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910

식민 지배의 시작과 과학 발전의 초석

by Doritos

“서양은 보이지 않던 세계의 법칙을 밝혀내며 근대를 완성해 갔고, 조선은 식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를 파견하여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며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자주권은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이 해, 알버트 미컬슨은 간섭계를 이용하여 빛의 속도 측정의 정확성을 높이며, 정밀 측정의 기초를 마련했다. 기존 빛의 속도는 정확하게 잴 수 없었으나, 이 발견으로 빛이 지나온 거리와 속도차이를 극도로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미컬슨의 연구는 오늘날 GPS 기술 등 정밀 기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에두아르트 부흐너는 효소가 세포 내부의 생화학적 과정을 세포 밖에서도 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산업 생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효소 발효를 세포 밖에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맥주, 와인, 식초, 치즈, 요구르트와 같은 발효식품 생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당뇨병 치료제나 소화불량 등의 효소 기반 의약품이 개발될 수 있는 과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1908년, 조선은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항쟁의 불씨가 되었지만, 외세의 억압에 맞서 독립을 위한 싸움은 더욱 격화되었다. 안중근은 만주에서 의병 조직을 결성하고, 일본의 탄압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방사능과 원자 붕괴의 연구로 원자핵에 대한 이해를 확립했고 원자 모델을 발전시켰고, 핵물리학의 기초를 다졌다. 이는 추후 핵물리학, 방사선 의학, 원자력 발전을 포함한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메치니코프는 식세포설을 통해 백혈구가 세균을 잡아먹는 방식을 발견하여 면역학의 기초를 마련했고, 에를리히는 항체를 연구하여 면역체계의 중요성을 밝히고, 혈청요법을 통해 질병 예방과 치료법을 제시했다. 두 사람의 연구는 면역학의 기초를 다지며, 백신 개발, 항체 치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면역 체계의 이해는 의약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백신 개발과 전염병 예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조선 민족의 저항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안중근의 의거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상징이었고, 조선은 이 사건을 통해 국제 사회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굴리엘모 마르코니무선 전신(라디오 통신) 기술을 발전시키고, 전파를 이용한 무선 통신의 실용화를 이끌었다.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은 마르코니와 함께 무선 통신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하며, 브라운 튜너라는 전자기기(라디오 튜너)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함께 전파를 사용하여 무선 전신의 기초를 다진 업적으로 1909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 해, 에밀 테오도어 코허는 갑상선 및 갑상선 질환에 관한 연구로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갑상선 제거 및 호르몬 기능에 관한 연구를 통해, 갑상선의 역할과 호르몬의 중요성을 밝혔다. 코허의 연구는 내분비학 분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갑상선 수술 및 호르몬 치료의 기초를 마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역사는 식민지 통치라는 어두운 장으로 넘어갔고, 고종의 퇴위와 헤이그 특사의 실패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요하너스 디데릭 판데르 발스는 기체와 "액체 상태의 상태 방정식”에 관한 연구로 1910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구체적으로는 분자 간 상호작용을 고려한 상태 방정식을 제안하여, 기존의 이상기체 법칙을 넘어 실제 기체 및 액체의 거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마련했다. 오토 발라흐그는 자연에서 향기 나는 오일 등에 포함된 테르펜계 및 고리형 유기화합물(알리사이클릭 화합물)을 분리하고 구조를 밝혀내며 유기화학 구조이론과 합성법을 발전시켰다. 유기합성화학, 향료·식품·화장품 산업에서 알리사이클릭 화합물이 중요한 물질군이 되었고, 이들의 합성과 응용을 가능하게 한 이론적·실험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유기화학반응 설계 및 산업적 대량생산에서 반응 메커니즘과 구조설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알브레히트 코셀은 세포핵 물질에서 단백질 성분과 비단백질 성분을 구분했고, 비단백질 성분이 핵산(현재에는 DNA·RNA 구성물질로 알려짐) 임을 화학적으로 규명했다. 유전의 신비가 화학식으로 변경되는 계기가 되는 발견이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은 끝까지 싸웠다. 헤이그 특사를 통해 세계에 독립을 호소하고, 해산된 군대 대신 의병이 봉기하며 자주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압박은 점점 거세졌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거쳐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로 조선은 결국 식민지의 길로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 서양의 과학은 자연현상과 신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세계를 화학식과 수식, 실험의 언어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던 질서가 신비나 기적이 아닌, 이해하고 계산할 수 있는 과학의 법칙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왜 이 시기에 이렇게 급격한 과학의 발전이 가능했을까?

이전까지 과학은 학문으로, 기술은 산업의 도구로 따로 발전해 왔지만, 제2차 산업혁명의 절정기(1870~1914) 속에서 두 영역이 처음으로 결합했다. 과학이 산업의 엔진이 되자, 연구는 즉시 현실의 기술과 생산으로 이어졌고, 그 속도는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속화되었다.

또한, 유럽 각국이 식민지 확장을 위한 경쟁 속에서 과학기술을 국가의 전략 자산으로 삼으면서, 정부와 군이 직접 연구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과학은 개인의 호기심이 아닌, 국가의 생존과 패권을 위한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01년 제정된 노벨상은 과학자들에게 ‘명예’라는 새로운 동기를 부여했다. 학문은 더 이상 귀족과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과학자가 인류의 진보를 대표하는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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