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통치의 극점과 과학혁명의 완성, 그리고 광복의 도래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문화통치’라는 새로운 옷을 걸쳤다. 겉으로는 신문 발행을 허용하고, 경찰 제도를 개편하며, 조선인 관료를 일부 등용하는 등 이전보다 부드러운 통치를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관의 변화일 뿐, 실제로는 사전검열과 정보망을 촘촘히 깔아 감시를 강화하고, 조선을 더 깊이 동화시키려는 제도적 통치로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군홧발 대신 서류와 규정이 앞세워졌고, 폭력은 사라지지 않은 채 더 세련된 방식으로 작동했다. 1923년 9월 일본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준비한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며 일본 경찰과 군, 자경단은 이를 명분으로 수천 명의 조선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그러나 이러한 참혹함 속에서도 조선인들의 항일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1926년 순종(조선 마지막 황제)이 승하하자, 학생을 중심으로 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민중 항쟁이었으며 사회주의 세력, 민족주의 진영, 종교계, 지식인 단체 등 이념을 넘어선 연대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된다. 그 결실로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전국에 140여 지회를 둔 거대한 민족협력 단체로, 농민과 노동자 문제를 다루고 학생운동을 지원하며 광범위한 민중 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1920년대 조선 사회는 이처럼 이념과 계층을 넘어선 연대가 빠르게 재편된 시기였다. 그 흐름의 정점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다.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 사건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일본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계기로 광주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00개가 넘는 학교가 참여하며, 학생들이 주도한 전국적 항일 시위로 발전했다. 이는 단순한 지역 분규가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항일 의식이 본격적으로 사회 전면에 등장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1920년대의 서양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다가갈 수 없던 미시세계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를 정식으로 규명하며 빛이 파동이면서도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빛이라는 자연의 가장 기본적 현상이 더 이상 연속적인 파동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발견은 고전물리학의 기반을 뒤흔들고 양자혁명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흐름은 1922년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으로 이어졌다. 보어는 전자가 아무 곳이나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궤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양자화 개념을 도입했다. 원자는 더 이상 작은 공이 아니라, 에너지가 층층이 나뉘어 있는 ‘계단식 구조’를 가진 세계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전자가 궤도를 바꾸며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한다는 개념은 이후 스펙트럼 연구, 전자구조, 화학결합 이론 등 현대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1923년에는 프레데릭 밴팅과 존 맥클라우드가 인슐린을 발견하여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이들은 췌장에서 혈당을 조절하는 물질을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고, 당뇨병이 더 이상 죽음을 기다리는 병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질환이 되도록 만들었다. 자연의 보이지 않는 화학적 조절 시스템을 밝혀내어 인간의 생명을 연장한 최초의 의학 혁명이라 할 수 있다. 1925년 제임스 프랑크와 구스타프 헤르츠, 1927년 컴프턴의 X-선 산란 연구 등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원자는 연속적인 에너지를 가진 물체가 아니라, 점프하듯 불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라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증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실험 물리학은 이론이 예측한 세계의 구조를 하나씩 확인해 가며, 양자역학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현실’ 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1929년, 루이 드브로이는 전자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물질파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빛과 물질이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동일한 원리를 공유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혁명적 주장으로, 후에 전자 회절 실험을 통해 실제로 확인된다. 이로써 서양 과학은 “세계는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수백 년의 믿음을 종료시키며, 자연에 대한 인식의 문법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며 조선의 일상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쟁의 기류 속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한반도는 곧바로 일본 제국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하는 병참 기지로 재편되었다. 조선의 토지와 자원, 공장과 항만은 전쟁 준비를 위한 공급망으로 묶였고, 조선인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군수체제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 언론과 교육은 일제의 통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분야였다. 조선어 신문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를 수정해야 했고, 민족운동이나 사회 문제를 다루는 글은 즉시 삭제되거나 금지되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교육 시간이 늘어나고 조선어·조선사 수업이 축소되었으며, 조선의 문화와 역사보다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교재가 사용되었다. 언어와 교육은 서서히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우는 도구가 되었고,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황국신민’을 먼저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은 더 노골적인 전시 총동원 체제로 들어갔다. 일본은 “성전(聖戰)”이라는 선전 아래 조선의 산업, 경제, 인력, 자원을 전쟁에 맞추어 재편했고, 쌀, 금속, 원료 등 주요 자원은 본토로 끌려갔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군수품 생산을 독려했으며, 사소한 생활물자까지 전쟁에 필요한지 여부로 평가했다. 조선의 일상은 점차 “전쟁의 필요”와 “나머지 모든 것”으로 구분되었다. 정체성 말살 정책도 1930년대 후반을 향해 갈수록 본격화되었다. 조선 전역의 학교와 관공서, 회사에서는 신사참배가 의무화되었고, 이는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 서약처럼 기능했다. 이어 창씨개명이 준비되면서 조선인의 성씨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요구가 확산되었다.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언어, 가족, 역사, 혈통을 관통하는 정체성 전체를 흔드는 폭력이었다. 조선인은 점점 더 “조선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환경”으로 몰려갔다.
