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920

식민 억압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구조의 해독

by Doritos

“세계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해독하며 미래의 문을 열었고 조선은 일상까지 통제된 침묵의 시대를 걸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조선(대한제국) 역사와 일제강점기 초기 흐름은 민족운동이 탄압받고, 식민지 지배 구조가 체계적으로 구축되며, 결국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폭발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1911년에는 일본은 '105인 사건'을 조작해 신민회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하면서 국내 민족계몽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 시설 구축과 인재 양성을 목표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이 사건으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며 사실상 와해되었고, 이후 국내 민족운동은 지하화 되거나 해외로 근거지를 옮기는 양상을 보였다. 같은 해 발표된 조선교육령은 일본어 중심 교육을 강제하고 조선어 교육을 축소하여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동화시키려는 식민 교육 정책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2년부터는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토지 소유권을 조사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땅을 총독부와 일본인 지주에게 넘기기 위한 조직적 수탈 정책이었다. 조상 대대로 경작하던 농민들이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땅을 잃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조선 농촌 경제는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조선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일본 자본이 조선의 토지·산림·광산을 점령했고, 조선 경제는 완전한 식민지 수탈 구조로 편입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전쟁 특수를 얻기 위해 조선의 자원·노동력을 더욱 강제로 징발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에서의 물자 부족과 생활고는 심화되었고, 일본은 자국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한 산미증식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쌀 생산량 증가를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쌀을 일본으로 대량 수출하기 위한 정책이었으며 농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 가장 상징적인 노벨상 수상자는 마리 퀴리로, 그녀의 남편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지 8년 만인 1911년, 순수한 라듐을 분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한다. 그녀의 방사능 연구는 방사선 치료, CT, X-ray 등 현대 의학 진단기술의 기반이 되었고, 방사능을 ‘측정 가능한 물리량’으로 정립함으로써 핵물리학의 문을 열었다. 이어 1912년에는 알렉시스 카렐이 혈관 봉합과 장기 이식 기술을 정립하여 현대 외과학의 기반을 만들었다. 1913년에는 카메를링 오너가 헬륨을 액화시키며 극저온 연구의 문을 열었고, 노벨상 자체의 공식 사유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의 연구 과정에서 1911년, 세계 최초로 초전도 현상을 발견했다. 초전도 현상이란 금속이나 합금에서 전기저항이 없어 전류가 방해받지 않고 흐르는 현상을 말하며, 이론적으로는 전기가 영원히 흐를 수 있는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산업화하면 많은 양의 전기를 싸게 공급할 수 있다는 전망을 열어주었다. 이는 후에 초전도체 연구와 MRI, 양자컴퓨터 기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1914년에는 막스 폰 라우에가 X선 회절을 발견하여 결정 구조를 분석할 수 있게 만들어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01년 발견된 X선은 발견 후 파동인지 입자인지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는데, 라우에의 실험은 X선이 파동을 지닌 전자기파임을 증명했고, 또 결정(크리스탈)이 아무렇게나 엉킨 고체가 아니라 주기적으로 나열된 원자구조로 이루어졌음을 실험으로 증명해 냈다. 이는 과학자들이 DNA, 단백질, 미네랄, 반도체 소재, 약물구조까지 원자, 분자 구조를 관찰하는 기술을 탄생시키며 훗날 단백질 구조 분석과 DNA 이중나선 발견, 그리고 반도체·신소재 연구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과학의 토대를 제공했다. 그다음 해, 1915년에는 브래그 부자가 X선을 이용한 결정 구조 분석 방법을 확립하며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라우에가 X선 회절 현상을 최초로 발견했다면(현상발견), 브래그 부자는 그 현상을 이용해 원자의 배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만들었다(분석 방법 완성).


1917년, 해외에서는 더 활발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미국·연해주·중국 상하이 등지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신한청년당 등 다양한 단체가 조직되었고, 김규식, 이승만, 안창호 등 지도자들이 외교·군사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해외 운동은 국내의 억압과 달리 점점 조직적이고 국제적인 형태로 성장했다. 전 세계를 뒤흔든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는 조선 지식인과 청년층에게 강력한 불꽃을 일으켰다.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이 사상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빠르게 확산되며 대규모 저항으로 이어질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조선은 독립운동사의 대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3·1 운동을 맞는다. 종교계,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며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거대한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비폭력 평화 시위였음에도 일본은 무차별 총격, 방화, 고문 등 잔혹한 탄압을 가했고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 그해 4월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는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며 현대 대한민국의 법적·역사적 정통성을 이어가는 정부가 되었다. 이후 무장 독립운동 역시 본격적으로 강화되어, 1920년에는 홍범도·김좌진 등이 이끄는 독립군이 만주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격파하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조선을 향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도록 만들었고, 같은 해 일본군은 만주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간도참변을 일으키며 보복에 나섰다.


