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원인가 사직원인가
지금 죽을래 나중에 죽을래
"앨리스씨, 복직 언제 할꺼야? 우리 팀에 T.O 있는데 오지?"
길 것 같던 1년은 언제 지나갔을까.
무더위의 끝자락 쯤, 낯익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회사였다.
사업부서의 팀장이었다. 친분이 특별히 있는 사이는 아니어서 회사를 더 다닐지 말지 고민중이라는 말은 할수 없었다. 뭐, 어쨌든 깽판 놓듯 떠난 회사에서 누구든 오라고 하는 일이 나쁜 일만은 아니니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했다. 하지만 그 팀장은 솔직했다.
"하지만 오면 근무성적은 포기해야할걸. 아무래도. 그런데 다른 팀 가도 아마 그럴껄? 그러니 고민 잘해."
하하. 가도 꼴찌고 안가면 굶고. 그냥 굶을까.
"앨리스, OO팀은 가기 싫지? 사람 달라고 엊그제 말한 모양이던데. 가고싶은데를 빨리 정해야하지 않아?"
친한 회사선배의 전화였다. 선배는 조심스레 말을 돌려 전하고 있었다.
아..OO팀이라면 내가 휴직하기 직전 있었던 팀의 팀장이 새로 맡게된 부서였다. 오마이갓.
아직 복직이 한달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나는 한달이나 남았으므로 지금부터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회사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복직시기를 당길 수 없느냐고 묻는 인사팀 직원의 연락도 따로 받았다. 사람이 어지간히 모자란 모양이었다. 우리회사는 휴직하는 직원이 꽤 많다. 아파서도 있고 육아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를 회사가 모를 리 없다. 이 지긋지긋한 회사의 나사못 노릇이 지쳐서다. 열에 아홉은 솔직히 그렇다고 봐야 한다. 나처럼 정신줄 놓기 직전까지 돌림당하다가 한계가 오면 휴직계를 낸다. 그러다 경제적인 이유로 어쩔수없이 돌아온다. 1년이 길다면 길지만 또다른 안정적 생계수단을 찾기엔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남 얘기할 때가 아니지. 내가 지금 그 판이었다. 호기롭게 낸 나의 공모전 결과는 11월에야 알수 있었다. 그때까지 무엇을 할지는 사실 정하지 못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공부를 하러 해외로 가볼까도 생각하고 있었다. 방향도 성과도 내지 못한 마당에 대책없이 사직원을 던져도 될까? 말은 늘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막상 그 시간이 닥치니 망설여졌다. 그래서 50대 50의 비율로 고민을 하고있었더랬다. 나는 인사팀에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사직원 내려면 얼마 전에 내야 되나요?"
"사직이요?"
인사팀 직원이 다소 비웃듯이 대꾸했다. 나한텐 그렇게 들렸다. 니가 사직을 할 용기나 있구?
그래. 용기가 없는 게 사실이지만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란다. 진심이었는데. 그가 비웃던 말던 나는 사실만 알면 되니까. 사직원을 낸 후로 인사담당자, 부서장, 임원, 사장면담의 긴긴 경로를 거쳐서 그만두게 되어있다. 기간은 얼마가 들지는 대중이 없다. 보통 1달정도 걸리는 것 같고 아주 중한 사유가 아니면 뜯어말려서 주저앉힌다. 그러니 그 주저앉힘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할 때 제출해야 할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휴직기의 편안했던 마음에서 불안감이 휴직 전처럼 올라갔다. 다시 그 아사리판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인사팀에서 복직 전에 방문할 것을 전달했다. 사장에게 인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직 그만두겠다는 확신이 없으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로 들어갔다. 정말 오기 싫었던 그곳. 볼일만 보고 갈 거라서 친한 동료들에게 따로 연락을 하진 않았다. 인사팀으로 가니 친한 동료인데도 나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인사를 먼저 건네자 그제서야 2,3초간 유심히 얼굴을 보다 아,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머, 못 알아봤어. 미안해."
못 본 지 오래되어서 그런걸까? 내가 살이 10킬로나 빠진상태여서? 머리색이 달라져서? 아마 모두 다일 것 같다. 놀란 인사팀 동료가 내게 차를 건넸고 나는 사장이 시간이 날 때까지 잠깐 인사팀에서 대기했다.