1930년대의 서양 과학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쓰는 과정이었다. 1930년대 초, 물리학자들은 이미 시작된 양자혁명의 혼란 속에서 자연의 근본 구조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논쟁하고 실험했다. 이 시기 과학계는 더 이상 고전물리학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1932년에는 하이젠베르크가 양자계의 불확정성을 설명한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며,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처럼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믿어 왔던 값들’이 애초에 동시에 정확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언했다. 자연은 더 이상 뉴턴이 그렸던 완전한 기계가 아니라, 확률과 불확실성을 본질로 가진 세계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1933년에는 슈뢰딩거와 디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원자 속 세계를 설명하며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었다. 슈뢰딩거는 전자가 ‘점’이 아니라 퍼져 있는 파동처럼 존재한다고 밝혔고, 디랙은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전자와 짝을 이루는 반입자의 존재를 예측했다. 이로써 원자는 더 이상 단단한 최소 입자가 아니라, 확률과 에너지가 얽힌 작은 우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각기 다 방식으로 원자 내부의 세계를 해석하며, 파동방정식과 상대론적 양자이론을 확립했다. 1937년에는 데이비슨과 톰슨은 전자를 얇은 금속막에 쏘아보는 실험을 했고, 전자가 빛처럼 굴절하고 간섭무늬를 만드는 모습을 직접 확인했다. 전자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드브로이의 예측이 처음으로 눈앞에서 증명된 순간이었다. 이 발견은 전자의 성질을 이용하는 기술의 기초가 되어, 전자현미경·반도체·양자컴퓨팅 같은 현대 과학기술로 이어졌다. 그리고 1938년, 엔리코 페르미가 중성자를 이용해 원자핵에 특정 반응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면서 과학은 돌이킬 수 없는 문턱을 넘었다. 원자핵이 단순한 입자가 아니라 ‘쪼개지는 구조’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 속에 감춰진 에너지의 규모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발견은 이후 핵분열의 공식 확인으로 이어졌고, 원자폭탄·원자력 발전·현대 핵의학 등 20세기 후반의 기술 체계를 결정짓는 출발점이 되었다. 자연을 이해한다는 과정이 곧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폭발적 힘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1940년대로 넘어가자 조선은 더 이상 식민지의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은 전쟁 기계의 부속품처럼 사용되었고, 조선인의 삶은 그 목적에 따라 재편되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국외에서 창설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축이 만들어졌지만, 국내의 현실은 더욱 극심한 억압과 동원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전면적인 전시 총동원 체제에 편입되었다. 징병제와 징용제는 더욱 강제적으로 시행되었고, 젊은 남성들은 공장, 탄광, 군수시설로 끌려갔다. 근로보국대와 학도지원병 제도는 조선 청년에게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노동은 전쟁의 ‘자원’으로 취급되었고, 사람 하나하나가 제국의 군수 생산량을 채우는 숫자로 계산되었다. 여성 역시 전쟁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수많은 조선 여성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전쟁터의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의 존엄이 파괴되는 참혹한 현실에 놓였다. 여성의 신체는 완전히 제국의 폭력에 노출되었고, 이는 전시동원의 가장 잔혹한 형태였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조선의 식량과 자원은 일본으로 빠르게 유출되었다. 쌀, 고무, 금속, 가축까지 모든 것이 전쟁 물자로 전환되었고, 조선 농촌과 도시는 동시에 궁핍과 기근의 압박을 견뎌야 했다. 배급은 점점 축소되었고, 생활물자는 품귀가 되었으며, 추위와 굶주림은 일상이 되었다. 조선인에게 남은 것은 삶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여유조차 없는 황폐한 터뿐이었다.
