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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Aug 02. 2024

나만의 안전기지를 만들었다

매일 펼쳐진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한 여자아이의 고백

드디어 책상 앞에 앉았다.


나만의 세이프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제 하루종일 창고가 되어있던 서재방을 치우고 쓸고 닦았다. 묵은 짐까지 싹 버리고 나니 제법 근사한 방이 되었다. 원래 만들려던 베란다 휴식공간 프로젝트를 약간 수정했다. 베란다에도 해먹침대존을 만들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래도 방이 넓으니 이게 더 좋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베란다존에서는 부모님 집이 보인다. 모종의 이유로 부모님에게 얼마 전 학을 뗀 이후로 그쪽 방향으로는 꼴도 보기 싫은데 하필이면 베란다 존이 가장 서로의 집이 잘 보이는 곳이다 보니, 휴식이 될 리 만무하단 판단에서다.


 요즘 핫하다는 라이프편집숍 스툴을 제법 큰 돈을 주고 샀다. 거의 하루만에 배송이 와 그 위에 화분까지 올려두니 화룜점정. 내 서재방 뷰는 근사한 공원뷰+시티뷰다. 서향이기 때문에 해가 질 오후무렵이 가장 아름답지만,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아침에도 글을 쓰기 제법 괜찮다.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이 방에 따로 빔프로젝터가 있으면했는데 내 맘에 차는 물건은 굉장히 고가인지라, 침실에 있는 이동형 TV를 옮겨가며 쓰다가 그냥 질렀다. 고민하던 시간이 아깝도록 만족하고 있다.


 평온하고 잔잔하게 살고 싶었다. 인간이 도저히 예기치 못하는 사고를 피할 순 없겠지만, 인간으로 인한 사고만큼은 내 인생에서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다. 그런데 몇 없는 내 주변사람이 사고를 친다. 부모님이다.

내 동생도 나도 살면서 집안에 우환이나 걱정거리가 될 만한 사고를 친 적이 거의 없다. 아니, 없다. 하지만 우리 남매의 생애는 늘 조마조마했다. 부모님 때문이다. 어릴 땐 그들이 둘러대는 숱한 이유들로 그들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그것은 그저 구차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열살 남짓한 우리 앞에서도 목을 졸라대며 서로 죽어를 외치더니 70 노인이 되어서도 그러고 있다. 부끄러움을 알 만한 사람들이었으면 설사 홧김에 그랬더라도 자식에게 미안했겠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없다. 제발 갈라서달라는 자식들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내가 바보다. 그럴 거면 자식핑계는 집어치웠으면 한다. 집에 강아지가 안 보인단 이유로 자고있는 아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놓고는 내게 전화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니 엄마 니가 데려가고 개나 데려오라는 인간이며, 119까지 불러 응급실 가서 겨우 휠체어 신세를 지고 집에 돌아와놓고는 사과받았다며 "니 아빠가 너한테 잘못한 게 무엇이냐?"를 시전하는 인간이며. 둘다 똑같다.

 

 왜 그럼 그동안 손절치지 않고 사이좋게 잘 지냈냐고 비난한다면 할 말이 없다. 맞다. 내가 등신이다. 교통사고로 이석증이 도져 아픈 와이프를 패서 얼굴을 밤탱이로 만들어놓고 사라지고, 밤탱이가 된 사람은 의식이 없어 전화통화도 어려울 지경이라 놀라 회사에서 뛰어가 케어한 건 나다. 파리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한국에 전화했더니 혀가 꼬인 상태로 거기서 뒈지지 왜 살고 지랄이냐는 말을 들었을때도 그냥 "아이고 어젯밤 카톡으로 다투시더니 화가 나 막말을 하는구나"하고 그냥 언제나처럼 넘어간 내가 등신이다. 아, 또 안 그럴때는 사람같을 때도 있다. 아침이면 아내와 딸을 위해 커피를 타주고, 강아지를 정성껏 돌본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집에 사 들고 들어온다. 가족들에게 쓰는 돈은 안 아끼고, 어릴 적부터 많이 보고 들으라고 메이커 신발은 안 사주셨어도 여행은 어느 누구보다 아끼지 않고 해외로 국내로 많이 시켜주었다. 동일인물 맞다.


 다툼이 너무 힘들었다. 그 부분만 빼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틀렸다. 가정폭력은 범죄다. 범죄자가 평소 가정적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이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한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일까? 아니, 정말 다 양보해서 한번은 정말 한번은 실수였다 치자. 상습범을 실수라고 할수 있나?

절대 아니다. 그들은 안다. 지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를. 뭘 잘못했는지를. 경찰이 왔을 때, 구급대원이 왔을 때 얼굴이 시뻘개져 광기어린 눈을 해가지고 성질을 버럭버럭 내던 무법자는 갑자기 공손하고 멀쩡한 사람으로 돌변하는 걸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또다시, 두 사람의 그런 사고를 수습할 자신이 없고 하고싶지도 않다고. 이제 나와 아빠의 관계는 끝났다고. 엄마도 그만 같이 살길 바란다고. 하지만 그녀는 하지만 전과 똑같은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선택을 할 수밖에.


