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도망도 지능 순이다
왜 칭찬을 칭찬으로 듣질 못해
처음엔 1주일에 1회, 조금 지나서는 2주에 1회꼴로 만나는 의사선생님은 처음부터 내 이야기를, 내 편을 열심히 들어주셨다. 하지만 내 귀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냥 의사니까. 내가 아프니까 위로하려고 기운내라고 그런말을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이 되니 어떤 좋은 말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게 주변 사람의 잘못에 대해 하나씩 짚어주셨다. 그렇지만 그것도 잘 안 들렸다. 내 마음 속 시야는 좁아져 있고 그 끝엔 절망감과 죄책감이 있었다. 모든 일들이 밑도 끝도 없이 내 탓 같고 내 잘못 같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결론적으론 내가 다르게 했음 이런 일이 없었겠지 라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누군가. 전문가였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도 잘 버티고 있다며 칭찬하고, 너무 지쳐서 그렇다며 위로했다. 선생님은 귀에 딱지가 앉겠다 싶을 정도로 지치지 않고 얘기했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거기서 얻은 성취를 하나씩 하나씩 집어냈다. 당신은 누가 봐도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학대받는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잘 걸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이뤄냈고,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어려운 일을 당신에게 맡겼다고.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해줬다. 나의 대답은 “아니예요. 그저 아무도하기 싫어서였죠.” “그냥 전 운이 좋았어요.” “그건 좋은 사람을 만나서고 누구라도 할 수 있었어요.” 라는 말이였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우리는 칭찬을 하면 칭찬을 늘 저런 식으로 받는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고 배웠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안 그런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세대까지는 그랬다. 누가 “너 참 예쁘다.” 하면 “저도 알아요.” 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으면 정말 4가지 없는 걸로 보던 시절이었다. 아마 요즘도 조금은 칭찬을 돌려 거절하는 것이 예의이고 겸손의 미덕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웃긴 건, 남을 볼 때는 잣대가 달라진다. 똑같은 일을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하면 무척이나 높게 평가한다. 그 사람은 대단하다고, 일을 잘 하니까 회사에서 저 친구한테 힘든 일 맡겨놓고 모르쇠 한다고. 잘 하는 줄 알고 있으니까. 라고 말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두 번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우리는 진짜로 우리가 꽤 괜찮은 사람인 것을 믿지 않는다.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의 예쁜 부분은 안 보이고 부족한 부분만 잔뜩 부각되어 보인다. 못마땅하다. 나도 그랬다. 내 삶은 실패로 점철된 삶 같았다. 남들보다 더 실패했고 흠이 많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기고 싶었고 안그런 척 하지만 늘 마음이 슬펐다.
보통의 사람들이 어떤지는 내가 모르므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생각건대 내 인생에 실패나 상처가 제법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 흠이, 그 실패가 거름이 되어 그것을 토대로 단단해진 것도 사실이다. 전보다 성숙했고 깊어졌다. 깊은 좌절과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겐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내가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칭찬을 쏟아 부어줘도 다 반사할 밖에.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얼굴도 바뀌고 건강도 많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제서야 몇 달 만에 내게 솔직히 말씀하셨다. 처음 내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느낌을. 물이 바글바글 끓은 솥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뜨거워서 죽을 거 같은데도 체념한 그런 개구리 같았다고 한다. 그냥 죽어가는 사람처럼 마냥 시커멓고 칙칙했다고.
회사를 쉬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차츰 내 자신도 내가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걸 의사선생님이 모를 리가. 이제 좀 산 사람 같다고 말해 주는데 그제서야 나도 선생님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면 내 자신이 느끼게 생기가 돌고 조금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제사 칭찬도 잘 받아들이며 대화하게 됐다. 내가 내 자신이 맘에 드니까.
외모에 대한 이야기 같겠지만 꼭 외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고, 충분히 휴식하고, 지치는 인간관계에서 벗어나니 당연히 삶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지고 그 만족감이 반영이 되는 그런 선순환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나니 그동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게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인정과 신뢰였다. 나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내가 이뤄놓은 것을 들여다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 그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만 열심히 했지 스스로 잘하고 있는지 어떤 성장이 있었는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남에게 받는 취급이 쓰레기통이었다고 나도 자신을 그 취급을 하고 있으니 칭찬을 아무리 해도 안 들릴 수 밖에. 운동을 하면서 스스로가 조금씩 뭔가 늘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살이 빠져서 외형의 변화가 보이니 그제서야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면의 변화로 이어졌다. 부족하기 때문에 좀더 해봐야지 라는 생각이 아닌, 이렇게 해보니 제법 괜찮다. 좀더 해봐야겠다로 바뀌었다.
과거의 나와 비슷한 상황 속에 갖혀 있는 이가 있다면 나는 이도 저도 따지지 말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조언해주고 싶다. 그 자리에서 네 생각을 바꾸라는 말은 말이 쉽지 같은 환경 같은 상황에서는 뭔가가 드라마틱하게 바뀌기 어렵다. 생각이 바뀌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개구리가 항아리 안에 앉아있으면 그 주둥이 만큼의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환경이나 조직, 타인은 바뀌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단 하나,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을 바꾸려면 전환점이 필요한 법이다. 지친 사람에게 그럴 만한 에너지는 없다. 그렇다면 세상 밖으로 나와봐야 한다. 과감하게 휴식하고 상황에서 떨어져 나와야 내게도 무언가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도망도 지능 순이다. 거리를 두어야 숲의 크기도 모양도 정확히 보이고 그 숲이 내가 가야 할 곳이 맞는지 판단할 수 있다. 무조건 도망치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답이 없다 싶을 때, 막다른 골목이다 싶을 때는 과감히 벗어나보자. 퇴사 후의 길을 지금 그 세계에서 찾으려면 보이는 것이 좁으니 한계가 있다. 먼저 벗어나야 그 다음도 잘 볼 수 있고 그 길로 제대로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또다른 길을 걸으려면 힘도 다시 비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더러운 것들을 겪으며 꿋꿋하게 걸어온 당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어줘라. 당신은 그 진흙탕에서도 버틴 사람인데, 가는 곳이 어딘들 잘 하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훌륭한 당신의 가능성을 믿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