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 위의 앨리스 Jul 25. 2022

7. 야근은 필수, 저녁은 옵션

중국집이냐 분식집이냐의 차이 정도


 2년차로 넘어갈 때쯤 되니 기초적인 일들이 손에 익기 시작했다.  잡일이든 무슨 일이든 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각종 협조문부터 내외부에 제출되어야 하는 자료까지. 하루에 적게는 10개정도 많게는 30개정도의 크고작은 문서를 생산했다. 거기에 우리 과는 감사원 특별감사를 받고있던 시기라 빠르게 정리되어서 나가야할 자료들이 산더미같았다. 그러다 보니 막내인 나는 자연스레 바로 위 선배들과 야근을 거의 매일같이 했다. 일찍 가면 한 여덟시? 쯤이고, 아홉시 넘어서 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일을 하다 보면 야근을 빨리 끝내고 싶은게 인지상정이다. 그렇지만 우리 과는 불문율이 있다. 야근 전 먼저 상사들의 저녁메뉴를 챙기는 것이다. 상사들이 저녁을 먹지 않는다고 하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왜냐하면 그만큼 일찍 퇴근하겠다는 뜻이니까. 상사들이 여덟시 쯤 해서 가주면 나 역시도 일을 정리하다가 아홉시 즈음해서 퇴근할 수 있다. 그러 저녁을 드신다는 건 아홉시 즈음해서 가시겠다는 계획인거고 그렇게 되면 나의 퇴근시계는 한시간정도 늦춰진다. 일이야 늘 쌓여있으므로 사실 야근을 한시간 더한들 내일 할 일이 조금 줄어드는 것 뿐이다. 계속 쌓이게될 일을 생각하면 남아서라도 정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래도 상사가 있는 야근과 없는 야근은 느낌이 하늘과 땅 차이다.


 다른 회사도 그렇겠으나 저녁식사는 야근수당 외 식대가 따로 배정된다. 그래서 그 배정식대를 매번 처리하는 번거로움을 피해 월 1회 장부에 달린 금액을 정산해서 처리한다. 대부분 중국집과 분식집 두어곳에 장부를 "튼다". 상사의 취향에 따라 중국집일지 분식집일지가 결정된다. 상사가 먹지 않아도 바로 윗선배가 밥을 먹자고 하면 먹어야한다. 당시 나의 바로 윗상사는 대리님이셨는데 그분은 분식을 선호하셨다. 우리는 돌솥비빔밥과 라면과 김밥을 주구장창 먹어댔다. 그리고 우리의 상사는 중국집을 선호하셨고 종종 6시에 메뉴를 시켜놓고 일찍 가실때도 있어 우리는 그분이 드시지 않은 볶음밥까지 싹싹 먹어댔다.


 아무리 일을 한다지만 앉아서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는데 그렇게 고열량의 음식들을 매일 저녁 넣으니 살이 찔 수밖에 없다. 빼빼 마른 체형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배가 나와본 적이 없던 나의 체형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배가 나오다니.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몸의 변화인데 그때만 해도 충격적이었다.(20대 중후반이었으니까 그렇게 봐주자) 엉덩이는 점점 더 퍼지는 거 같아서 불안했다. 그렇다고 음식을 나만 안 먹기도 이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걸 왜 눈치를 봤나 싶은데 그때는 다른분들 다 드시고, 넌 안 먹어? 이러면 참 불편했다.

그리고 실제로 먹지 않고 그 긴 시간을 앉아있으면 배에서 꼬르륵 거리고 난리가 난다. 관리를 생각했더라면 뭐라도 싸들고 다녔어야 하지만 퇴근해서 뻗고 그다음날 머리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가는 삶을 반복하다 보면 그런 생각도 못 한다.


 일은 마치 쓰레기같아서 치우고 또 치워도 쌓였다. 그 쌓인 일을 어떻게든 깔려죽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처리했다. 그냥 하루하루 폭탄이 터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지냈다. 지금이야 눈감고도 할 일일듯 하지만 (그러기엔 양이 진짜 많았다) 신입사원의 업무속도와 능력으로는 분명 버거웠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귀도 열고 눈도 열고 손도 미친듯이 움직였다. 귀를 열어야 하는 이유는 귀동냥을 해서라도 다른 팀원들의 일의 흐름을 알고 있어야 내가 하는 일에도 속도가 붙고 정확도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바쁜 선배들 대신 전화를 당겨 받았을 때 어떻게 처리할지 알려면 대강의 "배경지식"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소머즈처럼 속닥이는 소리까지 들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눈도 열었다. 내가 생산해내는 문서 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떤 문서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어떤 보고서를 냈는지를 알고 있어야 했다. 팀장님은 다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막내에게 일을 시키곤 했다. 그때 예? 그게 뭔가요? 버벅대면 팀장이 시간도 없는데 언제 1부터 10까지 다 설명하고 앉아있겠나. 그거 아니어도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라 시간이 걸리는데.


 그렇게 나는 떡실신과 야근의 무한루프를 반복하고 있었다. 너무 피곤했고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쟤는 진짜 안되겠다"는 소릴 듣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조직에 쓸모있고 싶었고 그래서 나의 영혼을 갈아넣으며 일했다. 나는 그렇게 일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남보다 노력이 더 필요했다. 특별히 억울하거나 그때를 후회하진 않는다. 그 시절은 필요했고 그런 시간이 있어서 그 다음이 있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자잘한 문서질의 시간이 내게 준 게 있다면 업무처리속도다. 그리고 눈치. 상사가 어떤 문서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를 수없이 문서를 결재받다보면 파악할 수 있다. 업무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사는 작은 것 하나라도 구두로 먼저 보고를 올리고 나서 전자문서를 결재받길 원하는가 하면 어떤 상사는 일일이 구두로 보고받는 것을 귀찮아 한다. 그건 일단 처음부터 이렇게 저렇게 해 봐야 알수 있는데 그 과정이 바로 업무 능력을 키워나가는 시간이다. 그리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협조문 한장에 이미 바탕에 깔려있는 숨겨진 맥락을 알아내고 그 과정에서 우리 과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익힐 수 있다. 그러면서 업무를 학습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것 처럼 보였지만 절대 쓸데없지 않았다.


 공기업에 워라밸을 찾아 오는 신입 직원분들이 계시다면, 그래도 잘 왔다고 하고 싶다. 저건 내 시절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러분들은 매우 머리가 좋고 영리하며 손도 빠르고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는 방법을 아는 스마트한 사람들이니 나처럼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저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공기업에 무조건 매일같은 워라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업무특성에 따라 야근도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다. 어떤 부서는 하루종일 전화를 받거나 외근을 다니고, 본업은 6시부터 시작한다. 비효율적인 것 안다. 별 쓸데도 없는 문서를 생산해내고 접수하고 생산하고의 반복이 의미가 크게 있지도 않은데 공기업은 왜 그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그말도 맞다고 하고 싶다. 이 집단에 속해있는 나를 포함한 다른 직원들도 그러지 않을 방도를 찾고싶을텐데 공공기관의 특성상 없앨 방도는 딱히 없어보인다. 그런 획기적인 방안을 알고있다면 그 방법을 쓰고 야근을 안 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런 구닥다리같은 시스템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기업을 찾아보시길 권하겠다. 아직도 숱한 협조문서를 받고 뿌리는 문화는 존재하고 그런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상사로 앉아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6. 내 가치는 1xx만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