 열다섯살 때, 매일밤 맞고 쫓겨나고 욕을 듣던 엄마가 참다못해 과도를 들고 남편에게 다가갔다. 팬티바람의 그 남자는 겁에 질려 자고있던 딸의 방으로 도망 와 방문을 잠갔다. 화가 나 빨리 나가서 엄마를 말리라는 나의 말에 그는 시끄럽다고 했다. 허옇게 질려가지고는. 문 앞에서 엄마는 자신의 손가락을 그었다. 나는 손가락을 그어서 그렇게 피가 많이 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베란다창에 올라가 뛰어내리려고 하는 엄마를 아빠가 설득했고 그날 밤은 어린 우리남매에게 죽도록 길었다. 새벽세시에 나는 몰래 이웃집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잠시 올라왔었지만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제발 이 시간을 무사히 끝내주신다면 앞으로 아무것도 신에게 빌거나 기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신은 내게 응답했고, 두 사람은 살았다. 거실에 마치 토마토케첩을 몇 통 쏟은 것같이 찐득하게 눌어붙은 피가 낭자했다. 나는 남동생이 보기 전에 수건을 빨아 끈적한 붉은 것들을 닦아냈다. 그러고 나니 현기증이 났다. 머리를 짚고 일어난 내게 엄마는 말했다. "미친X." 그날 이후로 나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날의 상처가 너무 커서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종교를 버렸다. 그 후로 20년이상 지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열다섯의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일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날 그 욕을 들어야 했던 건 내가 아니었다는 걸.


 더욱더 열받는 부분은 이거다. 회사에서 나는 오랫동안, 거의 재직기간의 대부분을 어려운 일, 풀리지 않는  일,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지저분한 프로젝트의 뒷정리를 했다. 왜 나에게는 남들처럼 시작하는 프로젝트, 구조가 깔끔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나 업무가 주어지지 않는지 궁금했다. 처음엔 연차가 적어서겠지, 다음엔 내가 운이 없어서겠지라고 생각했다. 또 틀렸다. 뼛속깊이 익숙해진 뒤처리의 재능을 회사놈들이 기가 막히게 아는 것이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일이라도 삐끗해서 사고가 나면 골치아픈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 맡길만큼 책임자들의 간이 크지 않는 회사였다. 내가 일을 못했던 게 아니라, '그 일'을 잘 했기 때문에 맡긴 것이다. 기분 더럽게도. 그리고, 그 공은 온전히 나의 부모다. 용서할 수가 없다. 감정 쓰레기통만이 아니고 나를 본인들 사고수습, 노후보장 노예쯤으로 여기고 있던 것이다. 그 취급에 익숙해진 나는 회사에서도 그딴 취급을 받았던 거고.


 더이상은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 그 가정폭력범한테는 말도 아깝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내 뜻을 분명 전했을 거다. 카톡 폭탄이 왔다. 예상대로 변명 범벅이다. 정식으로 사과했다던데 과연 엄마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설사 사과를 했대도 그건 임시변통이라는 데 내 모가지를 건다. 40년 이상 맨날 아픈 아내랑 산 남편죄냐며 자신도 헤어지고 싶단다. 그럼 헤어져 이새끼야.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병먹금. 아픈 노견을 내가 키우겠다고 했지만 그 인간들이 내놓을리 만무하고, 법적으로도 데려올 수가 없다. 개한테 해꼬지는 안할테니 그부분은 어쩔수가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행한 나쁜 짓의 대가일 뿐이니 어떻게 감정적으로 호소를 하더라도, 또 내 탓을 하더라도 개소리니 신경 끄기로 한다. 누군가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가족의 울타리가 있다면 회복가능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놈의 가 족같은 울타리 안에서 매일이 전쟁이었다. 어차피 각자도생. 나를 아껴줄 것은 나 뿐이다.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음주운전, 무면허 운전을 상습적으로 한 인간이 또 내 눈에 띈다면 신고할 것이고, 그의 아내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또한 신고할 것이다. 모든 전화와 대화는 녹취 혹은 녹화될 것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너무,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관대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나의 잘못도 있다고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음주로 집행유예를 받아놓고 마누라와 차바꾸기를 해서 무면허 운전을 하겠다는 두 사람의 미친 계획은 나한테 걸리는 순간 신고라고 하자 "철딱서니 없는 소리 그만하라"고 했다. 철딱서니? 누가 철이 없는 것 같아? 내가 되물었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 사고를 칠 것이다. 또 싸울 것이고, 자신이 벌려놓은 일을 수습못해 펄쩍 뛰며 내게 전화할 인물들이라는 걸 안다. 천륜이란 게 잘 끊어지지도 않고, 너무 가깝게 살아버려 결국 끝끝내는 내 손에 매번 정리될 것이란 건 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내 집 한 구석에서라도 아무 걱정없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정신과 마음을 쉴 곳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내가 살던 집은 전쟁터였다.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며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버리고 싶지 않다. 사람이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이면 어느새 감정에 지배당해 자기자신을 잃어버린다. 나의 부모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아갈 지 몰라도, 나는 나이기에 다르게 살기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화분을 키우면서 나날이 변해가는 식물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다. 아침이면 일어나자마자 집에 있는 식물들을 살피며 물을 주고 서재로 와서 오늘 듣고 싶은 음악을 틀어놓고 컴퓨터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길어봐야 5분-10분?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과 나무들의 흔들림을 보며 날씨를 가늠한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돌아온 집에서 밥을 먹고 TV를 보고 편안히 잠을 자는 것. 안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집에서. 그것이 어린 나와 동생이 바라던 전부였다. 30년이 흘러 동생은 해외로 이민을 떠나버렸고, 때론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나는 동생의 결정을 마음깊이 이해한다.


 이 글을 업로드할지 고민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공개하는 이유는 가정폭력에 시달려 온 사람들에게 나와 같은 경우도 있음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부모가 나쁜 것은 자식의 잘못이 아니라고. 얼마든지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고. 그리고 도망을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안전기지라도 마련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돈은 중요하지만 돈이 인간을 살게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한평 작은 공간이라도 마음놓고 쉴 수 있어야 인간도 산다. 인간의 정신도 마음놓고 숨을 쉬어야, 죽지않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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