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 같은 채용 공고, 접객 가이드
어느 날 마포의 작은 골목에 위치한 아이스크림 집, ‘녹기 전에’의 직원 채용 공고가 떴다. 흔한 채용 공고를 예상하며 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별도의 노션 페이지에 원하는 동료상과 더불어 한 권의 e북에 가까운 ‘접객 가이드‘가 있으니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만 지원해 달라고 쓰여있었고.. 뭐 이런 채용 공고, 이런 사람이 다 있냐며, 그야말로 엄청나게 화제가 되었다.
이 책은 그 놀라운 ‘접객 가이드’의 출판 버전이다. 디지털의 발달로 인한 휴머니즘, 교감, 다양한 감정, 따듯한 친절의 상실과 ’태도의 위기‘에 대해 화두를 던지며 시작된다. 또한 ’ 접객‘이라는 것 자체를 그저 단순노동,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돈을 맞바꾸는 어떤 것, 경력 쌓기와는 무관한 소모적인 일로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
”(매장의) 환대가 시간을 거슬러 가까운 과거의 기억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접객이 가진 가장 놀라운 힘,“ 이라 말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게 업무 매뉴얼이 아닌,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해, 삶에 대한 가치관에 대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왜-WHY‘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도와 존재의 이유를 들려준다. 태도는 쉽게 배우거나 내재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행동의 근간이 되는 마음을, 또한 그 마음으로부터 기인한 행동이 얼마나 스스로에게도 좋은 일인지를 이야기한다.
아이스크림이라는 음식과 시간의 철학을 연결한 점도 재미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은 시계와 아이스크림뿐이라는 것. 둘 다 ’흘러서‘ 시간을 알려준다는 점. 시간도 흐르고, 아이스크림도 시간이 지나면 녹아서 흐르고.. 아무래도 언어유희의 천재 같다.
시간의 소중함을 사람들과 나누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녹기 전에‘ 아이스크림 가게 존재의 목적이라고. 짧은 유행, 자극적인 것을 지양하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멀리, 오래 본다는 그의 가치관이 책 전반에 잘 녹아있었다.
행복에 대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행복은 사건적이 아니라 과정적이며, 인생 또한 ’drive‘가 아니라 ’derive‘ 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인생이라는 시간을 방향도 모른 채 무조건 속도 있게 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오늘을 이끌어내고 오늘이 내일을 이끌면서 누적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삶과 죽음 사이를 잘 메꿔가는 것이 중요하고, 이미 가진 것에서 충만한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고.
“일이든 삶이든 올바른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커집니다.
태도는 뿌리와 같고,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땅 위의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장이 아니라 생장해야 합니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뿌리를 만질 때 느껴지는 그 단단함이 일과 삶에 깃들어야 합니다.”
시대적 ’가치‘인지, 시대적 ’장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성장 대신, 존재할 이유를 찾으며 지속 가능하고 자연스러운 형태로 발전하는 생장을 해야 한다는 점에 매우 깊이 동의했다.
숫자나 어떤 지표를 판단 기준으로 두고 빠르게 달리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무한하고 맹목적인 성장이 얼마나 사람을 무리하게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자신과 인생 전반에 걸쳐 어떤 마인드로 살아갈 지, 삶을 꾸려가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마치 인문학, 또는 철학 책 한 권 읽은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과연 나라는 시간 속 내 기억과 감각에 저장된 나를 이루는 수많은 사건들을 잘 꾸려가고 있는지, 일상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있는지, 과거-현재-미래 나와 관계하는 시공간 모두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현재인지, 목적 달성이 아닌 과정에서의 경험과 배움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생장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2024년 들어 읽은 첫 책의 리뷰를 이제야 올려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한동안 멈춰있던 북콘텐츠에 불을 켠다면 꼭 이 책이었으면 해서 다른 여러 책들을 뒤로하고 <좋은 기분>의 리뷰부터 올려본다.
새해 첫 책, <좋은 기분>으로 시작해서 진짜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