제1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던 1916~1918년에도 과학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1917년 찰스 바클라는 X선 스펙트럼이 원소마다 고유함을 밝혀내어 원소 분석·재료 분석의 현대적 기술 체계를 이루는 기초를 마련했다. 1918년에는 막스 플랑크가 양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에너지는 연속적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최소 단지 (양자)로 방출, 흡수된다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현대 양자 물리학의 시대를 열었다. 그의 연구는 현대 물리학 전체—반도체, 레이저, 컴퓨터공학, 통신공학—를 지탱하는 절대적 기반이 되었다. 같은 해 프리츠 하버는 공업적으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하버-보슈법'을 확립하면서 현대 비료 산업과 세계 식량 생산 기반을 만들었다. 이전까지 비료는 칠레 초석, 조조 구아노 등 자연 공급에 크게 의존했었는데, 천연자원이다 보니 공급에 한계가 있었고 고갈 우려가 있었던 반면, 인공 비료 생산은 폭발적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1920년에는 발터 네른스트가 열역학 제3법칙과 전기화학 법칙을 확립하여 배터리 설계의 기본 원리를 정의했고, 이는 오늘날 리튬이온 배터리·전기차·에너지 저장기술의 이론적 기초로 이어졌다.




종합하면, 1911~1920년의 조선사는 강압적 식민 통치의 제도화 → 경제·교육의 전면적 수탈 → 해외·국내 독립운동 확산 → 대규모 항일운동과 무장투쟁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 일제는 이 10년 동안 조선을 통제하기 위한 행정·경제·교육 체계를 완성했고, 조선인은 끊임없는 수탈과 억압 속에서도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 의지를 키워 나갔다. 그리고 그 결실이 1919년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920년 무장투쟁의 본격화로 이어지며,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노벨상은 현대 과학과 기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핵심 발견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전체적으로 이 시기의 노벨상 발견들은 뚜렷한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원자·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흐름이 과학 전 분야를 지배했다. X선 회절, 원자모형, 양자론 등은 보이지 않던 세계를 수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고, 이는 20세기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둘째, 의학과 생물학에서도 ‘정밀 수술·장기 이식’과 같은 현대 의료기술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셋째, 이 모든 발견은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신약 개발·배터리 기술·MRI·방사선 치료 등 실제 산업과 의료기술로 이어지는 실용적 성과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군수·의료·재료 과학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며 과학 발전이 가속화된 측면도 존재했다. 결론적으로 1911~1920년은 “현대 과학의 기초가 거의 모두 형성된 시기”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료기술, 전자기술, 배터리, 신약 개발, 우주과학의 근본 원리가 이 10년 동안 잇달아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8년 노벨 화학상 프리츠 하버의 발견 덕분에 현재 지구 인구의 절반 이상은 하버-보슈법 덕에 생존한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프리츠 하버는 동시에 화학전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서 염소, 포스겐 등 독가스 개발과 사용을 주도했고, 군사 연구 총지휘자였으며, 독가스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했다. 거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는 그의 독가스 개발을 반대하다 비극적으로 자살했다.

1911년 화학상 수상자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사망 이후 기혼 남성과의 연애 스캔들이 프랑스 전역에 퍼지며 노벨상 시상식 참석을 거부하라는 서한을 받았으나, 상은 내 연구에 대한 것이며 내 사생활 과는 무관하다는 답변을 남겼다고 한다. 생에 마지막에는 자신이 발견한 방사능으로 인해 사망한다.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은 병사 990만 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이는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한 것이라는 평이 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신무기가 대량 도입되었으나 구시대적인 전술과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고 한다.

1918년 발표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는 사실 조선이나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 비서구 식민지에 적용할 의지는 없었다. 미국은 일본과 우호 관계였으며 1차대전 패전국들과 다민족제국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유럽 민족 문제 정리를 위한 것이었는데 1919년 3·1 운동의 사상적 촉매가 되었다는것이 흥미롭다.




이전 03화1907–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