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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Oct 26. 2022

차갑고 달콤한 위로의 맛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아직은 쌀쌀한 봄이었다. 날짜만 3월이었지 살갗에 와닿는 공기는 에일 듯이 시린. 그날도 여지없이 야근을 했다. 하루 종일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듣기도 싫을 정도로 많은 통화를 하고, 메일을 쓰고, 다시 전화를 해서 ‘혹시 내 메일 봤니, 시일이 급한데 언제까지 답변 줄 수 있을까, 빠르고 긍정적인 회신 주면 고맙겠다,’ 같은 말들을 끊임없이 했다. 저녁도 회사에서 해결했다. 스팸 한 줄과 모짜렐라 치즈가 녹아있는 계란말이 김밥과 매운 떡볶이로. ​


그래,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할 건 다 했다, 일단 집에 가서 눈이라도 붙이고 오자, 하며 회사를 나섰다. 이미 메인 도어가 잠겨있어 주무시던 수위 아저씨를 깨워 문을 열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겨우 잡은 택시를 타고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왔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있는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하겐다즈 녹차 맛 한 통을 꺼내 들었다. 집에 들어와 세수도 안 하고 옷도 회사 갔던 차림 그대로 스댕 수저 하나만 달랑 들고 와서 자취하던 오피스텔 바닥에 퍼질러 앉아 아이스크림 한 통을 끌어안고 퍼먹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펑펑 났다. 대체, 무엇을 위해. 같은 생각만 끊임없이 나고 모든 게 부질없다 느껴져서. 일하는 보람은 무슨, 그저 회사에 갖다 바친 스물아홉의 삶이 서럽고, 가족 없는 이곳이 외롭고, 창밖으로 밤을 잊은 마포대로의 불빛을 내다보노라면 딱히 대상도 없는 그리움이 사무치게 몰려와 마음에도 그리움이 벌겋고 노오란 멍이 들었다. 서글픈 감정을 부여잡은 채 아이스크림을 다 퍼먹고 누웠다. 새벽 세 시 반.




오늘 하현의 아이스크림 에세이를 읽는데 문득 그때의 내가 생각이 나서 괜히 센티멘탈 해졌다. 새벽에 지칠 대로 지쳐 돌아와 울면서 밥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서럽고 외로웠던, 한국 직장 생활에 적응하던 시절이. 웬 감기는 그리 자주 걸리는지. 내가 이렇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애였나 싶었던 매일이. 하겐다즈 녹차 아이스크림 한 통이 주는 위로의 맛을 알겠던 그날들이.


그날들 이후 나의 위로의 맛은 줄곧 하겐다즈 녹차 아이스크림이었다. 하현 작가에게 수많은 아이스크림들과 이야기가 있었듯, 나에게 차갑고 달콤한 위로의 맛, 지친 하루를 도닥이고 서러움을 달래주던 맛은 하겐다즈 녹차 아이스크림이다.











아이스크림은 내가 가진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서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차갑게 신선해진 나는 다시 뜨거운 것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떠난다.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어떤 것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 오래 반짝이겠지.




누군가의 최선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한 것 같다. 모두가 돌아서도 끝까지 응원할 용기를 주니까. 가능성은 숨은그림찾기의 아주 작고 희미한 그림 같아서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존재를 자꾸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가장 멋진 모습을 발견하면 그 장면이 흐릿해지기 전에 마음속 깊이 새겨놓는다. 그게 나 자신일 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 때도. 형편없이 눅눅해질 미래의 어떤 날에도 우리의 최선은 거기 남아 변함없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최선을 안다. 오래오래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누구보다 밝게 빛났던 순간을 안다. 우리가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천하무적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게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만은 끝까지 나를 놓지 않을 테니까. 눅눅한 내가 못 견디게 싫다가도 아주 미워하지는 못할 테니까.

이 마음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몇 번을 얼었다 녹아도 다시 처음처럼 바삭할 것이다.




하현,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에세이 #아이스크림 #추억소환 #직장인 #일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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