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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Apr 14. 2022

글만을 위한 공간, 브런치를 시작하다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우리를 만들어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며,


아침 산책 중 주운 꽃송이와 노트


기록이 제일 쉬웠어요


나는 나 스스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늘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매일 꾸준히 흘러가는 시간 속 생각의 조각들을 기록하고, 내가 겪었던 사건과 특별한 경험의 순간들을 글로 톺아봤으며, 누구보다 성실히 무엇인가를 쓰는 사람이었다. 아주 꼬맹이 때부터 늘 그래 왔던 터라 매일의 꾸준한 기록을 하는 행위에 어떤 거창한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굳이 그 행위에 이름을 붙이자면 '블로그 질' 혹은 '일기 끄적이기' 정도나 될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내가 십수 년간 해왔던 매일의 '소소한 끼적질'이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이자 필수요건이라 했다. 나는 지난 십여 년간 블로그에서 돈도 안 되는 '일기'를 끼적거리고 있었는데 퍼스널 브랜딩 전문가로 거듭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플랫폼에 '기록'을 남긴 덕에 '작가'도 되고 자기 이야기로 에세이를 엮어 출판도 하고 전문가로 인정도 받고 돈도 벌고 있다고 했다.


오늘 읽었던 책이나 인상 깊었던 구절을 손글씨로 적은 'QOTD - Quote of the Day,'나 'TIL - Today I Learned,' 오늘 들었던 음악 중에 좋았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로 엮은 '오늘의 플리', 오늘 갔던 카페의 풍경을 슥슥 그린 '오늘의 카페' 등.. 이걸 좀 더 체계적으로 구조화, 테마화하여 '사람들이 더 많이 찾고 싶은' 콘텐츠 마케팅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매일의 사진이나 캘리를 첨부한 일기 포스팅으로 줄줄이 써왔던 거다.


오랫동안 나를 알아왔던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람들이 최근 들어 부쩍, "제이미, 너는 글을 재미있게 쓰니까 브런치 좀 해보면 어때? 네가 마음먹고 쓴 글을 읽고 싶은데."라며 브런치 작가 신청을 적극 권해주었다.






브런치 가입하고 글쓰기 시작하기


시작하자마자 난관. '브런치에서 사용할 이름을 입력해 주세요.'


브런치.. 블로그 같은 거 아니야? 아니란다. 작가 신청을 해서 통과를 해야만 작가로 글을 발행할 수 있단다. 그래, 그럼 뭐 이야기 나온 김에 가입이나 하지 뭐. 그러나, 여기서부터 아득해지고 말았다. 이름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라고 하실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이름에 진심이거든요.


이름, 네이밍은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퍼스널 브랜딩 관점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기업의 사명, 간판을 내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신중해야 할 것 같았다. 블로그에서 쓰던 닉네임을 그대로 쓰자니 너무 그쪽 페르소나를 데려오는듯한 느낌이다. 다른 브런치 작가분들처럼 실명을 쓰자니 왠지 인터넷의 익명성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지만 내가 아닐 수 있는 익명성, 그게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 건데. 그렇다고 영어 이름을 쓰자니 그것도 부담이다. 닉네임 같이 들리지만 엄연히 회사에서 사용하는 실명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이름 정하는 것만 한참 고민했다. 하긴, 아이 이름 정하는 것도 한 달 꼬박 걸려 벌금내기 일보 직전에 어렵사리 결정해서 등록했던 사람이니 말 다했지만.. 휴, 새로운 공간에서 사용할 닉네임 하나 정하는 것도 이리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글쓰기로 넘어왔다. 이름 정하는 것에 비하면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 내 안에 꺼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HTML 코딩으로 제작한, 그런데 이제 그래픽 디자인을 곁들인..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던 꼬꼬마 시절부터 그 시절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블로그 헤비 유저를 거쳐 인스타의 투머치토커 (동생이 제발 언니 인스타에 글 좀 짧게 쓰랬다;)로 거의 이십 년을 지내왔으니까 브런치도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브런치 글쓰기 첫 화면



아...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이 화면을 보고 공백의 美, 여백의 美 따위를 느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글 잘 쓰시는 전업 작가분들 조차도 막막해지는 화면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콘 세 개만이 휑뎅그렁하게 놓인 회색 명조체의 '제목을 입력하세요'라 쓰인 제목란, 그 아래 한 줄짜리 디바이더, 본문란 아이콘 여덟 개가 전부인.. 사진이나 영상같은, 어떤 다른 '꼼수'도 쓰지 말고 제대로 각 잡고 글만 써보라는 듯 판을 깔아 둔 브런치의 UI에 새삼 놀랐다.


