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1906

보이지 않는 세계의 발견과 주권의 소멸

by Doritos

“인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시작했고, 조선은 보이던 세상을 잃기 시작했다.”


1901년, 고종은 철도와 통신, 학교, 화폐 제도를 정비하는 ‘광무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이름 아래 세상은 분열되어 갔다. 제주도와 전라도 지역에서는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축교난’이 일어났고, 백성들은 낯선 제도와 빠른 변화 속에서 불안을 느꼈다. 고종이 꿈꾼 근대는 서양의 기술을 빌린 새로운 질서였지만, 그 질서는 이미 외세의 언어로 짜여 있었다.


같은 해, 유럽에서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이 현실이 되던 첫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물리학상은 빌헬름 뢴트겐에게 돌아갔다. 그는 X선을 발견해 인류가 인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단순히 뼈를 찍는 기술이 아니라, 인류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다. 생리의학상은 에밀 폰 베링, 그는 병에 걸린 동물(말)의 혈액 속에 생긴 ‘항체(면역물질)’를 추출해 다른 환자에게 주입해 '디프테리아'라는 전염병을 낫게 하거나 예방하는 혈청요법을 발견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질병을 ‘신의 벌’이나 ‘공기의 저주’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는 인류에게 질병을 이길 수 있는 자기 방어 기술(면역학의 시작)을 선물했다. 화학상은 야코뷔스 판트호프, 그는 화학반응 속도와 삼투압 법칙을 수학으로 정리해, 이후 투석기와 수액, 배터리와 화장품 흡수 기술까지 영향을 미쳤다. 인류는 이 해에 눈으로 보이지 않던 세계를 계산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갖기 시작했다.


1902년, 일본과 영국은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을 세력권에 두는 명분을 얻었고, 대한제국의 외교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고종은 중립 외교를 시도했지만, 그 말은 공허했다. 누구도 조선의 자주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같은 해, 과학은 눈부신 정밀함을 더해갔다. 물리학상은 헨드릭 로런츠와 피터 제이만에게 수여되었다. 그들은 자기장이 빛의 스펙트럼을 변화시킨다(제만 효과)는 사실을 밝혀내, 원자 내부에 전자가 존재하며 에너지를 교환한다는 증거를 처음으로 보여줬다. 이는 현대 물리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수학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이었으며 이 발견은 훗날 양자물리학과 MRI, 천문 분광 분석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생리의학상은 로널드 로스, 그는 말라리아가 모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는 감염병의 매개체 개념을 세운 최초의 발견으로, 오늘날의 방역과 질병예방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화학상은 헤르만 에밀 피셔가 받았다. 그는 당(糖)과 핵산의 구조를 밝혀내어 생명 에너지의 화학적 기반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1902년의 인류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전자, 세균, 세포의 질서를 찾아내며 “생명과 물질의 언어를 해독하기 시작한 해”였다.


1903년,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본격화되며 조선은 거대한 충돌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불안과 기근이 퍼졌고,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서울의 거리에는 가스등이 켜지고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문명의 신호이자, 동시에 식민의 그림자였다. 근대는 언제나 빛과 어둠을 함께 데려왔다.


같은 해, 방사능의 시대가 열렸다. 앙리 베크렐, 피에르·마리 퀴리 부부는 자연 방사능과 라듐을 발견했다. 그들은 원자는 단단한 구슬이 아니라, 에너지가 묶여 있는 구조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원자는 붕괴할 수 있고, 에너지를 낼 수 있다. 이 깨달음은 훗날 핵의학, 암 방사선 치료, 원자력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기존, 소금을 물에 넣으면 맛이 짜지지만, 그 안에서 무슨 변화가 있는지는 감으로만 이해했던 과거 화학자들과 달리,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소금(NaCl)은 물속에서 Na⁺(양이온)과 Cl⁻(음이온)으로 분리되고 이 이온들이 전류를 운반하고 반응을 일으킨다는 "전해질 이론"원리를 세웠다. 이 원리는 오늘날 배터리, 전기분해, 세포막 전위 연구의 핵심이다. 생리의학상은 닐스 핀센, 그는 햇빛 중에서도 자외선(UV)이 세균을 죽이고 조직을 자극한다는 점에 주목해 렌즈와 필터를 이용해 햇빛을 모아 집중시키는 장치를 만들고 피부결핵(루프스)을 치료했다. 현대의 광선요법, 자외선 살균, 레이저 의학은 모두 여기서 출발했다. 1903년의 인류는 물질의 심장, 세포의 구조, 빛의 본질을 해부하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을 동시에 노렸고,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해 조선은 두 나라의 군사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도시의 행정을 장악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주권은 점점 무너져갔다.