조금 후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고 비서실로 내려갔다. 그러자 그 자리엔 전 팀장이 비서실장과 앉아있었다.
전 팀장은 엄청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내게 정신력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는 헛소리를 남긴 문제인간이었다. 나는 무표정하게 인사를 받았다. 웃기 싫었다.
"xx프로젝트는 아직도 그 모양이야. 아, 앨리스씨가 맡았던 그 회사, 아직 살아있어."
안물안궁입니다. 전혀요.
"전에 있던 팀으로 복귀하는거야?"
예의 그 쌀쌀맞은 투로 내게 말하는 비서. 그 사람도 뒤에서 비아냥대던 사람 중 하나였다. 아마 기피부서 탈출을 위해 휴직계를 쓰는 직원들이 많아져 앞으로는 휴직 전 부서로 복귀발령내는 인사원칙을 세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 그렇다면 땡큐다. 한 90프로로 퇴사로 확실히 마음이 기울테니까.
"들은 바 없어 모르겠습니다."
"사장님 오시네요."
나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완전 꼰대라떼이신 사장님께서 내 머리색을 보고 뭐라할지 기대됐다. 뭐라 주의를 주며 한소리 하면 네, 안그래도 퇴사할 참이라 괜찮습니다. 라고 대꾸를 할까. 머릿속으로 엉뚱한 시뮬레이션도 돌려봤다. 의외로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는 사장.
"오랜만에 회사 오니까 새롭지 않아? 바뀐 거 못봤어? 좋지?"
장난감 얻은 아이처럼 좋아라 하는 이분. 어이할꼬.
"아 네."
"좋지? 어때? 좋지?"
회사 내에 리모델링이 되고있어 일부 층은 완전 다른 건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그거야 뭐. 나쁘지는 않았다.
"예. 좋네요."
그렇게 면담이 끝났다. 그리고-
"본부장님 뵙고 가세요. 앨리스씨 오시면 꼭 얼굴 보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의 본받지마요 그사람.
아, 기억이 났다. 내가 원하는 부서에 발령내주겠다고 약속했던.
그 말에 설레지 않은 이유. 가고싶은 곳이 없어서다.
어찌됐든 나는 그와 대면하여야 한다. 그의 방으로 갔다.
"앨리스씨, 오랜만이야. 상태는 어떻고?"
"병원 계속 다니고 있고, 약은 10알정도 먹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이렇게 본부장하고 얘기할 기회가 별로 없지? 어렵고."
헐. 계급장 떼고 밖에 나가면 그냥 아저씨일 뿐입니다.
"앨리스씨는 뭘 제일 하고 싶어? 회사에서 하고싶었던 일 없었어?
뭐, 회사가 아니어도 이걸 하면 즐겁고 신난다. 이런 거."
"......"
회사에서 진심으로 솔직할 필요는 없다. 그런다고 정해진 답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럼, 싫은 것을 말해봐."
"네. 저 13년동안 이 회사에서 부서이동 딱 1번했습니다. 벌써 중견사원인데 사업부서만 있었어요.
지원부서에서 제 전공에 맞는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업부서 싫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숫자나 대민업무 자신도 없고 싫습니다."
솔직하면 안 되는데 너무 솔직했다. 어차피 그만둘 마음이 있었기때문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말했던 것 같다. 내 전공과 맞는 부서는 한두부서뿐이었다. 두 부서 다 내가 들어갈 만한 자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군.
"앨리스야. 사실은 몇달전에 네 거취에 대해서는 미리 얘기했었어. C팀에 가게 될 것 같아."
인사팀 담당자인 동기가 말했다.
그에게서 이미 사장실에 오기 전 들었던 터였다. 그래서 본받지마요가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했었다.
내가 원하는 부서로 가게 해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내가 국회의원 딸래미 쯤 되는 게 아니면 내가 원하는 자리는 회사 내에 누군가들도 원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나따위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뭐 장하다고 예쁘지도 않은 나를 좋은 요직에 앉혀주겠는가. 하지만 내가 가기 싫다는 자리에는 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앨리스씨가 갈수 있는 팀이 이 팀인데. 이 부서에는 껄끄러운 사람 없나?"
