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행기 공포증은 이제 영영 안녕인가요
"Delay, 07:00 to 10:00"
잠을 반만 자고 벌떡 일어나 어두운 공항도로를 무지하게 밟아대고, 장기주차장에 차 대놓고 늦을까봐
공항쪽으로 중형 트렁크를 질질 끌고 10분을 경보로 돌진한 내게 전광판은 모욕감을 주었다.
망할. 이래서 연착으로 악명높은 저가항공은 절대 안 탄다고 다짐을 했건만 반값에 가까운 티켓값에 내가
잠깐 돈생각에 미쳤지. 미쳤어.
오는 비행기가 연착되어 현지에서 신나게 놀고 탄 적은 있어도, 이렇게 오래 출발하는 비행기가 늦어진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세시간씩은 조금 너무하지 않나. 카운터에 가는 도중에 출발시각은 10시에서 10시 50분으로 늘어났다. 와우. 제시간에 비행기가 출발했으면 현지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중국 군사훈련 때문에 지연되었습니다."
설명이 너무 간단해서 할 말이 없다. 중국이 펠로시 의장 대만 방문 건으로 항의 무력시위를 실탄으로 쏴대서 중국 영공 비행이 불가한 상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원짜리 밀 쿠폰을 내밀었다. 항공사 잘못도 아닌거 같은데. 어찌됐든 나는 다섯시간을 공항에 묶이게 되었다. 새벽 다섯시 반. 어디 그렇다고 갔다 올 데도 없으니 어쩔수 없이 공항 출국장으로 들어왔다. 무려 3년 만이다.
코로나가 갑자기 또 심해져서 사실 해외에 나가기 적절한지 고민되는 시점이었지만 이러다 또 하늘길 막혀버리면 어쩌나 싶어 눈 질끈감고 예약했더랬다. 원래 가려던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까웠고 가려던 곳의 비행기표 값 정도에 5성급 호텔 리조트 클럽룸 4박비용까지 모두 커버되는 금액이었다. 다낭행 비행기표 왕복36만원. 솔직히 코시국 전의 가격에 비해서는 비싸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아 다섯시간. 어떻게 버틴담.
별 관심도 없는 면세품 쇼핑이라도 떠나야 하나.
신기하게도 면세점은 일찍 열었다. 그래서 샤넬 매장에 들어갔다. 백화점엔 샤넬런이라고 뭐 줄도 밤새워 서던데 여기는 그런 게 없었다. 그냥 호기심에 들어갔는데 원래 사고싶었던 건 있었다. 코시국 전에 지인과 파리 런던 해서 일주일동안 빈티지샵 가서 샤넬 브로치하고 자켓 쇼핑 좀 하자고 했었기에. 브로치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영 원하던 디자인이 아니었다. (물건도 별로 없었다) 가격도 달러가 너무 올라서 메리트도 없었다.
우와. 근데 가방이 왜이렇게 비싼걸까. 다들 하나씩 들고는 다니는 샤넬가방. 나는 그게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예쁜 가방은 거의 중고차 경차 한대 값정도는 하더라는.
(손 떨려서 가방 못 맬 거 같다. 그냥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덕분에 명품구경은 실컷 하고 다녔다. 사실, 예전같았음 향수에 화장품에 손에 바리바리 그것도 미리 주문해서 픽업다니고 했을텐데 이젠 그런 욕구가 별로 들지 않는다. 가격메리트가 떨어진 것도 한몫 하겠지만 그냥 귀찮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할텐데. 여행을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아직은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다.
그 긴긴시간 보낼 데가 없어 살 것도 없는 명품매장 구경 실컷 하고 밥먹으러 잠깐 식당에 들렀다가
게이트 앞으로 갔는데, 아니...이륙 30분도 안남았는데 비행기가 안 왔단다.
아니 승무원선생님, 목적지까지 오늘 안에 갈 수는 있는 건가요?
다행히도 11시쯤 비행기가 왔다.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승객들이 내리고 미친듯이 빠르게 소독을 하시더니 타란다. 이렇게 비행기가 왔소 갔소 해도 괜찮은걸까?
무섭지만 난 약기운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얼른 타고 눈을 붙였다.
예약하고 좌석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면서 내가 과연....이라고 생각 안 한건 아니지만, 약을 먹고 탈 거고 거기다 비행시간이 4시간여로 짧은 편이니 괜찮을 거 같았다. 나는 약기운이 늦게 드는 편이라 기다리면서 약을 미리 먹었고, 비행기를 타서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부끄럽게도 좌석에서도 1시간 정도 대기했던 거 같은데 그때도 코를 골았다. 몇번을 내 코고는 소리에 깼다 잠들었다를 반복했다. 이륙을 했는지 어쨌는지도 모른 채 비행기가 출발했고 나는 좁아터진 이코노미석 그것도 창가자리에 구겨져서 미친듯이 헤드뱅잉을 하며 잠을 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이륙 후 두시간정도 지났을 때였다.
솔직히 원래 계획된 시간보다도 비행시간이 1시간이 더 늘어나있었다. 저가항공기라 따로 모니터화면도 없어서 노선이 바뀌어 그런건지 어떤건지도 잘 모른다. 기장도 왜 시간이 늘어난 건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깨어있는 시간 동안 비행기는 별 미동없이 잔잔하게 있었고 원래 아침 9시 40분에 떨어지기로 했던 비행기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도착을 했다. 거의 하루를 공항에서 까먹은 셈이다.
그랩을 불러서 타고 20분쯤 가서 리조트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그냥 쉬기다. 시내관광도 안할거고
리조트에서만 지내려고 일부러 클럽룸으로 예약했다. 조용하고 높은 층을 원한다고 미리 말한 덕분에 정말로 아이들 뛰고 소리지르는 것 하나 들리지 않는 한적하고 조용한 층에 조용한 위치에 있는 바다뷰의 방으로
배정됐다.