같은 해, 인류는 또 한 단계 깊은 이해에 닿았다. 생리의학상은 이반 파블로프, 그는 ‘조건반사’를 발견해 인간 행동이 본능과 학습의 결합임을 보였다. 그의 연구는 훗날 심리학, 행동과학, 광고,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근본 원리가 된다. 물리학상은 존 윌리엄 스트럿(레일리 경)이 받았다. 그는 공기 속 새로운 기체 ‘아르곤’을 발견했고, 화학상은 윌리엄 램지, 그는 헬륨, 네온, 크세논 등 불활성기체군을 찾아냈다. 이 발견은 주기율표의 빈칸을 채우며 양자화학과 전자배치 이론의 토대가 되었고, 그 원리는 오늘날 네온사인과 광고조명, 냉각기술, 반도체, 우주장비 등 현대 산업 전반으로 이어졌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고 이름만 남은 나라가 되었다.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 고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으나, ‘을사오적’이라 불린 다섯 대신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조약에 서명했다. 나라의 외교가 무너지고, 백성은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같은 해 유럽에서는 또 한 번 인류의 눈이 확장됐다. 물리학상은 필리프 레나르트, 그는 전자선(음극선) 실험을 통해 전자선의 에너지, 속도, 투과력 등을 정량적으로 측정해 “원자 내부에는 움직이는 전하 입자가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의 연구는 이후, 전자현미경, 브라운관(CRT, TV와 모니터의 원리), X선 영상, 입자 가속기 등 현대 과학기기의 기반이 되었다. 화학상은 아돌프 폰 바이어, 색은 오로지 식물이나 곤충에서 추출한 천연 소재에 의존했었으나 그는 색을 화학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인공 염료로 바꿔놓았고 유기화합물의 반응 원리를 체계화하여 산업혁명기의 플라스틱, 섬유, 의약 산업을 촉진했다. 생리의학상은 로베르트 코흐, 그는 결핵균을 발견해 “모든 병에는 그 원인이 되는 세균이 있다”는 미생물학의 원칙을 세웠다. 오늘날의 백신, 감염병 진단, 역학조사 시스템이 모두 여기서 시작됐다.


1906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부임시켰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갔고, 각국 공사관들은 철수했다. 고종은 끝까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려 했지만, 일본은 이를 ‘이미 체결된 조약’으로 무시했다. 서울은 점점 일본 관리의 언어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관청의 문서와 도로명조차 일본식 표기로 바뀌어갔다. 나라는 존재했지만, ‘국가’는 사라지고 있었다.


같은 해 유럽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노벨 평화상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수여되었다. 그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양국이 지쳐가자, 러시아는 조선과 남만주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일본은 '조선 보호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의 평화를 중재한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그 평화의 결과로 일본은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루스벨트의 '평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협상이었으며, 한쪽의 평화가 다른 한쪽의 침묵 속에 세워진 셈이었다.



20세기 초 유럽은 이미 보이지 않는 원자와 세포, 빛, 반응과 의식을 탐구했다. 인간은 보이지 않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이해는 오늘날 의료, 산업, 에너지, 심리까지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유럽은 원자와 세포, 빛과 전자를 해부하며 ‘이해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향한 발걸음 위에서 스스로의 주권을 잃었다.


광무개혁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은 스스로 근대를 꿈꾸었고, 실제로 그 설계도를 그려놓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식민지의 길을 걸었지만, 한국이 일본의 침략 없이 스스로 근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면 또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진다.

19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을 끝내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그 평화의 결과로 한 나라의 주권은 짓밟혔다. 조선의 언어는 금지되었고, 이름은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모국어로 노래 부를 자유를 잃었고, 교과서에서 ‘조선’이라는 단어가 지워졌다.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머리카락조차 지키지 못했다. 상투를 자르는 건 단순한 머리 손질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정체성과 한 민족의 역사를 잘라내는 행위였다. 학교에서는 일본 천황의 초상 앞에 절을 해야 했고, ‘나라’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의 백성에게 나라란 단순한 정치적 단위가 아니었다. 한민족은 뿌리로 이어진 공동체였고, ‘나라’는 곧 ‘우리 자신’이었다. 그래서 주권을 빼앗긴다는 건 단순히 통치를 잃는 일이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식민의 근대화는 평화를 내세운 폭력이기도 했다. 과연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정의일까, 아니면 한 존재의 자유와 존엄, 그리고 한 민족의 혼을 지키는 것이 더 큰 정의일까?

지금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불과 120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프면 병원에 가고, 엑스레이를 찍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 게 당연하지만, 그때는 말라리아가 병이 아니라 하늘의 저주로 여겨졌었고 지금은 피부과에서 빛으로 시술을 받고, 방사능 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로 도시를 밝히지만, 그때 사람들은 오직 태양빛과 초 한 자루에 의존해 살았다. 인류의 역사는 30만 년이 넘지만 단지 지난 120년 동안 인류는 그 어느 시대보다 빠르게 변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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