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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May 29. 2022

남아있는 나날

나는 스티븐스와 다른 사람이었는가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너무 느린 속도로 석양이 질 무렵까지 오면, 방향은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관성의 법칙은 너무 오래 온 길일수록 더 강하게 작용된다.

그래서 때론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정말 늦은 것일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각과 용기는 늦든 안 늦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키라고 믿는다.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던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자칭 "품위있는" 집사 스티븐스는긴 세월, 충실한 집사로서 성실히, 그리고 잘 살아왔다고 지나치리만큼 자부한다.


소용돌이같던 19세기말 20세기 초 격동의 세월속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이들의 모임을 준비하고 그들을 곁에서 지켜본 집사인 그는, 세계사의 소용돌이를 목전에서 보고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무엇에 기여하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위대한 자들의 위대한 여정에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하나의 보탬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일을 하느라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사랑도 놓치고도 무슨짓을 한지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저, 믿었던 그의 나리가 이용당한다고 누군가 일러줄 때에도, 그는 그저 무뇌아처럼 그가 충실해야 한다고 믿은 집사질에 충실했다.


실패란,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고 주인으로서 자신의 판단을 토대로 무언가를 선택했을때에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의 주인은 자신의 아둔함으로 나치에게 이용당한 나치의 선봉장들 중 하나로 전쟁 후 심판받고 몰락했다. 그의 주인은 그래서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실패를 했고, 실패했음을 인정할 수 있었지만,


스티븐스는 그럴수 조차도 없었다.


스스로의 아둔함을, 석양이 질 저녁무렵이 되어서도 알지 못하는 그에게   

남아있는 나날이란 희망은 희망일까.


상이란 게 괜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싶고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내게도 많은 반향을 준 책이었다.


나의 남아있는 나날이란 어떤 것일까.


번듯한 직장의 번듯한 정직원으로 그저,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던 시간들이 스티븐스와 다르다고  

말할수 있을까?


회사의 많은 직원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페이지는 몇가지가 있지만,

맨 마지막 섹션에 김남주 번역가가 쓴 글 중 한나아렌트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다.


아이히만이란 자는 악중의 악, 악의 근본이라 생각이 들고 정말 이상한 사람일것이라 흔히 생각하지만

그는 매우 충실하고 성실한, 평범한 인간 중 하나였다고.

그래서 악이란 건 지시의 주체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그저 시키는 대로 의식없이 행하는 평범한 자들의 무심한 관성에서 더욱더 뻗어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과 크게 다를 바가 있는가?


자신이 귀족인지 집사인지 모호하게 밝히지 않는 충직한 악인 스티븐스와 우리는 뭐가 다른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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