였다. 번호표를 뽑았는데 내 앞에 몇백 명의 외국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적어도 4~5시간은 넘게 대기했다. 느린 행정절차는 둘째 치고, 불친절하고 무례한 일본인 직원들의 태도가 더 충격적이었다. 내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직원들이 반말로 성의 없이 응대했다.
일본 여행 왔을 때 봤던 상냥한 일본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는 내가 철저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실감한 순간이었다. 몇 시간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비자 신청을 완료했지만 비자 발급 승인이 날 때까지 또 한 달 반을 기다려야 했다. 정확히 한 달 반 후 우편을 통해 비자 승인이 났으니 비자를 발급받으러 입국관리국으로 방문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교도소 같은 입국관리국에 다시 방문해서 또 지난번처럼 몇 시간을 대기한 끝에 겨우 비자 발급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에 살기 참 어렵다.
타치카와(立川) 입국 관리국
4. 도쿄에서 집 구하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일하게 내가 입학한 해에만 신입생 전원이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쯤되면 나를 일본 땅에서 쫓아내려고 하늘에서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일본에서는 일본인 보증인 없이는 부동산 계약이 어렵다. 당시 내가 아는 일본인이라고는 일본드라마에서 본 배우들 밖에 없었다. 현실 세계에 사는 일본인과는 말도 제대로 섞어본 적 없는 내가 아는 일본인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당시 입학식을 일주일도 채 앞두지 않아 빨리 집을 구하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급한 대로 학교의 외국인 학생지원과에 무작정 찾아갔다. 학생과 직원을 통해 어떤 일본인 할머니께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저렴한 월세로 집을 빌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급한 마음에 직원분께 할머니를 바로 뵐 수는 없냐고 여쭤봤다. 집주인 할머니께서 학교까지 찾아와서 흔쾌히 방을 빌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천사 같은 할머니 덕분에 정말 운 좋게 25~30만 원 정도의 저렴한 월세에 원룸을 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