정말 놀고 먹고 쉬려고 카드와 팁줄 돈만 환전해가지고 왔다. 이렇게 환전도 안 해보긴 처음이다. 요즘은 카드가 다 되니까. 특히 호텔에서는 더더욱. 택시까지 그랩을 타다보니 현지화가 필요없었다. 마사지도 어디 타고 나가고 이런 거 하기 싫어서 그냥 호텔 스파를 예약했다.
안타깝게도 중국 덕택에(?) 하루를 그냥 날려버려서 오자마자 체크인하고 바로 클럽으로 향했다. 내가 묵은 리조트 클럽룸은 클럽액세스가 되는데 평소에는 클럽에 음료가 종류별로 있어 아무때나 갖다마시면 되고 오후 다섯시반부터 두시간동안은 해피아워라서 저녁 겸 안주로 무제한 술과 약간의 뷔페를 제공한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가 포인트여서 이 해피아워는 거의 뭐 음주가들에게는 천국의 시간이라고 할수 있겠다.
나는 알쓰에 가까워서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가서 칵테일과 맥주와 약간의 와인을 즐겼다.
내게는 그정도의 음식도 저녁으로 충분해서 따로 저녁을 사먹지 않아도 됐었다. 룸 가격이 다낭치고는 고가였지만 귀찮음과 더러움이 싫은 내겐 아까운 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조식도 주니까.
다낭 시내는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커플여행자 혹은 가족단위 여행자들이었다. 친구들끼리 온 경우도 아주 가끔 있었지만. 1인 여행자는 리조트에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시내나 다른 현지 식당을 이용하면 아주 저렴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마사지도 시내에 가까우면 훨씬 저렴하게 즐길 수 있으니 1인 여행자들은 나처럼 이런 리조트에 짱박혀 있기보단 그런 여행이 가성비가 더 좋겠지. 다낭이 워낙 가족여행의 성지다 보니 더 그렇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여행자 비율 중 한국인이 많진 않았다. 경기도 다낭시라는 별명이 무색하리만큼 베트남 관광객이 많았고, 그다음 서양 관광객들도 꽤 많았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다.
혼자서 밥도 잘 먹고, 혼자서 수영도 잘 하고, 혼자서 술도 잘 마신다.
비싼 값을 내고 묵은 숙소는 그 값을 톡톡히 했다. 어떤 방을 원한다고 명확히 말하던 나를 위해 컨시어지는 방이 마음에 드는지, 상태는 어떤지를 따로 체크했다. 그리고 올 때마다 내가 주로 앉던 자리를 안내해주면서 "어제 앉은 자리도 괜찮은지" 꼭 물었다. 내가 체크인할 때 안내해주지 않은 직원도 내 룸이 어딘지 아는 것처럼 "그방 어때? 러블리한 방인데."라고 물어봤다.
사실 다른 관광지에 갔을 때 돈을 써도 이렇게까지 친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런 거 보면 돈도 돈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친절한 것도 있는 것 같다. 허세도 없고, 대체로 점잖다. 도로에서 경적을 미친듯이 울리며 운전하는 것만 빼고 말이다.
베트남 날씨는 한국하고 거의 비슷했다. 오히려 한국이 더 더운 거 같은건 착각일까. 비가 오니 수영하기 좀 춥다 느낄 정도였다. 낮기온이 29도인 적도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한적한 리조트 안에서 나는 룸차지로 칵테일이며 코코넛커피며 막 시키고 먹고 마시면서 수영하다 벌렁 누워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클럽라운지에 가서 또 칵테일에 안주를 먹고 어두워지면 방으로 돌아가서 넷플릭스를 봤다. 아. 야식도 시켜먹었다. 여긴 경기도 다낭시가 확실한 거 같다. 배달 어플로 음식을 시키면 한국만큼 빠르게 음식이 배달되어왔다.
돈이 참 좋다. 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솔직히 그랬다. 지독하게도 회사를 떠나고 싶어 휴가만 기다렸는데 그나마도 일을 하니까 이짓도 가능했다는 걸 인정 안 할수가 없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오는 날까지 수영을 하고 코코넛 커피를 마셨다. 사실 내게 비행기탈 때 두려움은 집에 갈 때가 크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똑같이 약을 먹고 가도 한국행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잠도 잘 안온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동영상을 받아서 갔다.
터뷸런스가 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괜찮았다. 너무 좁아서 숨막히기는 했지만 이번엔 운이 좋아서 3-3배열에 세좌석을 독차지하고 누워서 왔다. 그럼에도 힘들었던 걸 보면 앞으로는 최소한 국적기를 타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너무 좁아서 사실 여자인 나도 조금만 자세가 흐트러지면 무릎이 앞좌석에 부딪혔다.
이번엔 4시간이었지만 다음엔 분명 최소 8시간 이상의 거리를 갈 것이다. 이번여행은 4시간짜리 비행을 무사히 마친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다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크게 힘든 것은 없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나의 비행기 공포증은 끝인걸까. 잘 모르겠다. 사실 아직도 8시간 이상 탄다는 걸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하지만 내가 가고싶은 곳은 전부다 멀리 멀리 있다.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직업을 다시 가질지는 확실히 몰라도 분명히 비행기는 탈 것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휴양지가 이젠 싫지 않다. 분단위로 쪼개 여행을 다니던 30대 초반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조금은 여유롭게 시간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더 나이가 들면 여행자체가 매우 귀찮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 전에. 그 전에는 꼭 비행기타고 지구 한바퀴를 돌아야 되는데. 마흔에는 오로라도 보고 사막투어도 가고싶다. 갈수 있겠지? 제발 비행기 공포증은 이제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었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