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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Oct 13. 2022

아니 에르노의 강물에서 헤엄치기

2022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글쓰기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자마자 연달아 그녀의 소설들과 인터뷰 집을 읽었다. 데뷔작인 <빈 옷장>에서부터 아버지의 죽음 이후를 담아낸 <남자의 자리>, 그리고 그녀와의 인터뷰를 담아낸 <진정한 장소>까지.





빈 옷장


<빈 옷장>은 불법 낙태의 경험을 ‘드니즈 르쉬르’의 이름을 빌려 자전적인 스타일로 쓴 ‘소설’이다. 충격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여 문장이 짤막짤막하게 툭툭 끊기며 바로 전 문장과 다음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 작품들 전반에 깔린 정치적 스탠스, 페미니즘적 요소, 그 시대 계급주의의 묘사 등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를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표현들이 사실적이고 적나라하다 못해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라 다소 불편하고,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게 그녀 그 자체로 다가왔다.


그들은 겁주는 것을 즐긴다. 공기 한 줌에 죽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개구리는, 개구리를 빨대로 터지게 만든다면.... 죽는 게 낫다. 더는 구역질이 나오지 않고, 유백색의 역겨운 악취 속에 헤엄치지 않는다. 갑자기 더러운 음식을 쑤셔 넣는다. 꿈에서 몇 킬로미터의 가공육을, 쇼윈도의 식용색소들을 본다. 두 달 만에, 접시에 먹던 사료를 뱉을 준비가 된, 킁킁거리는 개가 됐다. 독약 같은 녹색 시금치, 머큐로크롬 같은 붉은 토마토, 구운 비프 스테이크의 의심스러운 바삭한 부분. 산패한 비앙독스의 맛이 계속 느껴져서, 그것이 위에서 위궤양처럼 자라고 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책들은 나를 구역질 나게 한다.

아니 에르노, 빈 옷장 중에서.





남자의 자리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감성적이지 않은, 과한 슬픔이나 그리움이 먹먹하게 묻어나지도 않는, 아주 드라이한 문체로 죽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저 목도하는 기록에 지나지 않는 글인데도. 문득 떠오른 기억을, 순간의 생각을, 그와의 추억을 나열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을 읽는 내내 굉장히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몇 시간 만에 아버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오후가 끝날 무렵 방에 혼자 남겨졌다. 차양을 통과한 햇살이 장판 위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것은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퀭한 얼굴에 코만 보였다. 흐물흐물한 파란색 양복에 감싸인 그가 마치 누워 있는 한 마리의 새 처럼 보였다.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 남자의 얼굴은 그가 숨을 거두자마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다시 그 얼굴조차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은 월요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썩은 물이 고인 화병에 버려둔 꽃에서 나는 은은하고도 끔찍한 냄새였다.

어머니는 장례식 날에만 가게 문을 닫았다. 그렇지 않으면 손님들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고, 어머니는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위층에 누워 있었고, 어머니는 아래층에서 파스티스와 와인을 팔았다. 눈물, 침묵, 그리고 존엄. 어떤 고상한 세계에서는 바로 그런 것이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가져야 할 태도일 것이다. 어머니는 이웃들처럼 존엄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처세법을 따랐다.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중에서.


'썩은 물이 고인 화병에 버려둔 꽃에서 나는 은은하고 끔찍한 냄새,'란 표현에서 정말이지 한참을 멈춰있었다.





진정한 장소


<진정한 장소>를 읽으면서는 앞서 읽은 두 책으로 인해 물밀듯 몰려온 복잡한 감정들이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 집이라 먼저 읽은 두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아주 조금 더 (...) 들어가 있다. 세 책을 왔다 갔다 하며 해설집 읽듯 읽었다.


저는 에토스(ethos)와 존재의 방식, 생각하는 방식조차 달랐던 세계를 지나왔죠. 그 충격은 여전히 제 안에, 육체적으로도 남아 있어요. 어떤 상황들은 … 아니, 쑥스러움이나 불편함이 아니라, 자리, 마치 저의 진짜 자리가 아닌 것 같이, 진짜 그곳에 있지 않으면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대부분 사교적인 상황들이 그렇죠. 저의 최초의 세계, 지배받는 세계를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로 부정하는 세계, 지배당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들이요.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글이에요. 글은 하나의 장소이죠. 비물질적인 장소. 제가 상상의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과 현실의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피 방식이에요. 다른 곳에 있는 거죠. 항상 글쓰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바로 침수하는 장면이에요. 내가 아닌, 그러나 나를 거친 현실 속으로의 침수. 저의 경험은 통과의 경험 그리고 사회 세계의 분리의 경험이죠.
저는 사진이 생보다는 죽음 쪽에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오히려 죽음, 소멸 쪽에서 고찰한 삶이죠. 사진은 정지된 시간일 뿐이에요. 그러나 사진은 구원할 수 없어요. 아무 말이 없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그것이 과거의 고통을 파고들어간다고 생각해요. 글은 구원하죠. 그리고 영화도요. 어쩌면 그림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무엇보다 글이 그래요.
저를 아이디어로 이끄는 내면화된 시각적인 이미지, 또 현실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글을 쓰거든요. 아이디어, 아이디어는 먼저가 아니죠. 그것은 나중이에요. 예를 들자면 아이디어는 정말 사물의 확실함을 가진 강렬한 추억에서 나와요. 추억은 사물이에요. 단어도 사물이죠. 돌처럼 그것들이 느껴져야 해요. 어느 순간이 되면 페이지에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야 하고요. 만약 그 상태가 되지 못한다면 저에게 이 단어와 문장이라는 물질은 적합하지 않은 것, 근거가 없는 것이 되죠. 이 모든 것은 상상의 세계에 속해 있어요. 물론 글에서의 상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요. 저는 글을 쓴다는 것이 강바닥에 있는 돌을 꺼내는 일과 같다고 생각해요. 바로 그거죠.



절대로 인터뷰어가 하는 질문에 대해 순순이 명확하게 똑떨어지는 답을 해주지는 않는 느낌이지만... 읽고 나서 내 안에 휘몰아치는 감정, 수많은 물음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식간에 미로에 빠진 듯한, 깊은 물속으로 침잠된 것 같은, 혼란한 느낌에서 조금이나마 그녀의 생각, 특히 글쓰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 표현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녀에게 글쓰기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을 다시 체험하게 하는, 과거의 고통과 겪어온 과거와 현재의 전부를 구원하는, 시선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이자 강에 침수하여 바닥에 있는 돌을 줍는 일 같다면, 독자에게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은 마치 아니 에르노가 데려간 강물에 풍덩 뛰어들어 숨 가쁘게 물결을 가르고 팔다리를 휘저어 헤엄을 치는 일처럼 느껴진다.




� 아니 에르노, <빈 옷장>, <남자의 자리>, <진정한 장소>

� 노벨문학상 수상자, 프랑스 소설, 인터뷰 집


2022/10/7 블로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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