온통 하얗고 커다란 빈칸과 반짝이는 커서가 무척 압박적이고 무섭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몇 번이고 자판 위에서 꼼지락 거리다 스크린을 덮었다. 그 이후로도 수차례 '시작을 시작'해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브런치여야만 하는 이유, 확신의 WHY 찾기


(이곳에서) 글쓰기를 시작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하고 많은 플랫폼들 중 왜 브런치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최근 제현주 대표님의 『일하는 마음』을 다시 읽었는데, 인디음악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인 이랑 님의 일에 착수하기 전 떠올려보는 '세 가지 조건'에 대해 언급되어 있었다. 그의 발언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할 때 아래의 세 가지 조건 중 2개가 충족되면 할만한 일이라 여긴다 했다. 세 가지는 바로 명예, 돈, 그리고 재미. (2017년 한국 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 수상 후, 수상을 했으니 명예는 있지만 돈이 안된다며 트로피를 그 자리에서 경매로 팔았고 아직까지도 여전히 파격적인 수상 퍼포먼스로 회자된다.)


자, 그럼 똑같은 질문을 나에게 적용해보자.  이 접근도 어렵고 아무나 쓸 수도 없는 브런치에서 글쓰기를 도전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확실한  WHY  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다른 것보다 브런치 작가, 라는 타이틀에서 명예가 있어 보인다. 요즘 친구들에게 중요한 '있어빌리티' 자동 장착이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한 곳에 공개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번 나 여기 있어요! 나 좀 봐줘요! 나도 글로 인정받고 싶다! 온몸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보이긴 하다만,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여타 블로그와 달리 어쨌든 확실히 명예가 있어 보인다.


둘, . 글쎄, 브런치로 돈을 번다는 이야기는 곧 이 플랫폼에 발행한 글로 어느 부문에 출품하여 수상을 하고, 작가로 데뷔를 했다는 뜻이거나 이곳에 올린 글이 '퍼스널 브랜딩'에 도움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수많은 기회가 열려있는 곳이지만 차근히 쌓는 것부터 해야 되지 않을까 싶으니 패스.


셋, 재미는 아직 제대로 해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다. 러프 카피에 가까운 끼적글을 올려도 썩 부담스럽지 않은 소소한 맛의 블로그와는 달리, 글쓰기 버튼을 누르면 아무것도 없이, (심지어 이모지 하나 자유로이 넣을 수 없는!) '자, 이제부터 제대로 된 글을 써보거라!'라는 백지 앞에서 매번 아득해짐을 느끼는 것도 일종의 재미라고 명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세 가지 조건이 '할지 말지'의 기로에 서서 따져볼 수 있는 뾰족하고 속 시원한 기준점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 동기부여를 해주기엔 다소 맞지 않는 기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자꾸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그래,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다. 안다. 그러나 빈 화면만 바라보며 손가락만 한참을 달싹거리다 이유를 찾지 못하고 페이지를 껐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글을 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 안의 내용, 스토리인 것 같다. 스토리텔러로서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연준 시인도 『쓰는 기분』에서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말은 글의 알맹이다. 알맹이가 실하면, 글은 (저절로) 피부가 되어준다. ... 이야기꾼은 상대와 소통하려 하고, 젠체하지 않으며, 정보가 아닌 '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 "솔직함은 재능의 일부다."라고. 글이 저절로 피부가 되어 실한 알맹이, 곧 스토리를 꺼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곳에 나만의 스토리텔링을 솔직하게 꺼내보면 어떨까 싶었다. WHY 같은 것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준에 기대어 따져보지 말고, 그냥, 진짜 내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 캐나다 이민 1.5세로서 그때 그 외롭고 어렸던 시절의 소회라던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류상 외국인으로 수많은 좌충우돌을 겪으며 살아가는 직장 수난.. 아니 생활기, 나 자신과 아이를 동시에 키워가는 엄마로서의 일상 이야기, 최근 입문한 취미발레에 관한 감상 같은 것.


모쪼록 이곳이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채널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도 아닌 내가 써낸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수단이 되었으면 좋겠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과 위로가, 때로는 도움이, 또 소소한 즐거움마저 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더 미루지 않고 시작해보기로 했다,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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