1940년대 초반의 과학은 1939년 발발한 세계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은 과학을 더 집요하게 밀어붙였고, 인간은 자연의 가장 깊은 층을 강제로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1943년 생리의학상은 헨리크 담와 에드워드 A. 도이지에게 돌아갔다. 담은 피가 잘 멎지 않는 현상이 비타민K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도이지는 그 비타민의 정확한 구조와 작용 방식을 밝혀냈다. 이 연구는 전쟁터와 병원에서 치명적이던 출혈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었고 이후 항생제, 피부괴사 치료, 혈액의학 전반으로 이어지는 현대 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같은 해 화학상을 받은 조지 드 헤베시는 물질에 아주 약한 방사능을 붙여 ‘표식’처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하면 그 물질이 몸속에서 어디로 가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이 간단한 아이디어 덕분에 음식이 어떻게 소화되는지, 약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식물이 영양분을 어떻게 흡수하는지 같은 보이지 않는 과정들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44년 노벨화학상은 오토 한이 핵분열의 발견으로 수상했다, 우라늄 원자핵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두 개의 더 작은 원자핵으로 쪼개지며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이 업적은 원자폭탄과 원자로, 핵의학, 방사선 기술 등 20세기 후반의 기술체계를 통째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원자 자체를 쪼개어 에너지를 뽑아낸다는 생각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실험적 사실이 되었고, 인류는 자연의 가장 깊은 층을 직접 조작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1945년의 조선은 전쟁 동원 속에서 이미 삶의 기반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배급은 끊기다시피 했고, 징병·징용으로 가족이 흩어졌으며, 사람들은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고단했다. 그러나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조선은 갑작스럽게 해방을 맞았다. 환희와 혼란이 동시에 찾아왔다. 일제의 통치 체계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행정과 치안은 공백 상태가 되었고, 해방의 주체성이 조선 내부가 아닌 외부의 전쟁 결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향후의 불안을 예고했다. 일본 군정이 물러난 자리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기준으로 들어오며, 조선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씨앗을 품게 되었다. 1945년은 식민지의 굴레가 풀린 해였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길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기쁨과 공허가 함께 존재하던 해였다.
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은 알렉산더 플레밍,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페니실린을 발견, 정제, 임상화하며 인류가 감염병으로 쉽게 죽던 시대를 끝내버렸다. 전쟁터에서 상처와 감염으로 쓰러지던 병사들의 생명을 구했고, 이후 폐렴, 패혈증, 결핵 등 치명적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45년은 전쟁이 핵폭탄으로 끝난 해이자, 동시에 항생제가 인류의 생명을 지키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해였다.
1921년부터 1945년까지의 조선은 식민지 억압이 점점 더 정교하게, 그리고 점점 더 잔혹하게 강화되는 과정이었다. 1920년대에는 문화통치 아래에서 독립운동이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며 신간회와 학생운동으로 이어졌고, 1930년대에는 전쟁 준비와 동화정책으로 언어·교육·일상이 차례로 침식되었다. 1940년대로 넘어가면 조선은 전시 총동원 체제 속에서 징병, 징용, 위안부, 식량 수탈 등 인간의 생존 자체가 전쟁의 자원으로 처리되는 상황에 내몰렸고,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해방을 맞았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빛, 전자, 원자핵까지 자연의 보이지 않는 구조가 차례로 밝혀졌다.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보어의 원자모형, 드브로이의 물질파로 시작된 양자혁명은 1930년대에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을 거쳐 더욱 깊어졌고, 1938년 페르미의 핵반응 실험과 1944년 오토 한의 핵분열 발견은 원자핵을 실제로 쪼개는 시대를 열었다. 1945년 페니실린 개발은 전염병으로 죽던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새로운 의학의 시작이 되었다. 결국 1921–1945년은 조선에게는 정체성과 삶이 해체된 시대였고, 서양 과학에게는 세계의 구조가 해체되어 다시 쓰인 시대였다. 한쪽은 인간을 소모하는 전쟁의 논리 속으로, 다른 한쪽은 미시세계의 법칙을 발견하며 문명의 방향을 바꾸는 길로 나아갔다.
컴프턴의 X선 산란 실험은 빛은 입자적 성질을 가진다라는 것을 증명했는데, 당시 미국 정부는 레이더·전자기학 관련 기밀을 이유로 연구 결과의 국제 발표를 꺼렸으나 컴프턴은 압력에도 불구하고 강행을 발표했다고 한다. 결국 1927년 노벨상을 수상했으나, 2차 대전 이전의 분위기에서 과학과 정치가 처음 충돌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한다. 또 실험 중 화학물질 폭발로 연구실 대부분이 불에 탔고 장비, 유리기구, 메모는 전부 소실되었으나 그가 계산중이던 산란 데이터 노트 한 권은 불에 타지 않았고, 그 데이터가 논문의 핵심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1938년 노벨상 수상자인 페르미의 아내 로라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아래서 가족은 위험에 처했으나 노벨상 시상식 참석을 위해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출국, 시상식 직후 아예 미국으로 망명하며 이후 미국에서 첫 원자로를 만든 '맨하튼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노벨상이 탈출 티켓이 된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페니실린 개발 초창기, 연구팀이 확보한 약물의 양은 실험용 쥐 몇 마리에게 나눠줄 수조차 없을 만큼 적었는데 어느 날 쥐들이 배양접시를 부수고 들어가 어렵게 확보한 페니실린을 다 먹어치운 사고가 발생했다. 과학자들은 약물을 지키기 위해 연구실 바닥과 배수구를 뒤지고 심지어는 쥐의 배설물에서 미량의 페니실린을 다시 추출해야 했다. 체인은 후에 우리가 그때 쥐가 아니라 토끼나 소를 써서 더 많은 양의 페니실린이 먹혔다면 연구는 그대로 끝났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