"없습니다."
결국 C 팀이었다. 역시.
그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싶은 직원이 어떤 직원인지, 일하기 싫은 직원은 어떤 직원인지에 대해 한참 얘기했다. 협조적이지 않고 자기 일만 하는 직원, 뭐 기타등등...그래서 물었다. 그거 제 얘기하시는 걸까요? 내가 너 그럴줄 알았다. 본받지마요가 말했다. 그런거 없다고 하기에 그럼 그 전에 같이 일하시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가 말했다.
"너무 말이 없어. 말좀 해. 앨리스씨. 다른 사람들은 내가 부서장이어도 미주알 고주알 와서 얘기도 하고 그러는데 안에서도 밖에서도 무슨 말을 하는 법이 없어. 조직도 사람사는 곳이고 관리자도 사람인데. 그냥 별 말 아니어도 할수 있잖아. 동료하고 소통을 해. 성격적으로 앨리스씨는 너무 내성적이야."
내가 말이 없다고??? 내가???
1일 1개그를 표방하던 내가, 그렇게 잔다르크처럼 나대던 내가 말이 없다니. 그는 확실히 나를 잘 모르는건가? 라고 생각했다가 아. 했다. 관리자인 그가 보기에 내가 말이 없다는 건 이런 거였다. 관리자한테 듣기좋은 말도 하고, 심기도 살피고. 이런 정치적인 행위들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뻣뻣하단 얘기다.
그래. 인정. 그말은 맞다. 나는 뻣뻣하다. 하지만 그의 본심은 그거였다. 너의 성격적 문제 때문에 회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거고 너의 병증도 너 자신의 문제다. 회사는 너의 문제에 잘못이 없다. 우린 배려하고 있다.
그말이 하고싶은 것일 테다. 더러운 회사놈들 내가 니들 속을 모르냐 하지만 의견을 말해달란 건 나니까.
"앨리스씨, 그리고 본인이 떳떳하면 아무 상관 없는거야. 나는 돈한번 받아본적이 없어. 그러니까 떳떳하지.
내가 잘못된 행동을 안하면 불안할 이유도 없어. 나는 그래서 편안해."
음? 이게 뭔 신박한 전개인가?
내가 떳떳한 행동을 하지 못해서 아프다는 거냐?
그리고 당신과 내가 함께 먹었던 고급 회나 고기들은 누가 돈 낸 걸까요?
그것은 접대 아닙니까? 현금뭉치 안 받았다고 접대 아닌겁니까? 어이가 없네?
양심이 살아있음 작은일에도 다리뻗고 못자고 양심에 털난 자는 별짓 다해놓고도 다리뻗고 잘 자는 법이다.
아니 그보다 더 어이없는건 대체 무슨근거로 내 불안장애를 떳떳치 못한 행동과 연장선상으로 놓는거지?
신박한 개소리에 멍멍, 이라고 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얼척 없으면 그냥 무시하게도 된다.
본받지마요의 특징 중 하나는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기분이 나빠진다는 거였다. 회사를 나와 운전하며 나는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에비~하고 생각을 지우개로 지워버렸다. 정말 희한했던 건 예전의 나라면 그런 그의 말에 상처를 받았었는데 더이상은 그게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그의 의견은 틀린 말도 많았다. 특히 신박한 개소리가 압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의견이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는 거다.
그가 말하는 그 기간동안의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직장상사로서 그가 마음에 들던 안 들던 나는 동료로서 그를 존중하고 다른 동료들과 같이 적당한 신경을 쓰고 안부를 물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적절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내 기준에서 그렇다. 그리고, 나는 떳떳하지 못할 짓을 하고 회사를 쉰 것이 아니었다. 계속 똥치우는 업무를 하던 내게, 내부고발자도 아닌 내게 프레임을 씌워서 모욕한 것은 회사였다. 그리고 그 제일 앞자리에 본받지마요가 있었다.
그렇게 1년만에 회사방문을 마쳤다.
복직명령일까지 2주가 남았다. 그 사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한번은 죽었다 깨어날 마음가짐. 나는 과연 언제 사직원을 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