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지 않는 목요일 오후의 단상
오후 3시 반,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는다. 조퇴를 할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안 가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회사에 복귀한 지도 어언 1년.
그냥 살아서 숨쉬고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다니고 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훅 낮추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흔히들 우울증은 자신에 대한 기대치, 앞날에 대한 희망이 현실과 괴리가 클 때 잘 걸린다고들 한다. 내 주변에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분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나도 그 범주에 일부는 걸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무기력하고 살기 싫어지는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앞으로 더 나아질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얼마전에 직원들과 식사를 함께했다. 갈 땐 생각이 없었는데 가만히 보니 내가 제일 늙은-고참 이었다. 함께 간 업체 임원의 나이를 물어보니 나와 같았다. 회사 밖 내 또래의 위치는 임원급. 그럼 난 뭐지. 그분의 외적인 부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항상 그분과 일하며 그분의 회사 내 직책을 인지하며 대해왔기에 그분의 나이는 내 한참 윗선이라고 생각했었다. (죄송하지만 동안은 아니시기도 하다...) 우울한 충격에 나는 그날 저녁부터 삭신과 마음이 쑤시는 듯한 경험을 했다. 아, 전문용어로 마상이라고 하나요.
마상의 주요원인은 노화다. 다른 건 없다. 나의 선배가 이런 비슷한 경험을 몇년전 얘기해주며 너무 충격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속으로 그랬다. 선배의 외모가 동안이라 사실 연배로 보면 그렇게 위로 보이진 않는데 왜 그렇게 나이를 의식할까...하고. 그런데 내가 겪어보니 뭔지 알겠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그 마상을 아주깊이 들여다보면 노화의 서러움과 함께 나잇값에 대한 부담감이 서려있다. 물리적 나이와 늙음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더 많이 산 세월과 경험만큼 성숙하고 현명한가에 대한 물음표와 불안감은 사실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 지 모르겠다. 정량적으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의 메타인지가 나는 되지 않는다. 내가 본 현명한 어른들만큼 나도 지혜로운가? 여물은 인성을 갖췄는가? 아니다. 하지만 철부지에 나이만 잔뜩 먹은 쓰레기인간은 아니었음 좋겠는데 자신이 없다.
우리사회는 확실히 나이대접이 기본값으로 있는 곳이다. 공짜로 나이를 먹은 나도 어릴때보다는 보이지 않게 주변인들에게 우대받는다. 물론 나역시도 연장자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해야할까? 그런 건 분명 있고 아주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킨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의하진 않지만 나의 한 선배는 자신보다 윗사람이 퇴근하기 전까지 먼저 가지 않는 것을 기본예의라고 하였다). 그게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라면, 나잇값을 하는 것도 거기에 셋트메뉴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테면....입은 좀더 닫고 지갑은 좀더 여는? 물론 마음처럼 항상 이놈의 입이 닫히지는 않지만. 노오력은 하고 있다.
나의 후배가 나를 배려하듯 나도 후배를 배려하고....그 방식은 후배가 나를 배려하는 것보다 더 세련되고, 더 지혜로우며, 그 크기는 더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잇값이니까. 그런데....항상 어렵다. 나의 선배들도 이런 고민들을 했겠지? 이 친구들이 뭐가 제일 필요할까? 말하지 않지만 이런게 힘들까?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한마디로 눈치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차라리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더 쉽다고 느껴질 정도로. 젊은 친구들의 나이를 거쳐 이 나이로 온 건데도 왜 잊어버린 걸까? 아니, 다를 수도 있겠다. 내가 그 나이일 때와 지금 이시기에 그 나이를 보내는 사람의 생각은 다르니까. 나이가 들면 인간관계가 좀더 쉬워질 줄 알았는데. 맨날 실수하고 실수했을까를 고민한다.
며칠 전 회사에서 어른들끼리 감정싸움을 하시는 걸 봤다. 그 분들의 내막은 모른다. 그분들도 여전히 어려운 그분들만의 세계가 있는 거겠지? 사는 건 계속 어렵고, 나잇값도 어렵고, 늙어도 집에는 늘 가고싶다. 일하기 싫다. 이거 나만 그런거 아니지? 분명 내가 존경하는 상사도 "재미없다" 와 "일하기 싫다"를 입에 달고 사셨다. 하지만 일은 기막히게 하셨고,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셨다. 나도, 회사에서 집에는 가고 싶을 지언정 그런 상사가 되고 싶다. 그분처럼 높은 자리는 못 차지하고 있지만, 눈치보이는 늙은 철부지로만 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 철없는 인간인건 아마 늙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접만 받고 나잇값을 안하는 사람은 반칙이다. 반칙하며 살기는 싫다. 회사에 있든 어느곳에 있든. 그게 요 며칠 생각한 나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